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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26. 2024

기쁨의 대가

[초단편 소설] - 열다섯 번째 -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그와 일한 지 이제 2주째 접어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본성은 드러나는 법이다. 처음에 나를 대하던 다정한 말투와 무심한 듯 온화한 태도가 마음을 움직였다. 타향에서 고생하는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들과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섞어가며 얘기를 하던 만남의 대화를 기억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삶의 밑바닥으로 내려오며 산전수전을 겪다 보니 이런 류의 사람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약간의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천사였고 마지막은 악마였다.




처음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무례하거나 험악한 사람은 순박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에 때가 묻지 않아 표현이 정제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순박한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세상과 차단된 사람(문명과 멀어진)과 무지한 사람(문명을 무시한)이다. 그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전자나 후자 모두 의도(생각)와 언행이 따로 노는 것은 비슷하지만 전자는 배움이 없어서 후자는 배운 데로만 하기 때문이다. 배움이 없으면 순수해지고 배운 대로만 하면 무지(식)해진다. 그리고 여기 말하는 배움은 옳고 그름이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는 배웠는데 그 배움이 악에서 비롯되었다. 전자와 함께 있으면 선해지고 후자와 함께하면 악해진다.


처음에 그가 나에게 했던 호감 있는 행동은 나를 잡아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지나고 내가 받아야 할 돈의 액수가 커질수록 그의 본성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럼 서서히 노예근성이 발휘될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노예가 웬 말인가? 나는 그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된다. 그에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야 할 돈 때문에 구속된다.


첫인상이 나쁘면 관계는 바로 종결되고 이런 상황으로 빠져들 일이 없다. 왜 우리가 좋은 첫인상을 지녀야 하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는가? 상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상대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이든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이든 뭐든 간에 첫인상이 관건이다.


사회에 때가 많이 묻었지만 관계를 이용할 줄 아는 위선자는 시간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험악해진다. 그들은 사람을 어떻게 길들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처음에는 감성으로 접근해 나중에는 돈과 힘으로 사람을 지배하려 드는 종류의 사람이다. 거기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건 그들에게 저항하고 맞서면 점점 현실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선 돈과 힘이 필요하다. 그들에게서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걸 얻는 대가로 나의 순수함을 반납해야 한다.

 

내가 받을 돈과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힘(소비 = 타인이 생산하고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을 가질 수 있음을 알기에 참고 견뎌야 한다. 그렇게 위선과 무례함은 전염된다. 나도 여기에 적응되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임을 안다. 그래서 더 무섭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영혼이 죽어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대항하고 맞서면 나는 죽는다. 과거 예수도 그렇게 현실에 맞서다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나는 비루하더라도 현실의 삶을 계속 연장하고 싶다. 간절하다. 현실은 비루할지언정 비현실이 나에게 줄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나를 죽이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비현실에서 살아난다. 현실의 내가 죽음으로서 비현실의 또 다른 내가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는 현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나를 비웃겠지만 나는 그들이 영원히 알 수 없는 비현실에서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그들의 억압과 불쾌가 강해지면 나의 비현실은 더욱더 간절한 소망을 가진다. 다만 내가 이 비현실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현실의 시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나에게 하사하는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많이는 필요 없다. 왜냐 나는 현실의 시간을 살지 않기에 현실의 1시간을 10시간으로 연장할 수 있고 만약 나의 내공이 더 올라간다면 아마도 1시간을 100시간 혹은 1년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에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는 자유와 평등과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밖으로 내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글거리는 것들이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남몰래 글을 쓴다.

 

내 안에 억압된 감정들과 쌓여온 불쾌를 키보드 자판 위에 신나게 두드린다. 그러면 장문의 하소연이 출력되고 나는 다시 그들의 억압과 불쾌를 입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쓰레기 통을 비워야만 다시 쓰레기를 담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의 나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삶이 비루할지언정 비현실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그 가식과 무례함을 멋쩍은 미소와 멍청한 표정을 연기하며 하루를 견뎌낸다. 그도 아마 과거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젊은 날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때의 무례함의 강도는 더 했으리라. 하지만 무례함의 강도 또한 상대적인 것이다. 자신이 당하는 무례가 가장 크다. 그는 그때 느꼈던 타인들의 위선과 무례함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디며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그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스며들어 자신과 하나 되어 이제는 타인에게 뱉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보고 배운 대로만 한다.

 

인간은 보고 배운 대로 한다.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몸에 프로그래밍 된 대로만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상처받은 만큼 타인에게 돌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선과 악의 총량은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줄지도 늘지도 않으며 계속 반복된다.


나는 다만 이제 악의 총량이 아닌 선의 총량 속에 머물고 싶을 뿐이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이젠 더 이상 악의 영역이 아닌 선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내가 받은 악을 내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어질까 두렵다. 그럼 나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 [마태복음] 5:44 -


과거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아마도 악의 고리를 끊고 선의 영역으로 옮겨가라는 뜻이 아닐까?! 내가 악의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악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해서 나를 통해 이어질 악의 고리를 끊어내라는 말일 것이다. 원수에게 복수하고 원수의 자녀가 또 그 원수에게 복수하고 하는 류의 삼류 무협 영화의 스토리는 현실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자신이 삼류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의 구현이라 믿는다.


나는 며칠 동안 이어진 무례함 속에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하다. 이렇게 내상을 입고 나면 휴식이 필요하다. 육체와 영혼이 모두 괴로운 상황 속에서는 글이 잘 써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둘 중 하나만의 고통을 원한다. 그럼 글을 쓰는 의욕이 생기지만 두 가지 상황이 겹치면 의욕마저도 사라진다. 그냥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야! 이렇게 하라고!"

"넵! 알겠습니닷!"

"야! 똑바로 안 할래?"

"넵! 죄송합니닷!"


나는 마치 군인처럼 딱딱 끊어지고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그에게 대답한다. 그와 2주 동안 일하면서 내가 터득한 화법이다. 그는 나의 대답이 시원찮거나 작으면


"야~ 넌 애가 왜 이리 히마리(힘)가 없냐 사내 자슥이!"


대답이 너무 우렁차면


"야!~ 너 나한테 불만 있어서 이러는 거지?! 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야! 대답 안 하냐? 개기냐?"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방식의 화법과 말투로 그에게 응대하다 그가 군대식 화법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20년 전 현역 군인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러니 그는 더욱더 가관이다.


"야~ 일 똑바로 안 하냐? 대가리 박아!"


점점 도가 지나치기 시작한다. 정말 그와 내가 한 20~30년 전 군대에서 만난 상사와 후임 같은 관계로 착각하는 듯 보였다. 속에서 울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쓴소리를 이어갔다.


'오늘까지만 참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일할 사람이 없어 급히 도움을 요청해서 온 그의 공사 현장이었다. 도움을 주러 온 구세주였지만 나는 어느새 나는 그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무례함과 쓴소리를 견뎌야 하는 이유는 혹여 그와 조금이라도 불화가 생겨 임금을 못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 그런 류의 사람들을 적잖이 보고 들어왔다. 그런 난처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일한 대가는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냥 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불혹의 나이에 다시 2주간의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지?"

"넵!"

"너 비자도 해결해야 는 거 아냐? 그냥 여기 와서 일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닷!"

"왜? 거기 돈 많이 주냐?"

"아니요, 그쪽 회사랑 이미 약속을 해놔서요"


그는 비자 얘기를 꺼내며 자신의 회사에 자대 배치를 지켜려고 했다. 어느 누가 다시 신병 훈련소에서 자대 생활을 계속하고 싶을까? 나는 왜 그가 홀로 일하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사람을 얻지 못하니 일을 진척이 있을 리 없다. 그럼 몸이 힘들어지고 몸이 힘들어지면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 날카로움은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하필 그게 나였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은 보내는 듯 보였다. 가끔씩 나에게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하고 내가 고개를 숙이면 그는 휘파람을 불며 혼자 즐거워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는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 희생의 대가가 돈이다. 이건 철저한 자본주의의 폐습이다. 나는 그 돈을 받기 위해 군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런 무례함과 부당함을 견디며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이제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변하지 못하고 있다. 불쌍하다.


"으이구! 이 망할 놈의 개새끼들! 이러니 나라 꼬라지가 저 모양이지! 안 그러냐?"

"넵 맞습니닷!"


그는 항상 쉬는 시간이나 이동하는 차 안에서 혹은 점심을 먹을 때, 정치 관련 유튜브를 항상 시청하곤 했는데... 그런 더러운 정치 세상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그의 성격은 더 우악스러워지는 듯 보였다. 나는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정치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만 했다. 그가 울화가 치밀어 내가 되물으면 나는 그냥 그의 말에 100% 동의하는 짧고 간결한 답변을 날려주었다.


"너~ 이 자식! 좀 생각이 이상한 놈 같은데..."


처음에 괜히 말을 좀 길게 했다가 그의 쓴소리가 1시간가량 이어져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는 그와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그냥 보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와 있을 때는 나의 생각을 절대 이야기 하지 않았다.


"자! 여기 웨이지! 맞지?"

"넵~ 맞습니다. 감사합니닷"

"야! 거기 같다가 다시 여기로 와! 알았지?"

"넵, 가서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닷!"

"그래 수고했다! 가봐!"

"넵! 충성!"


드디어 돈을 받았다. 신병 교육의 모든 과정이 종료되었다. 이제 나는 자유다. 나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에게 거수 경례하는 자세로 또 한 번 그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그가 나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보인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그는 기쁨을 누렸다.

나는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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