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가 또 바뀌었네요? 그럴 거면 간병인 쓰세요. 이렇게 간병하면 환자만 더 안 좋아져요.”
언니와 교대를 마치고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간호조무사님이 대뜸 나에게 한 말이었다.
“네? 갑자기 무슨…?”
“아니 어머님 말고 다른 분이 오셔서 간병하시는데 사사건건 다 물어보시면 저희가 일을 어떻게 해요? 간병을 계속하던 사람이 해야지 이 사람 저 사람 간병하면 환자만 불안해서 회복 안 되는데, 몰라요?”
한숨과 짜증, 거기에 어이없다는 듯한 조무사님의 말에 순간 뒷골이 단단해졌다. 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예측 가능한 상황들이 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애써 억울한 마음을 눌렀다.
“아. 앞으로 제가 주중에 있고 주말에 엄마가 와서 해주실 거예요. 이렇게 바꾼 건 이번만 그래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아빠가 다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 말을 길게 붙이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아빠를 잘 보면 그만인 것을 …. 더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날이 밝은 후, 회진 전에 잠깐 만난 수간호사 선생님께 일이 커지지 않을 선에서 상황을 여쭤봤다.
“혹시 주말 동안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이 저희 때문에 불편하셨을까요? 사정이 있어서 하루하루 간병을 다른 사람이 했어요. 이번 주부터는 저랑 엄마가 주중이랑 주말로 나눠서 할 거고요."
내 말을 들은 수간호사 선생님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최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셨다.
“아니. 전혀 그런 거 없어요. 따님. 누가 뭐라고 그래요?”
“뭐라고 한 것까지는 아니고요. 주말에는 간호인력도 적은데 질문을 많이 해서 불편하셨던 것 같아요. 보호자 자주 바뀔 거면 간병인 쓰는 게 나을 거라고…”
동그랗던 수 선생님의 눈빛이 단호하게 변했다. 그리곤 내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여주셨다.
“전혀 그런 말 없었으니까 어머님이랑 따님이 교대해서 간병하셔도 돼요. 그런 일에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아버님 회복에만 집중해요.”
낮게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수 선생님의 대답에 차분해졌다. 별일 아니었다는 게 확실해져서 움츠릴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아직은 중환자실과 비슷한 집중치료실이라 간단한 일 외에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다 도와주셔서 의외로 내가 할 일은 적었다. (일반 병실로 가면 체감상 할 일이 1.5배 정도 되는 것 같다.) 끼니마다 소화가 다 됐는지 확인하고 식사와 약을 챙기는 건 아주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소변 백을 주기적으로 비우고, 경관식 때문에 거의 늘 설사를 해서 기저귀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초반에는 기저귀 가는 요령이 없어서 간호사&조무사 선생님들이 진짜 많이 도와주셨다. 정말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다.)
이렇게 아빠를 챙기는 동안 내 식사는 대충 즉석밥과 김, 엄마가 집에서 해다 주시는 마른반찬 조금이 전부였다. 그것마저 목으로 안 넘어가면 편의점에서 빵이나 드링크 요구르트를 사서 먹었다. 솔직히 초반 한 달 정도 간병하는 중에는 배고픔이 잘 안 느껴졌다. 아마 잠을 거의 30분, 한 시간 단위로 쪼개 잤기 때문에 식욕이 감퇴했던 것 같다. 밥을 먹다가도 기계에서 다른 음이 들리면 다 내팽개치고 간호사 선생님을 부르러 가고, 가래가 너무 많이 끓으면 어정쩡한 자세로 간호사 데스크에 가서 서성거리며 선생님을 불렀다. 그러니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냥 쓰러지지 않고 간병하려고, 살려고 몇 숟가락 먹은 게 매 끼니의 전부였다.
월요일 아침. 첫 교수님 회진 시간이었다.
“수술은 잘 끝났으니 회복을 잘하셔야 합니다. 개두술 한 부위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아야 뼈를 닫을 수 있으니까 주위 깊게 잘 살펴보세요. 아직 의식이 없으니 의식이 좀 돌아오면 재활도 시작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긍정적인 피드백은 아직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희망은 있는 것 같았다. 교수님 회진이 끝나면 신경외과 PA 간호사* 선생님이 꼭 오셨는데 아빠의 상태를 좀 더 면밀히 살피시고 가래는 어떻게 생기고, 잘 떨어지게 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하셨다. 뭔가 교수님에게는 질문을 하기 위해 다가가려면 큰 벽이 있는 것 같았지만 PA 선생님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해 궁금한 게 있으면 따로 질문도 곧잘 할 수 있었다.
[*PA 간호사 : 전공의 부족으로 인하여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의료 공백을 매우기 위해 의사를 보조하며 근무하는 간호사 / 네이버 블로그 <외과 간호사의 병동 간호노트>에서 발췌]
수간호사 선생님도 근무시간 동안 자주 아빠를 살펴주셨다. 설사 때문에 기저귀를 갈 거나 더러워진 침대 시트를 갈 때 매번 오셨던 것 같다. (진짜 한 번씩 엄청난 타이밍에 나타나주셔서 나에게 빛과 소금 같았던 우리 수쌤! 같은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이 다 존경하고 좋아하셨다!) 의식이 없는 환자를 내가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쉽게 양옆으로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집중치료실에 있는 일주일 동안 대변 기저귀를 갈 때 수간호사 선생님이 찾아와서 도와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본인 직급보다 아래에 있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담당해서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선생님은 내가 유일하게 본 그렇지 않은, 날개 없는 천사의 실존 인물이었다.
많은 간호사 선생님들이 도와주셔서 대변 기저귀 가는 건 점점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그 상황에서 다행인 건 내가 여러 종류의 변을 맨눈으로 봐도 다행히 비위가 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직업적으로 그런 것에 면역이 잘 되어서 그런 건지 (참고로 저는 중증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9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더럽다는 생각이 들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빠를 일반 병실로 옮기고 엄마와 교대할 때 엄마조차도 도대체 그 많고, 자주 하는 변을 어떻게 치웠냐고 의아해했지만 대답은 굉장히 단순하고 간결했다.
“그냥.”
생각해 보면 횟수만 많았지(내가 있을 때는 대여섯 번 정도 하루 동안 갈았던 적도 있었다.) 어차피 사람이라면 변은 다 보는걸요?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자식도 없는 미혼의 딸이 스스럼없이 기저귀를 간다는 게 꽤나 놀랍고 안쓰러웠던 것 같다.
기저귀의 늪에서 익숙해질 즘 또 다른 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기관 석션! 날 진짜 쪽잠의 세계로 인도한 그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