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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men Jul 20. 2016

실패한 남미 여행기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학교 때 나는 꽤나 성실한 편이었다. 학점 관리도 신경 썼고 (막판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함정), 취업에 도움이 되는 대외 활동도 열심히 했던 편이고, 무엇보다 졸업 후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 저학년 때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광고, 마케팅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경영학을 전공했고, 4학년 2학기 구직 시즌에는 소비재 회사의 마케팅 포지션과 광고 대행사를 1순위로, 다들 넣는 대기업과 금융권을 2순위로 지원했다. 그리고 운 좋게 국내의 광고 대행사에 광고 기획 (AE, Account Executive) 포지션으로 입사했다. 내가 특히 운이 좋았던 이유는 다른 입사 동기들과 달리 광고 공모전 입상이나 광고 대행사 인턴십 같은 광고 관련 스펙이 제로였기 때문이다. 신문방송학이나 광고를 전공한 동기들도 더러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 비해 지식과 경험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운이 좋았던 편이다. 당시에 나는 광고는 잘 몰랐지만 '브랜딩'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내가 첫 회사에 입사한 2000년대 후반에는 기업들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큰 비중을 TV광고가 차지했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TV광고 기획 일은 꽤나 흥미로워 보였다. 


그렇게 광고와, 광고업과, 회사 업무라는 것과, 회사 동료들의 세계에 푹 빠져 2년 정도 보냈을 즈음에 스멀스멀 회의감이 찾아왔다. 광고 대행사는 야근 (내 첫 회사는 밤 11시 이후 퇴근을 공식적인 야근으로 인정), 주말 출근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그만큼 심리적, 정신적, 경제적 만족이 주어지기 때문에 업무 강도가 상쇄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나에게 별로 만족감이 없는 거였다. 내가 참여한 TV광고를 식당이나 집에서 우연히 보게 되어도 큰 감흥이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소재 테이프가 정상적으로 방송국에 전달되어 잘 나가고 있군' 정도였다. 보람은 적은데 잠은 못 자고, 개인 생활이 없으니 불행했다. 더 큰 불행은 여기가 아니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 안에 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휴가를 가고, 쇼핑을 하고, 알찬 주말을 보내면서 단기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지만 나의 불행과 고민은 그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이었다. 

 



28살의 내가 생각해낸 진로를 탐색하는 방법은 '생각할 시간을 갖기'였다. 생각할 장소는 내가 평생 가고 싶어 했던 중남미였고, 생각과 곁들여진 액티비티는 홀로 낯선 곳을 다니는 여행이었다. 아무의 영향도 받지 않고 시선이나 체면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나의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공간에서. 


결국 3년 만에 첫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2011년 3월에 중남미로 향했다. 9개월간 미국-캐나다-멕시코-쿠바-과테말라-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를 돌았다. 주로 혼자였지만 여행 전부터 알고 지낸 남미 친구들이 있어 그들의 집에 방문하기도 했고, 별로 외향적이지 않은 성격에도 여행자 친구들을 사귀어 같이 다니기도 했다. 


여행은 두말할 것 없이 즐거웠다. 중남미는 나에게 이전까지 내가 모르던 새로운 차원의 자연과 문화를 보여주었다. 마추픽추나 우유니 사막은 어느 정도 명성을 듣고 갔지만 역시나 멋있었고, 아르헨티나의 어마어마한 빙하와 마야, 아즈텍, 잉카 유적들, 파타고니아의 끝없는 산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 걸까'하는 알 수 없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아마존 팜파스에서 만난, 비버는 아닌데 비버 닮은 동물
멕시코시티 근교의 거대 마야 유적지, 테오티우아칸
아르헨티나 페리토 모레노 국립공원의 빙하




여행은 즐거웠지만...


여행은 즐거웠지만, 진로 탐색이라는 목표를 놓고 보자면 결론적으로 중남미 여행은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환경에 나 자신을 적응시키는 여행 자체에 몰입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여행에 지쳐 한 도시에 오래 머물거나, 30시간 정도 버스를 타면 나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해 기회가 될 때마다 생각해봤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하자면 9개월의 여행에서는 낯설고 계속 변화하던 순간의 즐거움이 진로 고민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다고 중남미 여행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역시 그건 아니다. 중남미 여행은 나의 유일한 버킷리스트였고, 인생에서 내가 그만큼 갈망해온 것은 아직까지도 없었으니 이 여행 덕분에 죽을 때 덜 여한이 남을 것 같다. 그리고 2000만 원이 넘는 큰돈과 9개월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시원하게 쓸 수 있는 때가 또 올까 싶기도 하니 이왕 할 거였으면 그때 하길 잘한 것 같다. 


하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이 중남미 여행을 통해 방향이 바뀌거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진로는 여행을 다녀온 뒤 지금까지 4.5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갈피를 잡았다. 중남미에서 찾지 못했던 파랑새를 회사에서 찾은 겪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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