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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Mar 15. 2021

우금치 전투 : 나라가 망했던 이야기

외세의 강력한 과학 무기가 민중의 저항의지를 짓밟다.

구한말 이야기

우금치 전투 이야기

"동지들 우리가 왜 농사를 뿌리치고 나섰는지 기억하는가? 그렇다 모든 사람이 곧 하늘처럼 되어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였다. 우리의 거사는 성공했고, 탐관오리를 벌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우리의 거사를 빌미로 침략하려 했다. 일본이 침략하는 것은 우리가 원한 일이 아니었기에, 조정과 타협했었다. 일본은 더 이상 우리나라로 들어올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 놈들은 왕을 볼모로 잡았다... 고종의 이름을 빌려 나라를 하나둘씩 망가뜨리고 있는 중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더 이상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일본 놈들을 내쫓아야 나라가 산다.

동지들 그동안 열심히 싸워주어 고맙다. 적들은 신식무기를 가졌지만 우리는 열심히 싸워 이길 수 있었다. 삼례에서 일본 놈들을 무찔렀던 것처럼, 이제 내일 우리는 우금치만 지나면 된다. 우금치만 지나면 한양으로 가서 일본 놈들을 내쫓고, 왕을 도울 수 있다. 내일 우금치에서 승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자!"

                                                                                              - 전봉준의 연설문을 상상하여 재현 -


우금치 전투 직전 동학농민군에게 전한 전봉준의 연설문을 상상해보았다. 동학농민군은 농민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벌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일본과 청나라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조선의 조정과 농민운동을 중단하기로 협상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1894년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왕궁을 점령한다. 동학농민군이 조정과 한 협상은 무효가 되었다. 일본이 왕궁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은 두 번째 봉기를 일으켜 일본을 한양에서 내쫓기 위해 우금치로 진격했다.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한다면, 공주-수원-서울로 가는 길이 열리는 상황이었다. 우금치에서 승리한다면 동학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이길 수 있을 만한 요인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동학농민군은 수적 우위를 가졌다. 우금치 전투 당시 동학농민군은 2만 명으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5배가량 많았다. 둘째, 동학농민군은 사기가 높았다. 경복궁 쿠데타로 궁궐을 점령한 일본의 만행에 저항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으므로 그 누구보다 일본군을 꺾을 의지가 충분했다. 셋째, 전투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우금치 전투 이전, 동학농민군은 신식무기를 가진 관군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다만, 관군이 가진 신식무기를 획득했으나 사용법을 몰라 전투에 이용할 수는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수적 우위로 일본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동학농민군은 2만 명 중 3천 명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전투에 참여한 10명 중 8명이 죽은 것이다.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없었다.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을까?


신식무기와 동학농민군 학살

일본군은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신식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대한제국 관군과 함께 세계 최초의 기관총인 개틀링 포(Gatling gun)를 사용해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 FPS게임을 해봤다면 기관총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알 것이다. 연속으로 발사되는 총알은 기관총의 사정거리에 오는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개틀링 기관총은 1분당 400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1분당 400명을 죽이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일본군은 개틀링 기관총을 높은 언덕에 설치해 동학농민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동학농민군도 총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가진 총은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100m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최대 사정거리가 2000m인 스나이더 소총(Snider-Enfield)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접근해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전에, 일본군과 대한제국 관군은 몰려오는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은 기관총과 같은 신식무기를 잘 알지 못했다. 대한제국 관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개틀링 기관총을 획득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신식무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부분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동학농민군은 다급했고, 대한제국군과 싸웠던 것처럼 의지를 불태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많은 사람이 죽는 와중에도 공격을 감행했다. 무기의 차이는 엄청난 피해를 만들었다. 동학농민군 20,000명 중 17,000명이 우금치에서 전사한다. 반면, 일본군은 한 명도 전사한 사람이 없었다. 강한 의지만으로는 적을 이길 수 없었다. 임진왜란에서는 과학 무기로 일본을 물리쳤지만, 구한말에는 과학 무기에 의해 학살당하게 되는 끔찍한 결과가 일어났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는 과정

고종이 집권할 시기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신식 군대와의 차별을 견디지 못한 구식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고종은 임오군란을 막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들어오게 했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진압과정에서 일본이 불만을 제기한다. 일본 공사가 피해를 봤으니 조선이 배상해야 한다는 억지였다. 조선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군도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다. 외세의 군대가 전쟁을 치르지 않고 한반도에 손쉽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무능한 지도부의 수탈을 견디지 못해 일어난다. 동학농민군은 민중 수탈의 주범인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한양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외세가 한반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도부와 진격을 멈추기로 협상한다. 외세는 결국 한반도에 들어오고, 동학농민군은 이를 참지 못해 다시 봉기한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연합한다. 이들은 신식무기로 동학농민군을 학살한다. 이로써 외세가 마음껏 들어오는 것을 막는 민중의 저항은 사라지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인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가 대한제국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대한제국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볼 수 없던 러시아는 일본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두 나라는 러-일전쟁에서 맞붙게 되지만, 러시아는 패배한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직접적으로 반대할 나라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한제국을 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를 간접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국가들이 남아 있었다.

역외 세력인 영국과 미국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수는 없지만,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강행할 경우 경제적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다른 곳을 공격하여 일본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의 지지를 받는다. 영국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기에 일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서로 윈윈(win-win)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서로의 영향권을 인정받는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국제적으로 견제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군을 감축하여 국방 기능을 해체했고,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기능을 해체했다.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보게 된 민중은 을사의병으로 저항했지만, 일본은 군대를 통해 의병을 학살하고 해산하는 작전을 감행했다. 일본은 곧 대한제국군을 해산하고,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기능과 행정기능을 해체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통해 이미 죽어버린 대한제국이 멸망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다. 이를 우리는 경술국치라 부른다.


조상님들의 한반도 방어전략은 어디에?

구한말에는 조상들의 한반도 방어전략이 통하지 못했다. 오히려 패배의 공식이 작동했다.

    첫째, 무능한 지도부는 민중과 대립하게 된다.

    둘째, 민중의 불만을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한다. 결국 외세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 한반도에 들어온다.

    셋째, 무능한 지도부는 외세의 간섭을 막기 위해, 여러 나라를 끌어들이지만 결국 실패한다.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쟁탈전이 벌어진다.

    넷째, 더욱 강해진 외세(일본) 자신을 견제할 역외세력(영국, 미국)들과 결탁한다.  이상 외세의 폭주를 막을 힘은 사라진다.

    다섯째,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 외세(일본)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힘을 얻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부터, 임진왜란까지  이어져 온 조상들의 승리 공식은 깨졌다. 대대적인 침략은 없었고, 결과는 우리나라의 멸망이었다. 임진왜란에서 패한 일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무시무시한 일본으로 변화한 것이다.

일본의 승리를 만든 이 공식의 이름을 "한반도 균형 무너뜨리기 전략"이라 부르기로 하자. 우선 "한반도 균형 무너뜨리기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얘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금 독자들은 구한말 지도부의 무능함을 탓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승리한 임진왜란에서도 패망한 구한말에도 지도부는 무능했다. 조선 지도부는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고, 선조는 도망쳤다. 구한말에는 무능한 지도부가 민중과 싸웠다. 지도부가 망하지 않기 위해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전개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차이는 바로 어느 쪽이 발달한 무기를 사용했는가에 있다.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이 과학 무기를 썼기 때문에, 적은 숫자로도 많은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반면, 구한말에서는 일본군이 과학 무기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무능한 지도부를 대신하여 외국세력을 몰아내려던 동학농민군은 너무나 허무하게 학살당했다. 일본군은 청나라나 러시아를 상대하는 힘의 절반도 들이지 않고, 민중의 저항을 진압할 수 있었다. 과학 무기의 차이는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우리와 일본은 어쩌다가 과학 기술 차이가 나게 되었을까?


일본과 과학기술 차이는 왜 났을까?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일본의 계몽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국과 유럽의 문명을 체험하며 수학의 중요성에 눈을 뜬다. 서양 사고의 중심에는 수학과 개인주의가 있다는 것에 기반하여 "양학"을 가르치는 게이오 대학을 설립한다. 이후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일본 사회에 전파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책에 감명을 받은 야마카와 겐지로는 자연과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야마카와 겐지로(1854~1931)는 1888년 예일대 박사를 받고 일본 최초의 물리학자가 되어 일본에서 후학을 양성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을 진행하며 수학과 과학을 이해하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국가로 변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미국이 개발한 개틀링 기관총의 작동법과 사용 원리를 알았고, 새로운 무기를 사용하는 군대를 훈련시켰다. 우금치 전투에 참전했던 일본군은 소수지만 무서운 군대가 될 수 있었다.


고종의 실패

일본은 발달한 과학 기술력을 토대로 한반도 균형 무너뜨리기 전략을 착실히 실행해 나갔다.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강대국들(청나라, 러시아, 영국, 미국)을 끌어들여 세력균형을 만들고자 했다. 세력균형이란 여러 강대국들의 힘이 비슷하여 어느 누구도 쉽게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또는 어떠한 강대국도 강해지는 것을 막는 정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종은 청과 러시아가 군대를 사용해 일본을 막아주기를 원했지만,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길만한 실력을 갖춘 상태였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읽는 역량이 부족했던 고종은 허무하게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고 일본에 저항할 힘을 기르지 못한 채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는 결과를 만들었다. 우리 민중의 저항의지와 함께 발전된 과학 기술력을 갖추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결국 일본과 대한제국의 과학 기술력의 차이가 대한제국을 패망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과학기술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다시 망하지 않을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학기술력 향상을 꾀하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돌아가 이것이 오늘날 학생들의 막대한 공부량의 원인을 설명할 하나의 요인이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수학과 과학은 국가의 역량을 키우는 데에 기여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한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프랑스는 수학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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