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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3. 2019

삶은 힘들고 의미 없고 심심하다

청년과 중년 그리고 노년

삶을 살아가면서 시기별로 생각과 가치관은 변해 가기 마련이다.


  며칠 전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의 설교가 잊히질 않는다. 그는 신앙생활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청년부터 중년 그리고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고 한다. 각 세대별로 입버릇처럼 하는 공통된 말이 있다고 한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삼십 대 청년들은 너나없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얘기한다. 그들은 학업, 취업과 성공에 대한 갈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낸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과 어른들의 기대의 시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치열한 학업의 세계를 벗어날라 치면 또 취업이라는 관문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취업도 힘들지만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또다시 시작이다. 학교가 아닌 사회는 그들에게 다시 시련을 안겨준다. 독고다이로 달려온 길에 익숙해진 청년들은 사회와 조직이라는 틀 속에서 깎이고 닳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죽이는 연습을 한다.

힘든 청년

  청년 퇴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내가 글을 올리는 이 브런치라는 플랫폼에도 퇴사 관련 글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퇴사 관련 플랫폼을 따로 만들어도 될 정도다. 조직과 사회의 냉혹함과 잔인함에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 청년들의 애환이 담긴 글들은 서로에게 위로와 공감을 불러온다.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다시 인생의 큰 전환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


  어른들은 그런 그들을 '나약한 청년들'이라고 비난한다. 힘겨운 과거를 살아온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은 나약할 수 있다. 힘듦의 기준도 시대를 따라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전쟁통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던 세대와 독재 속에서 민주화와 국토건설의 앞장섰던 세대 그리고 저성장과 창조혁신을 부르짖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청년과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중장년과 노년도 그들의 청년 시기 때는 분명 힘들다고 외쳤을 것이 분명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이 불티나게 팔렸던 건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청년은 누구나 힘들다.


"사는 게 의미 없다!"


  사오십대의 중년은 어떨까? 그들은 결혼과 자녀 양육으로 정신없는 하루를 살아간다. 조직과 사회에 타협하며 이제는 불합리와 부당함도 익숙하다. 나보단 가족이 우선이다. 더러우면 더러운 데로 섞여 살면 그만이다.


“沧浪之水清兮,可以濯吾缨。

沧浪之水浊兮,可以濯吾足。                               

"맑은 물엔 갓끈을 씻고

더러운 물엔 발을 씻으면 될 뿐"

                                             - 屈原 <渔父词> 굴원의 어부사 중에서 -

어부사

  과거 세상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굴원(중국 초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을 바라보며 한 어부가 하는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의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소중한 가족을 두고 어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랴? 차라리 나를 죽이고 세상 속에서 섞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중년의 삶은 자신보다는 가족의 삶과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중압감 속에 자신을 잃어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중년의 어른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사회와 조직 속에 묻혀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싫어서 그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나를 드려다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과거 굴원처럼 소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중년의 삶은 의미를 잃어간다.


"사는 게 심심하다."


  이제 노인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 60대가 아니 70대 이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은 노년의 시기가 길어졌다. 노년에 접어들면 찾는 이도 할 일도 없어진다. 체력이 약해져 활동량도 줄고 줄어든 체력만큼 자신감도 같이 줄어든다.


   얼마 전 여기 시드니에서 한 70대 할머니 집 내부 공사를 한 적이 있다. 전라도 나주가 고향이신 할머닌 음식 솜씨가 끝내주신다. 점심때마다 차려주시는 집밥은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잊게 해 줬다. 젊은 시절 남편 없이 이곳 낯선 타국에서 딸과 정착하기 위해 홀로 힘든 세월을 보내셨다고 하신다. 커튼을 만들어 생계를 꾸리고 돈도 모아 집도 사고 딸자식도 시집보내고 이제는 넓은 하우스에서 홀로 지내신다고 하신다. 평일엔 집안에서 케이블 TV로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시며 하루를 보내신다. 모르는 드라마가 없을 정도이다. 공사가 끝나고 난 후 어느 날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네 집에서 셰어(Share :방을 빌려쓰는 하숙 개념)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일 할 때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고 집 곳곳을 수리해드린 것이 마음에 드셨는지 자기네 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지만 전화기에서 느껴지는 할머니의 서운함에 못내 안타까웠다.


 또 한 번은 시드니의 한 요양원의 지붕 공사를 몇 주 동안 적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평일에는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어 산책하는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방 안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다.  어찌나 심심하셨는지 한 할머니는 지붕에서 일하는 나를 집 아래 벤치에 앉아 신기한 듯 멀뚱이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신다.

요양원

  노인들은 심심하다. 한낮의 공원이나 경로당에는 심심한 노인들로 넘쳐난다. 힘든 청년들과 바쁜 중장년은 그들을 상대해 줄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들끼리 혹은 홀로 심심함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렇게 심심함을 달래며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인 빈곤이 심각한 한국의 노년은 많이 달라 보인다. 생계를 위해 늙어서도 일해야 하는 노인들은 다시 청년세대로 돌아간 듯하다.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 같다. 심심함을 누려야 할 시기에 다시 힘듦과 고단함과 함께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노년은 심심해야 한다.


  인생은 힘들고 의미 없고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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