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 0일 (출산예정일)
오지 않을 것 같던 출산예정일이 왔다. 그리고 아이는 아직 나올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잠잠하다.
출산휴가가 시작된 38주부터는 마음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준비가 안 되었는데 아이를 출산하게 될까 봐 무서웠고,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걱정되었다. 빨리 아이를 만나고 싶기도 했고, 천천히 낳았으면 하기도 했다.
휴직이 시작되자 신기하게도 매일 피곤하던 몸이 부지런해졌다. 휴직 다음 날 출산 가방을 부랴부랴 쌌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집안일과 집 정리, 출산용품 준비를 했다. 그동안 지겹게만 느껴졌던 집안일이 재밌게 느껴졌고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매일 만 보를 걷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걸었다. 주말이면 정오에서야 잠에서 깨어 늦은 아점을 챙겨 먹고, 밤이 올 때까지 누워만 있던 결혼 전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이 정말 마지막 휴가라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자그마한 아기 옷을 세탁하고, 널고 개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무서웠던 마음이 점점 진정되었다. 이 옷을 입은 아이의 모습은 어떨까? 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모습은 또 어떨까? 안방에는 커다란 아기침대를 설치했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실감했다. 신혼부부의 집이었던 우리의 집은 이제 아이 용품이 가득한, 아이를 위한 집의 모습이 되었다. 모노톤과 최소한의 것으로 꾸며놓았던 우리의 집이 그리울 것 같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아이의 것들에 나는 곧 적응할 것이다.
임신 10개월에 들어서고, 가장 큰마음의 변화는 이제는 아이가 ‘완벽한 타인’처럼 여겨진다는 점이었다. 그전까지는 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아이가 이상하게도 지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아이가 태동을 하거나 딸꾹질을 하면, ‘어떻게 3킬로가 넘는 타인이 내 배 속에 있을 수 있지?’라는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 들어서 당황스러웠다. 출산 후 아이를 보게 되면 또 어떤 감정이 드련지.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자녀와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다. 무사히 아이를 만나서 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부럽다.
출산휴가를 시작하고 나서는 마음이 평온해졌고, 회사에 대한 감사함이 생겼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회사의 혜택들이, 돌이켜보면 고맙고 또 당연한 듯 누린 것 같아 미안하다. 내가 배려를 받음으로써 누군가는 그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그저 외면하고 싶었고 더 많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부럽기만 했다. 내가 휴직하는 6개월 동안 근로를 제공하지 않고도 출산휴가 급여와 육아휴직급여를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줄어드는 휴직 기간에 마음이 초조하기도 하다. 하루라도 더 아이와 함께하고 싶은데, 애타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아이는 나올 생각이 없다.
결혼 후 한 번도 뜯어보지 않았던 추억 상자를 1년 반 만에 정리했다. (결혼 전에도 잘 보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 속에는 대학 때 공부한 노트, 그림과 글 노트, 친구들의 편지가 가득했다. 처음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에 버리기를 망설였지만, 한번 버리기 시작하니 버리는 일이 즐거워졌다. 지나간 기억에 슬며시 웃음이 나고 추억에 잠겼다. 특히 기억하고 싶은 건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사진으로 찍어두어도 잘 보지 않겠지. 박스를 볼 때마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만, 친구들의 편지는 하나둘 읽다가 다시 박스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편지도 모조리 버리는 날이 올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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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 1일
산부인과에 방문하며, 이때까지는 다른 마음이 들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임신 10개월 동안 정말 별 탈이 없었기에 출산도 자연스럽게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진통을 느끼고, 병원에 달려가서 아이를 낳는 것만을 상상했다. 하지만 나는 입원을 하기로 했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유도분만'을 진행하게 되었다.
맑던 양수는 태변때문인지 태지때문인지(의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태변때문이라면,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 했다.) 탁해져 있고, 아이의 목을 탯줄 두 바퀴가 감고 있다. 한 달 전 탯줄 두 바퀴를 감고 있던 아이는 지난 진료 때 한 바퀴를 풀어서 다행이었는데, 다시 두 바퀴를 감고 있다니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기만 하다. 내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는데도 미안하다.
오늘 입원을 하기로 했다. 곧, 아이를 만난다.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발표자 같은 마음이야.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갑자기 앞 발표자의 발표가 성급히 끝나고 내가 무대에 올라갈 순간이 된 것 같다. 출산의 두려움이 가득하다. 마음은 쉬이 진정되질 않는다. 건강히 아이를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