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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 Mar 31. 2020

임신 5개월의 일상과 일

요즘의 나는 봄의 생명력을 닮았다

프렌치토스트 만들기


 나는 요리를 싫어하는 편이다. 먹는 행위부터 귀찮아해서-생존을 위해 꾸역꾸역 먹을 때가 많다- 요리도 정말 귀찮아한다. 그러다 문득 요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었다. 스텐볼에 달걀 두 개를 톡 톡 깨고, 우유를 두 스푼 따라 넣고, 설탕을 세스푼 넣고, 볼에 담긴 둥근 노른자 두개를 숟가락으로 건드려 깬 뒤 힘차게 저어준다. 스텐볼과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부엌을 채운다. 새로 산 식빵을 꺼내 삼각형 모양으로 자르고, 테두리도 조심스럽게 잘라준다. 잘 섞인 달걀설탕물에 삼각형으로 잘라놓은 식빵을 담그니, 새하얀 식빵이 노오랗게 물든다. 불을 올리고, 프라이팬이 달궈지면 버터를 두 조각 올린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버터냄새가 사방에 퍼진다. 촉촉하게 달걀물이 적셔진 식빵을 프라이팬에 넣자, 치익-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고소하게 빵이 구워지는 틈에,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 쪼르륵 유리잔에 붓는다. 유리잔을 따라 새하얀 우유가 채워지고, 찰랑거리는 소리에 기분이 좋다. 잘 구워진 빵을 포크로 집어 입안으로 가져간다. 폭신한 프렌치토스트가, 달다. 남편 입에도 쏙 넣어준다.


 평소에는 귀찮던 요리가 힐링이 되었던 날. 임신 중기에 들어서자 힘들었던 요리가 할만해지고, 생활이 편해졌다.


복덩이 아가


 "아기가 복덩이인가 봐."
 어머니의 말에, 정말 그렇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 삶의 주도권을 아기에게 빼앗기거나 아기와 나를 일체화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아기는 복덩이' 라던가 '아기 덕분에 잘 풀린다' 라는 말들을 삼가왔다. 아기가 생겨도 내 삶의 주도권은 나고, 모두 내가 주체적으로 한 일의 결과이지 아기 때문에 잘되었다는 식의 생각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다 '임신해서 몸이 더 건강해진 것 같고 기분도 좋아지고 잠도 잘 잔다' 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든 게 아이 덕이라는 걸 깨달았다. 임신해서 더 신경 써서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하고 있고, 늘 달고 살던 인스턴트나 과자 등을 거의 끊었다. 원래 불면증이 있었는데 잘 자야 아기가 잘 자랄 것 같아서 일찍 자려고 하고 잠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피하고 있다. 운동이 가능한 시기가 되자 운동을 한 시간씩 꾸준히 하고 있다. 임신 전엔 내 의지만으로 지속하기 어려웠던 일이, 나의 아이 덕에 지속하게 된다. 고마운 나의 아가. 


 나는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임신하고 나니 내가 정말 끔찍하게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또 사랑하구나를 깨달았다. 임신 전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임신하고 출산하면 내 모든 자유가 사라질까 봐 무섭다' 라고 말하며 운 적도 있었고, 지금 출산 후 염려되는 점도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나 보다는 출산 후 2개월 뒤에 있을 친구 결혼식에 못 갈까 봐 걱정되는 것과 출산 후 4개월 뒤에 있을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못갈까봐이다. 출산 후 여행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기는 부모님께 맡기고 남편이랑 둘이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출산 후에도 남편에게 가끔 아기를 맡기고 내 시간을 가져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는 아이보다 내가 더 소중한 것 같다. 출산하고 육아를 하다 보면 이 마음이 달라질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이보다 나를 더 소중히 하고 싶다. 철없는 생각이려나.


대체가능한 존재


 "쌤, 벌써 3명째 그만뒀어요."
 전 회사를 그만둔 지 6개월째, 내 후임으로 온 사람이 세 명째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직장으로 입사해 4년 정도 근무했던 터라 나름 애정이 깊었던 회사인데, 그 소식에 나도 충분히 그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 다녔던 -그리고 지역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계속 다녔을- 회사가 남들에게는 오래 다닐 회사가 못 된다는 것, 내가 4년을 일했던 자리에 누구는 한 달만 일하고 그만둘 수도 있다는 것, 내가 나름 만족하며 받았던 월급을 작다고 하며 입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생각해본 적 없고 외면했었던 사실을 새로 마주한 느낌이었다. 지나고 나니 그때 나름 만족하면서 다녔지만 어떻게 그 일을 다 해냈나 싶기도 하고,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가 싶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도 내가 그만두면 아주 쉽게 대체될 자리. 나는 평생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어릴 적부터 '대체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 중 하나였다. 서른 살, 나는 너무나도 대체되기 쉬운 일을 하고 있다. 엄마라는 직책을 얻게 되면 나는 대체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만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마주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일하는 게 좋을때


 첫 회사가 새로 시작하는 부서였던 탓에 많은 체계를 내가 만들었었다. 파일 트리, 업무메뉴얼, 많은 파일 등등... 그래서인지 이직하고서 온 회사는 너무 답답했다. 자주 전임자가 바뀌었던 탓에 파일정리는 엉망이었고, 일이 체계 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부서장이 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업무를 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그 조직에 몇달 적응하려 하다가 내 업무 방식을 조금씩 주장하기 시작했다. 공유 폴더를 만들고, 직원의 모든 자료를 공유하게끔 제안하고, 수기로 작성하던 파일을 전산화하고, 업무메뉴얼을 만들고, 찾기 쉽게 파일 트리를 개편하고, 직원이 오롯이 담당해도 되는 일을 몇 가지 가져왔다. 몇 년 동안 공문 작성을 부장님이 하시다가 내가 맡게 되어 공문 하단에 담당에 내 이름이 적히기 시작했다. 서류에 내 이름 세 글자가 작게 새겨질 뿐인데, 새로운 책임감과 인정받은 느낌이 들던 순간이었다. 작은 조직이라 내 의견을 잘 받아주고 불편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원래 성격이 예민하고 히스테릭한 편인데, 쌤이 오고 많이 안정되었어. 예전에는 소리도 막 지르고 그랬었는데, 그런 게 없어져서 편해졌네."
 "쌤이 오고 내가 일하는게 편해졌네."
 부장님의 그런 말들이 고마웠다. 전임자에게 퇴사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부장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만둔다고도 했던터라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점차 부장님과 친해지고 맞춰가는 부분이 생기자 편해졌다. 부장님과 내가 잘 맞는 부분도 있어서 좋고, 부장님과 수다를 떠는 시간이 즐겁다. 부장님이 나로 인해 편해졌다고 하니, 나도 참 고맙다. 누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건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이사 후 꽤 오랜 시간 이 도시의 이방인 같았던 내가, 이 도시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준 회사와 동료가 고맙다. 회사가 있어서 참 감사한 요즘.


평범한 일상


 점심을 먹고 늘 옥상으로 올라간다. 아무도 오지 않는 옥상에는 푸르른 새싹과 삼월의 햇살이 가득하다. 나는 걷기도 하고, 햇볕을 쬐며 앉아있기도 한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찬찬히 오고 있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요즈음은 산책하러 출근하는 느낌이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30분 동안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햇빛 아래를 걷는다. 따스한 햇볕과 차가운 바람이 어우러지고, 맑은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삼월 초에는 군데군데 꽃망울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던 꽃들이, 삼월 말이 되자 어느새 아름다운 빛깔을 자랑하고 있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일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본능에 따라 그들이 해내는 것처럼, 나의 아이도 세포분열을 하고 뼈가 자라고 살이 차오르는 일을 스스로 해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아홉시에서 열시쯤이 되면 거실 불을 모두 꺼놓고, 요가 동영상을 틀어 요가를 시작한다. 아파트밖에 없어서 삭막하다고 생각했던 창밖 풍경은, 밤이 되면 꽤 근사해진다. 새하얗고 얇은 커텐 뒤로 아파트의 불빛이 총총 별처럼 비친다. 노랗고 하얀 백열등의 불이 별처럼 보인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편히 쉬고 있을 집들이 하나하나 모여 그럴듯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종일 굳었던 몸이 시원하게 풀리고, 내 심장이 콩콩 뛴다. 근사한 풍경과 편안한 목소리, 뻐근했던 몸을 풀어주는 요가, 그 후에 따스한 물에 하는 샤워까지. 잡념 없이 내 몸과 내 몸 안의 아가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별다른 태교를 못하고 있는데 요가 덕에 몸도 풀고 건강도 지키고 태교하는 것 같아 좋다. 코로나 때문에 회사-집 반복이 다인 평범한 일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요즘의 내가 바라는 건 임신기간 동안 나의 이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라는 것과 아이를 건강하게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다. 지금의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며 앞으로 올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하루하루를 지겨워하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아이 덕분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가, 부족함 많은 내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18주쯤이 되자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편한 자세와 편한 마음으로 있을 때면 아이가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지만 나의 아이는 자라고 있다. 오래전 성장이 멈추고, 주름이 느는 것을 보며 노화되는 일만 남았다고 느꼈던 내 몸에 아이 덕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요즘의 나는 봄의 생명력을 닮았다. 봄의 꽃들이 지고, 여름의 이파리가 무성하게 자랐을 때에 아이를 만날 것이다. 짧을 것으로 생각했던 임신기간 10개월이 참 길다. 그 어느 날보다 기다려지는, 아이와 만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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