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들 종류가 워낙 많고 브러시들은 용도별로 또 얼마나 많은지, 매일 아침 메이크업 짐가방을 끌고 나가는데 마치 여행하러 공항으로 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낑낑대면서 가지고 다니던 메이크업 가방이 워낙 무거웠던 터라 웬만하면 최대한 짐을 줄이고 싶었지만, 메이크업 가방 외에 내가 항상 빠지지 않고 소중하게 갖고 다니던 건 바로 유축기와 젖병 그리고 아이스팩이 담긴 보냉 가방이었다.
아카데미 시절 들고 다니던 트롤리
아카데미 수업은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5시까지였다. 오전에는 보통 이론수업을 하고, 점심 이후 오후에는 실습 위주의 수업을 했다. 이론 공부를 마친 후, 점심시간에는 식사는 거의 10분 내로 해결하고는 항상 유축기를 들고 수유실을 찾기 바빴다. 아직 출산한 지 백일도 채 안된지라 아직은 그래도 모유수유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아이와 하루 종일 있지 못한다는 죄책감으로 그래도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하고 싶었기에 무겁지만 꼭 보냉 가방은 빼놓지 않고 들고 다녔다.
유축기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아카데미를 다녔던 수강생은 아마 학원에서 나 혼자였던 것 같다. 아카데미 원장님은 항상 분주한 나를 보며 busy korean mommy라고 불렀다. 점심시간에는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근처에서 밥을 먹었는데 매번 급하게 먹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안쓰러워했다. 식사 후에 친구들은 근처에서 커피나 차 같은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곤 했는데 밥만 허겁지겁 먹고 수유실로 바삐 향하는 나를 위해 따로 과일주스를 챙겨주기도 했다.
보통 길 건너편에 있던 쇼핑몰 지하에 있던 수유실에 앉아서 유축을 했지만, 아가용품들을 많이 파는 쇼핑몰이었던지라 수유실이 항상 비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유실이 다 사용 중인 날엔 어쩔 수 없이 아카데미 한구석 창고 같은 방 안에 앉아서 해결해야 했다. 수유실에 앉아서 아가 사진을 보며 유축을 하고 있노라면 아가를 집에 두고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가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워볼 수 있을까란 생각도 하며, 이런 시간을 허락해준 아가에게 고맙기도 했다.
수유실에서 유축하는 동안-
수유실에서 유축을 하는 동안 아가 사진이나 영상을 보기도 했지만 오전에 배운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하고, 오후에는 어떤 식으로 모델에게 메이크업을 하면 좋을까, 어떤 색을 써보면 좋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버렸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서 오후 실습 준비를 하곤 했다. 아직 엄마가 필요한 아기를 집에 맡겨두고 보내는 이 시간은 나에겐 엄청 소중한 기회비용이었다. 그래서 단 일분일초라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초집중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고, 실습을 하다가 잘 안 되는 부분은 다시 연구해보고 계속 질문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가 낳은지 얼마 안된 엄마가 대단하단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 지금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열정과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힘들다기 보단 하루하루 배우면서 나만의 전문성을 갖춰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가면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려준 아가를 힘껏 안아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