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48 (개정판)
야유회 이후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여직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임자 있는 수컷은 임자 없는 암컷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끊어야 할 인연들 아니던가? 회사만 정리되면 떠나야 할 사람과의 깊은 인연은 아픔만 커질 뿐이다.
직장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유지가 필수이다. 직장동료가 인생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린 지 오래다. 결국 이해관계의 조직 속에 놓여있는 한 어제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여자라면 더욱 위험하다. 직장 뿐 아니라 남자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部长~您今晚有空儿吗?](부장님~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장주임이 사내 메신저로 물어온다. 느낌이 심상치 않다. 그녀는 분명 나에게 직상 상사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날 나의 집에서 그녀가 보인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춘옌의 말처럼 여자에게 준 상처는 그녀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알 수 없다. 경계를 넘으려는 감정의 끈을 차단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나중에 후회가 없다.
[恩.. 不好意思今晚我有约] (어~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미안!)
[啊~ 跟谁? 是否跟那个女人?](누구랑요? 혹시 그때 그 여자랑 인가요?)
그녀의 질문이 계속 이어질 모양이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간다.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답이 없이 자리를 떠나는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서운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 그녀의 눈물짓던 모습이 같이 피어오른다. 한 손으로 연기를 휘저어 날려버린다. 하지만 다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엔 어김없이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다시 그녀가 나타난다. 여자의 눈물은 강력하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강한 완력을 주었지만 여자에겐 눈물이라는 무기를 주신 것 같다. 강한 남자는 여자의 눈물 앞에서 무너진다.
아직도 그날 그녀의 눈물을 기억한다.
중국으로 파견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오떡이와의 마지막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평소답지 않게 화사하게 꾸민 그녀가 좁은 산비탈 골목길을 평소 신지 않던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온다. 나보다 큰 키 때문인지 평소 나를 만날 때는 창이 거의 없는 캔버스화를 신고 나왔던 그녀였다. 그리곤 자기는 구두는 체질이 아니라며 둘러대던 그녀였다.
"오~ 빨리 왔네! "
"어~ 차가 안 막혀서"
"근데 우리 어디가?"
"글쎄..."
"이제 우리 산 말고 바다 가자!"
그녀의 말이 왠지 알 수 없는 나의 마음 한 구석을 찌르는 느낌이다. 돌이켜보니 그녀를 데리고 산만 다닌 기억 뿐이다. 나는 말없이 조용히 산복도로의 비탈길을 저속 기어의 엔진 브레이크를 걸어 천천히 내려간다. 그리고 시원하게 뚫린 동해안의 부울(부산-울산) 고속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차 안에는 알 수 없는 적막이 흐른다. 서로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을까?
그 답답한 적막함이 나를 조여 오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창문을 열었다. 120km로 달리는 차 안으로 소금기 머금은 바다의 찬바람이 들이치고, 차 안의 볼륨을 올린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바람과 음악이 섞인 소리 속에서 침묵하며 1시간가량을 달렸다. 시원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우체통 주변으로 많은 인파가 몰려 그곳의 추억을 담느라 분주하다.
"우리도 같이 사진 찍을까?"
"아냐 됐어~ 내가 너 찍어줄게"
난 커다란 우체통 한편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팔짱을 끼고 홀로 서있다. 다른 한편에는 네다섯 살쯤 보이는 꼬마 남자아이가 무슨 서운한 일이 있었는지 우는 표정으로 엄마가 ‘브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울먹거리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서있다.
오떡이는 그 순간 셔터를 눌렀다. 그녀가 찍은 사진 안에는 나와 그 아이가 있다. 그녀는 찍힌 사진을 보며 꼭 싸움 난 부자지간 같아 보인다며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언젠간 너도 나도 부모가 되겠지?”
“그렇겠지 아마”
“그 땐 아마 아이만 눈에 들어올꺼야”
“…”
“남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은 식어가고 그 사랑은 자녀에게로 옮겨 가는게 아닐까? 서로를 바라보며 주고 받던 사랑은 흔들리고 위태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주기만 하는 사랑은 흔들리지 않아 참 이상하지”
“음… 그게 자식을 낳아서 길러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네”
주기만 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자녀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주고 받는 사랑은 더 주고 덜 받고를 따지게 되지만 주기만 하는 사랑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 또한 그녀에게 받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는 서로에게 고마움보다는 부족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자녀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바닷길을 걷는다. 그녀는 평소 신지 않던 구두 때문인지 걸음걸이가 어색하다. 구두 때문에 나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그녀를 올려다보며 앞에 벤치에 앉자고 얘기한다. 여자를 올려다 보는 느낌이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느낀다.
그녀는 다리가 아팠는지 벤치에 앉아 발목과 종아리를 만진다. 난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목과 종아리를 주물러준다. 옛날 내가 산에서 다리를 접질렸을 때 그녀가 나의 발목을 만져주었던 것처럼…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은 차가운 바닷바람에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괜찮다며 그만 하라며 나를 밀어낸다.
둘은 벤치에 앉아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항상 높은 곳에서 바라보던 바다를 이제 낮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다. 업(up)되어 있던 산 위의 감정들은 이제 다운(down)되어 수평선까지 내려왔다.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올라갔다 정상을 찍고 이곳까지 온 것일까?
"나 담주에 떠나~"
"응, 그래"
"잘 지내…"
"너두"
"다른 사람 만나도 돼~"
"…"
내 어깨에 기대 얹은 그녀의 머리에선 익숙한 향이 바다의 짠내와 섞여 콧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차가운 무언가가 어깨에서 느껴진다. 그녀의 온기를 머금었던 눈물방울이 차가운 바닷 바람에 식어 나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나 보지 마~"
한 동안 그렇게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그 동안의 그녀와의 기억들이 바다 위에 넘실대는 파도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든다.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