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 평생 이 두 글자가 내게 가까이 다가올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항상 다치거나 아파도 재활 전 단계에서 멈출 만큼의 수준이었고, 그냥 간단히 물리치료를 받거나 침을 맞는 게 치료의 전부였으니 한 치 앞도 못 본 게 당연할 일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온몸에 재활을 깊게 새기게 되는 엄청난 경험치를 얻었다.
신경외과에서 처음 맞이한 재활은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하고 새하얀 벽 앞에 나와 아빠를 덩그러니 두고
[너희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보이니?]
“아니요?”
[응. 안 보이는 게 맞아. 지금부터 입구를 만들어. 상태를 보아하니 플라스틱 스푼이 장비로 딱이네. 아! 대신 너는 문을 못 만들어. 입구를 만들어서 들어가는 것도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것도 아빠의 몫이야.]
“그럼 저는 뭘 도울 수 있어요?”
[당장은 없어! 이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느껴보고 한껏 좌절해 봐!]
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아무것도 도울 게 없어도 원래 해야만 하는 일은 해야 했다. 아빠는 연하장애가 심한 상태라 L-TUBE(콧줄)로 경관식을 드시기 때문에 한 시간 넘게 식사를 하고 약을 먹인 후, 양다리에 힘조차 주지 못하는 아빠를 휠체어에 간신히 태워 제시간에 재활치료실에 모시고 가야 했다.
입원층과 재활치료실은 건물이 달라서 중간에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했고, 운동치료실과 작업치료실도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어서 끝나면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휠체어를 붙잡고 내달렸다. 이 병원 운동치료실은 치료시간 동안 보호자가 같이 있어도 괜찮아서 항상 운동 침대 끝에 앉아 아빠와 함께 있었고, 작업치료실은 보호자가 대기석에서 기다려야 하는 규칙이 있어 그 시간 동안 엄마와 통화를 하거나 저녁 끼니를 때우기 위해 한 층 아래로 빵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우리가 갔던 대학병원은 총 4곳인데 그중 2호선 라인에 있는 한 대학병원 내 재활병원만 입원실 배정 후, 재활하러 다닐 때 이송 요원의 도움이 필요한지 미리 물어보고 스케줄표에 적어서 때가 되면 태워주러 왔다. 하지만 난 여기서도 도움을 받지 않았다. 워낙 재활 시간표는 빡빡하고 태울 사람은 많아 그분들에게 의지하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움직이는 게 역시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 편하기 위해 처음 재활학과로 전과 후 초반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혼자 아빠를 휠체어에 태웠고, 결과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전완근을 얻었다.
재활과로 전과 후 아빠는 하루에 두 번 운동치료(재활선생님과 운동+전기자전거+경사 침대), 각 한 번씩 신경전기치료(FES)와 연하 치료를 받았다. 이때만 해도 눈짓과 손짓만 아주 조금 할 수 있고 말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아서 언어치료는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상호작용이 전혀 되지 않으니 작업치료 또한 받을 수 없었다. (여기 재활과에서는 두 가지 다 그 컨디션에서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최소한으로 재활을 받았는데 뭐가 그리 바쁘게 지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마 병실에서 치료실까지 이동 동선이 길어서 시간도 많이 쓰고 나중에는 한방에서 침 치료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조금 어리바리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재활과에 와서 주말을 제외하고 꾸준히 (강제로) 운동을 하자 전보다 초점도 잘 맞춰지고 의식도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운동치료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모호하긴 해도 고갯짓으로 대답이 나올 정도로 인지도 천천히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요즘도 불리하다고 느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급 자는 척이나 못들은 척 한다. 아으 얄미워.)
아빠는 항상 운동 후에 15분 정도 경사 침대를 꼭 탔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 시간이 지루했는지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마비되지 않은 왼쪽 발을 슬금슬금 바닥에 비비며 바깥 방향으로 빼는 걸 선생님께서 보시고 보호자님 발로 아버님 발 도망 못 가게 발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으라는 극약처방을 내려주셨다.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던 아빠의 얼굴이 글을 쓰며 다시 떠오른다.
아무래도 프로 탈출러의 조짐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