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

평범한 남자 EP 49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퇴근 후 나의 유일한 취미는 소파에 누워 대형 TV로 DVD를 감상하는 것이다.


양주 시내의 전자상가에서 사 온 중국산 짝퉁 DVD CD는 괜찮은 화질에 여러 가지 외국어 자막까지 있어 언어 학습용으로도 유용하다. 주로 중국어 자막이나 영어 자막을 틀어놓고 본다. 나름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집안에 그 동안 본 DVD들이 쌓여가고 있다. 집이 영화관이 되어간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일찍 퇴근해 집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3+2夹心饼干(샌드 비스킷)과 王老吉(중국대 표차 음료-대추 맛 비슷한 중독성 있는 맛)을 먹으면서…


"띵동 띵동"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시간이 저녁 9시를 넘어가고 있다. 현관의 눈구멍을 통해 본 바깥에 장주임이 서 있다. 이 늦은 시간에 그녀와 왜 왔을까? 머릿속으로 수 만 가지 생각들이 밀어닥친다. 초인종이 또다시 울린다. 그녀는 아마도 집안에서 울려 퍼지는 SF 영화 속 웅장한 사운드를 들었을 것이다. 문을 열었다. 그녀의 평소와는 다른 상기된 얼굴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다.


"张主任你怎么在这儿?"(장주임~ 이 시간에 말도 없이 웬일이야?)

"我有话跟您说"(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到底有什么话?这能在公司说嘛?"(무슨 말이길래? 회사에서 해도 되는데...)

"我可不可以进去说?"(잠시 들어가서 얘기드려도 될까요?)

"呵...可以“(어? 그... 그래)


그녀는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그리곤 말도 없이 리모컨을 들어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는 웅장한 TV의 볼륨을 줄인다. 뭔가 단단히 작심한 표정이다.


"你喝点儿什么吗?"(뭐 좀 마실래?)

"一杯绿茶,可以吗?"(녹차 한잔 주시겠어요?)

"可以,你稍等一下"(응 그래 잠시만)


나는 주방으로 가서 찻물을 끓인다. 짧은 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다. 한국 사람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싫어한다. 그 말은 웬만한 건 다 예상한다는 말이며, 시험에도 다양한 기출문제 유형이 존재하며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 범주를 벗어나면 모든 사람들의 경악하며 평균 레벨이 떨어진다.


그만큼 나 또한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그리 좋진 않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은 답도 빨리 나와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푸는 능력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수 능력이다. 한 가지를 차근히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일단 몇 가지 예상 답안을 준비하고 찻잔을 들고 그녀의 곁으로 간다. 그녀 옆 소파에 앉아 찻잔을 건넨다.


"那你想说的是什么?"(그래 할 말이란 게 뭐지?)

"您爱她吗?"(그녀를 정말 사랑하세요?)

“可以这么说吧”(그렇다고 볼 수 있지)

“那你为什么爱她?”(왜 그녀를 사랑하시는 데요?)

“…”


다행히 첫 번째 질문은 예상 질문 중에 하나였기에 어떻게 지나갔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안은 준비되지 않았다. 객관식과 단답형에 익숙한 한국인은 서술형 주관식 문제에는 취약하다.


“我也不知道”(나도 잘 모르겠어)

“不知道?”(모른다구요?)


사실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게 뭔지 아직 확실히 정의 내리기엔 나 또한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형체가 없는 것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뜻처럼 나 또한 그녀를 하찮고 업신여기진 않는다고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 또한 나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지도 알 수 없다.


평등이라는 가치가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쯤은 이미 세상을 살아오면서 깨달았다. 남녀 간의 사랑도 평등할 수 없다. 과거 오랜 시간 편향적인 짝사랑을 경험해본 나로선 평등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자유를 더 만끽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마리 토끼를 끊임없이 쫓아가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다. 사랑도 그 민주주의란 놈과 흡사(恰似)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복잡 미묘한 대답을 할 수는 없다. 이 상황에 이런 얘기를 이해하며 받아들일 여자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진리에 가까운 확고함을 가지고 있다.


진지하고 심각한 상황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얘기를 한다는 건 그녀를 더욱 상처 받게 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 옆에 앉은 그녀에게 사랑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目前是"(지금은 그런 거 같아)

"那你会改变?"(그럼 바뀔 수도 있는 건가요?)


그녀의 질문은 대검 중수부의 부장검사 수준이다. 이럴 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에서 묵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든 번뇌는 말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

"您怎么不说话呀?"(왜 대답을 안 하세요?)

“…”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녀는 대답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는 나를 몸을 돌려 나의 허리를 덮치듯이 와락 껴안는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돌발행동에 잡고 있던 찻잔의 커피가 넘쳐 손등으로 쏟아졌다.


"앗 뜨거!"

"啊 您没事吗?"(앗~ 괜찮으세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 흐르는 물에 손등을 씻는다. 다행히 열기가 피부 깊이 침투하진 않은 것 같다. 그녀는 화장실 밖에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린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그녀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我没想到我会爱上男人"(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어요!)

"咦~ 这什么意思?"(아~ 무슨 말이야?)


그녀는 맨 발로 화장실로 들어와 나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나의 등을 적신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와 이렇게 몸이 맞닿아 있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고 한다.


그녀가 중학교(高中) 입학하면서 여인의 모습으로 변화가 생기면서 그녀의 아버지의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어릴 시절 그는 대형 화물차량을 몰고 드넓은 중국 대륙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가 집에 돌아오는 날은 그녀와 어머니에게 공포의 시간이었다. 항상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그는 어머니를 폭력으로 감금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와서 자신의 몸을 유린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그녀와 도망쳐서 여태껏 살아왔다고 한다. 아버지라는 첫 남성에게 당한 일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후로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몸만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들이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장주임이 상해의 한 물류회사의 인사팀에서 일을 할 때였다. 유부남이었던 팀장이 승진과 업무상의 편의를 봐준다며 자신을 계속 성희롱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그녀의 거절과 단호한 태도에 그는 결국 그녀를 강제로 성폭행하려다가 다행히 그 장면을 목격한 차오찡의 도움으로 상황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때 차오찡이 휘두른 몽둥이에 얼굴을 얻어맞는 그는 앞니가 날아가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녀와 차오찡은 퇴직금까지 모두 그의 치료비와 합의금으로 날리고 회사를 나왔다고 한다.


그 날 이후 그 어떤 남자도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차오찡과의 만남은 동거로 이어졌고 그녀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그녀는 동성의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이후 차오찡과 계속 같이 생활해 왔다.


그리고 나타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남자였다고 한다. 음흉한 눈빛으로만 바라보던 남자들과는 달리 어설픈 어른스러움과 속일 수 없는 순진한 눈빛이 그녀가 만든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있었다. 때론 친구처럼 장난스럽게 때론 보호자 같은 세심한 모습에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과는 다르게 다가오려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절제하고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모습에 호기심과 숨어있던 모성애를 자극했다. 생전 처음으로 그녀가 스스로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자신의 몸만 탐하는 그런 류의 남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태껏 사무실에서 항상 몰래 나를 지켜보며 나를 향한 감정을 키워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성(異性)를 유혹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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