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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Mar 21. 2021

프랑스혁명 : 자유와 위기

혁명으로 자유를 얻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하다.

프랑스 혁명은 모순과 혼란 그 자체였다. 권력이 부족한 왕, 자유를 위해 독재를 선택한 정치인들,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단두대 처형식 등 말도 안 되는 일들 투성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혁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용납할 수 없었던 모든 유럽 국가는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혁명을 통해 자유를 쟁취한 프랑스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패망할 운명이었다.

왜 프랑스 사람들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프랑스 혁명을 시작했을까? 민중이 참고 살기에 당시 프랑스에는 너무나도 모순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 모순 덩어리 프랑스     

시민 혁명 이전의 프랑스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적 모순이 있었다. 가혹한 세금 수탈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둘째, 통치체제의 모순이 있었다. 무능한 왕의 권력을 나눠가진 귀족들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았다. 셋째, 사회적 모순이 있었다. 나라의 상황을 알게 된 국민들은 책임감 없는 기득권에게 착취당하는 사회를 끝내고 싶어 했다.

프랑스의 경제적 모순은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의 정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자연 국경설"을 명분으로 주변 나라들을 침략했지만, 전쟁의 실패로 영토를 얻지 못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늘어나는 국방비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제도를 이용했다. 이는 세금징수원에게 미리 세금을 받고, 세금징수원에게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걷을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세금징수원들은 왕이 준 권리를 가지고 국민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평민들은 일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세금징수원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통치체제의 모순은 루이 14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위 금수저인 귀족 계급과 자수성가한 부르주아 세력이 갈등하는 과정에서, 루이 14세는 부르주아 세력의 편을 들어주면서 강력한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강력한 왕권은 사라졌고, 귀족 계급의 권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루이 14세가 살아있을 때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후 귀족들은 궁전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왕에게 문제 해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프랑스가 가진 "빚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빚 때문에 당시 국가 재정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격인 새로운 재정 총감 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은 국가의 빚을 탕감하기 위해 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귀족과 특권 신분 세력은 고등법원이라는 기관을 조종하여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판결을 얻어낸다. 막대한 나라 빚은 결국 부유한 귀족 대신 평민들이 떠맡게 되었다.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나랏일을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할 의지가 부족했다. 권력에 따르는 필연적인 책임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사회적 모순은 루이 14세의 문화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문화를 사랑한 왕이었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 또한 직접 발레 공연에 참여해 "태양신 아폴로"의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루이 14세의 문화사랑은 모든 유럽에 퍼져, 귀족들은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살롱(Salon)문화였다. 명망 있는 귀족 부인은 자기 집을 예술가, 문학가, 학자들에게 내주어 자유로운 토론을 즐겼다. 평민들은 살롱 문화를 즐길 수 없었지만, 거리에 생겨나기 시작한 카페에서 다양한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다. 살롱과 카페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고, 계몽주의 활동가들은 다양한 책을 출판해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프랑스 민중들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민중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 국민들의 수준은 점차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은 많은 세금에 고통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야했고, 국가의 수많은 빚을 해결할 힘이 있는 귀족들은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외면했다. 프랑스 민중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분노하고, 이를 "앙시앙 레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앙시앙 레짐" 속에서 평민들은 프랑스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무능한 왕 루이 16(Louis XVI)와 귀족의 대립

루이 16세는 모순으로 가득찬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루이 16세는 1774년 즉위 당시 아버지 루이 15세로부터 15억 리브르의 빚을 물려받았다. 프랑스의 왕은 정치적 결단으로 나라의 빚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지만, 루이 16세는 무능한 왕이었다..

루이 16세의 무능함은 재무총감 칼론의 "평등 과세" 개혁안이 실패한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의 추천으로 재무총감이 된 칼론은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걷는 "평등 과세" 제도로 프랑스의 빚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자 귀족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모략을 꾸몄다. 고등법원을 통해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칼론 개인을 인신공격하며 모함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 16세가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만한 능력도, 정치 권력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귀족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칼론을 해임한다. 한편, 귀족들은 이러한 결과에도 도리어 루이 16세에게 분노했다.

귀족들은 고등법원을 이용해 왕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루이 16세의 사촌 오를레앙(Orléans)은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금을 등록하라는 왕명을 불법이라고 항의했다. 루이 16세는 왕명을 어긴 오를레앙을 처벌했지만, 고등법원은 왕의 행동이 불법이라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법원을 통해 왕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는 귀족과의 정치적 싸움에 밀려 고등법원의 손을 들어준다. 왕과 귀족들의 대립은 귀족의 승리로 끝났다. 왕이 무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기세를 잡은 귀족들은 프랑스의 정치상황을 자신들의 계획에 맞게 재편했다. 삼부회라는 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귀족의 계획: 삼부회

귀족들은 삼부회를 통해 자신들 뜻대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려 했으나, 상황은 귀족들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삼부회는 제1 신분인 사제들, 제2 신분인 귀족들, 제3 신분인 평민들로 이루어졌다. 귀족들은 삼부회에서 결정된 안건을 왕과 평민들이 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삼부회 과정은 제3 신분인 평민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평민들은 삼부회 의사결정과정에서 차별들을 경험한다. 첫째, 그들은 경제적 차별을 느끼게 되었다. 제3 신분 대표들은 삼부회가 열리는 베르사유 궁에 입궐하며 왕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놀란다. 평민들의 혈세로 왕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신분적 차별을 느끼게 되었다. 왕은 특권계급인 제1 신분과 제2 신분들을 응접실에서 한 명 한 명 친절히 맞았다. 그러나 제3 신분 대표들은 대충 줄을 세우고 한꺼번에 접견했다. 셋째, 그들은 제도적 차별을 느끼게 되었다. 제3 신분 대표들은 머릿 수 표결 방식으로 안건이 채택되기를 원했지만, 특권 계급은 머릿 수 표결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로써 삼부회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민 대표들은 그저 특권 계급이 결정한 사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허울뿐인 삼부회의 결정안은 제3 신분 대표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귀족의 편이었던 새로운 재무총감 네케르(Jacques Necker)는 프랑스의 빚은 별 문제가 안되며, 약간의 개혁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평민들은 프랑스의 가혹한 세금 착취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실망감을 느꼈다. 이들은 삼부회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며 왕과 귀족들, 즉 프랑스의 지도부의 무능함과 사익에 대한 잘못된 욕망을 인식하게 된다.


시민혁명앙시앙 레짐의 타파     

시민혁명의 시작 : 국민의회

결국, 평민들을 주축으로 본격적인 시민혁명이 시작되었다. 제3 신분의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회의장을 테니스 코트 건물로 옮기고,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국민의회는 이후 제헌 국민의회로 발전한다.

새롭게 탄생한 제헌 국민의회는 위기에 빠진다.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파리의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해 시민 혁명의 불길은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제헌 국민의회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여, "앙시앙 레짐"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국왕은 여전히 제헌 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혼란과 전년 흉작의 영향으로 파리의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파리의 수많은 여성들이 무기를 들고 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해 루이 16세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압박을 이지기 못한 왕은 프랑스 인권 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이끌려 파리 튈르리 궁전에 갇히게 된다.


시민혁명의 발전 : 입법의회

시간이 지나 새로운 헌법(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군주제 하에서 평민도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면 선거권을 인정했다. 1791년 10월이 되어 프랑스에서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고 새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시민 혁명이 진행되자 귀족과 사제 등 특권 계급의 대부분이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루이 16세는 과격한 혁명이 두려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바렌 도주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는 국경 앞의 바렌이란 도시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고,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발표한다. 프랑스 혁명 정부에게 루이 16세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루이 16세가 도주하다 붙잡히는 바람에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왕당파는 더 이상 왕을 두둔하기 어렵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시작     

프랑스혁명 전쟁과 잇따른 패배

프랑스와 주변국 간의 갈등이 점점 불거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사상이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층은 자국 내의 혁명 지지파를 탄압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필니츠 선언>, 왕당파와 망명 귀족의 선동 활동 등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 동맹을 체결한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시민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단행하기로 하고, 결국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혁명으로 인해 군대는 지휘통제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거의 다 귀족 출신이었다. 혁명이 일어난 후 귀족 계급인 대다수의 장교들은 죄다 숙청당하거나 도망간다. 결국 혁명군을 제대로 지휘할 사람이 없게 되었고, 혁명군은 오합지졸의 군대가 되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이 집단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어떤 부대에서는 병사들이 상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을 피해 도망친 귀족들은 반역의 무리를 처벌하겠다는 명분으로 프로이센 군대와 함께 돌아왔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프로이센의 침략으로 패망할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 의용병 탄생과 발미 전투

프로이센 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혁명 정부는 국가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했고,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된 의용병들이 파리로 집결했다. 파리 시민과 의용병은 프랑스군이 패배한 원인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내부의 적인 국왕 일가를 모두 탕플 탑에 유폐시켰다. 혁명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프랑스 혁명군은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반격에 성공해 적군을 국경 밖까지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의용병에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의 정치적 발언권이 빠르게 커진다.


프랑스 공화국 설립과 루이 16세의 처형

발미 전투가 승리한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제도화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탄생한다. 프랑스 공화국이 설립된 것이다.

공화국 정부는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전쟁 당시 국왕이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제출되어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이후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손이 뒤로 묶인 채 퇴비 수레에 실려 시내를 돌고 난 뒤 처형되었다.



프랑스혁명 과정과 실패의 공식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실패의 공식이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첫째, 무능한 지도부는 민중과 대립했다. 앙시앙 레짐에 고통받던 프랑스 민중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정부를 만든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루이 16세를 유폐시킨다. 

둘째, 민중의 불만을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한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동의하지 않았던 루이 16세는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 

셋째, 프랑스 혁명은 오합지졸의 혁명군을 낳았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에게 번번이 패배했다.

그러나 국가를 구하겠다는 전국적인 의용병들의 의지로 프랑스 혁명 정부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심히 싸웠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잠시 뒤로 물러나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침략자가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루이 16세 처형의 의미

프랑스 시민들이 루이 16세를 처형한 것은 당시 유럽 왕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의 왕들은 이제 자신의 나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시민혁명이 온 유럽에 퍼질 것이고, 유럽의 왕들은 루이 16세처럼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할 운명에 처할 것임을 두려워했다.

그 결과 유럽 국가의 왕들은 프랑스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새로운 프랑스는 모든 유럽의 국가들과 싸워 이겨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재정은 파탄났고, 엘리트인 귀족 장군들의 힘은 약화되었으며, 프랑스 의용군의 훈련상태는 형편없었다. 

다만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모인 의용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의지만 충만한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스페인 등의 강국들과 싸워야 했다.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였다. 프랑스가 결국 전 유럽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들은 이제 답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오합지졸의 군대를 승리로 이끈 체계를 만들어낸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노력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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