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19 (개정판)
"아~~ 궁금해서 미치겠는걸..."
"그러니까 말이야, 귀덕이도 이제 여자 친구 생기는 건가?
"언제 오려나? 잘되면 안 오고 어디 좋은 데 가는 거 아냐? 캬캬캬”
귀덕이를 제외한 4명의 꼬치 친구들이 모였다. 오늘은 귀덕의 공식 소개팅 날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날에 맞춰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녀석이 소개팅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말이다. 오늘은 횟감은 단연 녀석이다. 우리는 녀석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썰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동창인 우리 5명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면서 질리도록 붙어 다녔다. 동서인지 남북인지 모르겠지만 2명씩 떨어져 있고 우리 집이 가운데였다. 그래서 항상 우리 집에 모여선 놀았던 기억이 많다.
각각 캐릭터 색이 강해서 우린 모여있으면 항상 시끄럽다. 그 중 귀덕 녀석의 캐릭터는 나머지 4명과는 융합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차단막이 있다. 어려서부터 범생이었던 그는 커다란 잠자리 안경에 포동포동 오른 살들로 덮여있던 그는 미쉐린 타이어 캐릭터를 연상케 하곤 했다.
그런 푸근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성격은 고슴도치다. 까칠하다. 자기중심적이고, 냉정한 논리주의자이다. 5명의 멤버 중 4명이 오케이 해도 그는 따라오지 않는다.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도 그를 굽힐 수 없다. 목에 칼이 들어오면 굽히려나? 하여튼 노는 물이 다르다. 그래도 그 녀석이 유일하게 찾는 친구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꼬치 친구의 5명 중 3명이 모태 신앙으로 주일마다 교회를 갔었다. 덕분에 나도 어린 시절 그들을 따라간 교회에서 추억이 많다. 귀덕의 아버지는 영향력 있는 교회 장로님으로 늘 그를 엄격하게 교육했다. 낚싯대로 물고기가 아닌 녀석을 후려 잡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낚싯대 스매싱이 학창 시절 그를 바른길로 인도한 것 같다.
성경 속 진리보다 몽둥이의 고통이 사람을 사람 되게 만든다. 물론 더 빠르지만 영구적이진 않다.
그런 그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늦물이 들기 시작했다. 술과 여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속성으로 마스터한 것 같다. 금융업계의 지저분한 술 문화가 그의 늦물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나도 전략기획실의 업무 특성상 증권계나 금융계 사람들과 술자리를 할 경우가 간혹 있다. 그들은 마시면서 취하질 않는다. 일단 먼저 취하고 마신다. 상대방의 뭔가를 캐내고 싶은 건지 지독하게 먹여댄다. 그들과 술을 마시면 다음날은 컴퓨터 모니터가 두 개로 보인다. 그런 금융업계에 발 들인 지 3년이 넘어가는 녀석은 못 마시던 술도 곧잘 마신다.
"어~이! 나왔어~"
"헉! 야~ 벌써 온 거야?"
"그러게 뭐냐? 소개팅 갔다 온 거 맞아?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소개팅 간지 2시간도 안된 거 같은데…"
"너 혹시 보희 씨한테 무슨 실수라도 한 거 아니지?"
우리는 녀석의 이른 등장에 의아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던진다. 난 혹시 소개팅에서 녀석의 까칠함이 여자한테 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여기서 실수는 통념적인 인간 간의 도덕규범이 아니다. 남녀간의 만남은 사회적 통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자가 불쾌함을 느꼈으면 실수다. 남자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남녀 간의 첫 만남은 갑을 관계로 시작한다. 갑을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관계가 발전하기 어렵다. 포인트는 여자가 갑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가 친구를 위해 잠시라도 을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뭐 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서, 적당히 얘기하고 헤어졌지 뭐~"
"왜? 뭐 어떻던데… 말 좀 해봐!"
"그냥 커피숍에서 만나서 얘기 좀 하다가 헤어졌는데"
"밥도 안 먹고? 그냥 헤어진 거가?"
"내가 맘에 들지도 않는데, 왜 밥을 먹냐? 커피값도 아까운걸 그래도 너 생각해서 계산했구먼"
"야! 해도 저물어 가는데 저녁 정도는 사 먹여서 보냈어야지"
"아따~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한테 피해 갈까 봐 내선에선 극진히 모셔줬으니, 그리고 걔 말 진짜 많더구먼! 재미도 없는데 2시간 동안 앉아서 경청해주고 왔다. 이만하면 최선을 다 한거 아니가?"
"그래~ 애프터는?"
"내가 왜?"
귀덕은 나의 체면을 봐서 성의를 보여줬다며 생색이다. 녀석은 귀찮은 부탁을 하나 해결해 준 것 마냥 비운 술잔을 내려놓으며, 오늘 술값은 나더러 계산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와~ 역시 귀덕이 너답다!! 인정!!!"
"하여튼 그 성격이 어디 가나, 넌 역시 밥맛이야"
"그 여자도 너 밥맛이라고 안 그러던?"
"뭐 그런 말은 없었는데…"
"부럽다~ 그 근거 없는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거냐?"
우리는 귀덕을 술안주 삼아 갑론을박 논쟁이 펼쳐진다. 친구들은 소개팅녀가 많이 궁금한 듯 그녀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한다.
"근데 진짜 얼굴은 이쁘디? 나도 한 번 만나보까?"
"그래 그 다음은 나!"
"하하하, 우리 돌아가면서 한 번씩 만나보자!"
차도녀 체험단이 구성됐다. 다들 굶주린 승냥이마냥 여자 구걸들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 데 자기들끼리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 걱정이다. 차달모가 혹시 소개팅에 불쾌함을 느끼진 않았을까, 그럼 나의 회사생활은 더욱 고달파질 것이다. 친구에 대한 분노의 리벤지가 나의 업무로 이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마음이 편치 않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헉~ 그녀인데!, 야~ 다들 조용!"
차달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건 뭔가 좋지 않은 예감 엄습해온다. 확장된 동공으로 합죽이가 된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고정되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월드컵 결승전 생방송 중계를 놓친 듯 아쉬운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나를 쳐다본다.
"여보세요! 희택 씨?"
"예 보희 씨!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나는 오늘 그들의 소개팅 사실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태연한 척 전화를 받는다.
"아~ 네! 통화 가능하세요?"
"예 말씀하세요!"
"사실 오늘 친구분 만났는데요..."
"아~ 그러셨구나! 어떠셨어요?"
"아니~ 친구분 성격이 원래 그래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제 친구가 무슨 결례라도 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격앙되어 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려 한다.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녀석에 대한 배신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요"
"뭐가요?"
"아니, 소개팅을 많이 안 해보신 분인가요? 아님 여자를 잘 모르시는 분인가요?"
"그렇지는 않은데… 그 친구…"
"얘기가 잘 통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차만 마시고 바로 커피숍 앞에서 헤어지자고 해서 좀 황당했네요"
"아~ 그러셨군요! 기분 상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릴게요"
"아니~ 뭐 희택 씨가 사과할 것까지야 없는데요, 혹시 그분은 연락은 없었어요?"
"아… 아뇨! 전혀… 전 오늘 두 분 만나시는지도 몰랐네요 하하하"
나는 어설픈 헛웃음 소리를 억지로 만들어내며 모른 체한다. 그녀는 기분이 나쁜 건지 아쉬운 건지 모를 여운 있는 말투로 통화를 이어간다.
"아~ 그래요? 사실 저도 소개팅 안 해본 게 아닌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아~ 제가 나중에 친구한테 연락 한번 해볼게요"
"아니 됐어요! 그러실 필요까진 없구요, 친구라고 하셔서 혹시 연락 오지 않았을까 해서 물어본 거예요"
"별로 많이 친하진 않아요 헤헤"
이건 무슨 상황인 건가? 당황스럽다. 갑을 관계가 반대로 형성된 것인가? 확실한 건 둘의 관계는 지속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날 우리는 귀덕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존경심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슴속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부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차도남과 차도녀의 만남은 그렇게 차도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승리는 친구가 했는데 그 기쁨은 왜 내가 느끼는 걸까?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녀는 한번도 애프터를 받아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100승 고지를 코 앞에 두고 99승 1패로 화려했던 성적표에 오점을 남겼단다. 그리고 그 1패를 남겨준 녀석은 그 사실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