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내 머리가 나쁜 건지 책이 너무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어선지...
독서 토론에서 선정한 도서라 나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선택한 책이었다. 얼마 전에 "아몬드"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탓이었을까? 소설 "채식주의자"도 기대가 컸다.
화려한 수식어로 가득한 소설!
"국어국문학" 저자의 전공이다.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저자의 전공을.... 책 속을 뒤덮은 미려한 수식어들과 섬세한 묘사 구절들이 저자가 국문과 필력 있는 소설가라는 것을 자랑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덕분에 나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어려움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장황한 수식어구들은 내가 책의 핵심 줄거리를 파악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수식어로 인한 내용 전개가 더디다는 것도 나를 약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문학적인 감각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ㅎㅎ;
소설은 채식주의자인 영혜, 그의 남편, 영혜 언니 그리고 영혜 언니 남편 이렇게 4명의 핵심 인물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영혜 남편, 영혜 언니, 영혜 언니 남편 3명의 관점으로 3파트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시작은 영혜가 꿈을 계기로 채식을 시작하면서 전개된다. 영혜의 채식이 온 가족의 불화를 불러일으킨다. 남편과의 트러블로 시작한 불화가 부모님의 개입으로 전 가족으로 퍼지게 되고 영혜는 전 가족이 보는 앞에서 칼로 손목을 긋는 지경에 이른다. 영혜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고 그런 남편은 그런 영혜를 버린다. 그리고 형부(영혜 언니 남편)의 접근 예술가 형부는 영혜를 외설인지 예술인지 모를 세계로 끌어들이고 둘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인혜(영혜 언니) 충격으로 남편과 헤어지고 영혜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감금된다. 그리고 영혜는 병원에서 심각한 거식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
채식의 나비효과?!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뭘까? 한 여자의 채식으로 인한 온 가족의 파멸?! 난 왜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것일까부터 접근했다. 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된 걸까 어릴 적 자신을 물었던 개가 아버지에게 처참하게 희생되어 개 국밥이 돼버린 죄책감 때문일까? 많은 꿈 내용들이 나오지만 강한 설득력은 없는 듯하다. 왜 온 가족을 풍비박산 내면서까지 채식에 거식까지 나중에는 자신이 나무가 될 거라는 망상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저자는 거기에 대한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되었으니 그 이후에 변화와 결과에만 집중한다.
이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인혜(영혜 언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삶 속에서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사회적 규범에 어긋남 없이 꿋꿋하며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온 여자이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남편과 동생과의 불륜을 지켜봐야 했으며, 동생의 죽음까지도 지켜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정과 아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견뎌내어 왔다.
영혜는 자연인으로, 남편은 예술인으로, 영혜 남편은 직장인으로 각자 자기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대로 살아가는데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발버둥 치며 살아온 인혜만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오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세상과 현실에 순응하면 할수록 행복해질 수 없는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그저 채식이라는 그냥 심플한 한 여자의 식습관의 변화가 가져온 이 엄청난 파급효과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 사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않고 남과 다르면 이상하게 바라보고 바꾸려 드는지...
채식주의자 작가의 성적 묘사가 돋보인다. 작가의 화려한 문장력이 돋보이는 소설인 것 같다. 특히 성적인 묘사 부분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리얼함과 디테일함에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생동감과 몰입감을 가져왔다. 처음엔 이게 애로 소설인가 착각할 뻔했다는... ㅎㅎ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그다지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는 못한 듯하다. (아직 못 봤음)
나에게는 조금을 복잡하고 어려운 소설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쉽게 찾긴 힘들었다. 작가의 화려한 문장 속에 꼭꼭 숨겨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위의 독후감은 6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채식주의자]를 읽고 쓴 독후감이다.
사실 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은 있었지만 읽고 독후감을 썼던 것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때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계기는 처음으로 들어간 독서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 이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나는 독서 초짜였고 특히 문학은 더욱 초짜였다. 하지만 모임 때문에 억지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이 책은 나에게 적잖은 그리고 언짢은 충격을 선사했다.
[댓글] 남자가 이런 소설을 썼다면… 변태로 찍혀 사회생활하기 힘들었을 텐데… 여자가 쓰면 성판타지 예술???
며칠 전 갑자기 나의 블로그에 댓글이 달렸다. 역시 한강 효과가 크긴 큰가 보다. 요즘 곳곳에서 한강 특수가 한창이다. 그 조용하던 블로그에 6년 전의 지난 글까지 찾아서 댓글이 달릴 정도인 것을 보면 말이다. 난 그때 비로소 내가 [채식주의자]를 읽고 독후감을 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소설을 쓰고 있는 내가 저 댓글을 읽으며 느꼈던 건 과연 나도 한강처럼 소설을 쓸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한강 문학과 외설(猥褻) 사이
물론 한강 작가님의 문학적 감각과 문체를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처럼 인간의 추잡하고 더러운 밑바닥 모습들을 글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글을 쓸 때면 가끔 남녀 간의 사랑과 치정 그리고 성적인 묘사를 떠올려야 할 때가 있다. 소설에서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진 않지만 그런 장면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떠올릴 때면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낯뜨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글이 공개되었을 때 독자들은 과연 그것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여러 고민들이 나를 괴롭힌다.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의 어중이떠중이 글쟁이가 쓴 이야기는 아마 외설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의 유명한 실험이 떠오른다. 그가 허름한 차림으로 워싱턴 D.C의 한 지하철 역에서 연주를 했다. 그는 공연 한 번으로 수십억씩 벌어들일 수 있는 저명한 음악가였지만 길거리에서 45분간의 그의 연주는 겨우 7명의 행인만을 잡아 놓고 32달러를 벌어들였다.
조슈아 벨 (Joshua Bell)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술과 문학을 제대로 보고 듣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저 권위와 명성과 유행을 따라 보고 듣고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글을 쓰고 그것들을 브런치와 개인SNS에 공개할 때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까 항상 고민한다. 다행히 나의 독자분들은 그저 읽고 이렇다 할 반응(댓글)이 없어서 나는 거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좋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나의 이런 예민한 생각들 때문에 온전히 그 상상 속에 빠져들어 그것들을 글로 옮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또다시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그녀 또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여성이 남성이 되어 쓴다는 건...
한강 작가는 어떻게 남자의 관점에서 저런 성적인 묘사를 할 수 있었을까. 남자인 내가 읽어도 읽는 동안 뜨끔함을 느끼며 남성이 가진 내면의 더러움을 들켜버린 듯한 거북함이 밀려든다. 위에 댓글이 나에게 한강 작가가 만약 남자였다면 과연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중은 똑같은 반응이었을까? 같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채식주의자], 예술인가 외설인가? 이건 여성과 남성의 바라보는 관념이 너무 오랜 시간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역할로 굳혀진 때문이 아닐까?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이면도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언제나 독자들이 그것을 읽고 많은 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함이 목적이지 작가의 생각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영혜남편)와 몽고반점(형부) 그리고 나무불꽃(영혜언니)을 이야기를 연결시키며 한 사건을 보는 다른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우리가 한 가지의 관점에 얽매이지 않게 해 준다. 작가는 이런 다면적인 시각을 지녀야 한다. 작가는 자신에서 시작해 타인으로 나아가며 궁극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문학이 타인을 이해하는 예술이 되는 이유이다.
6년 전 독후감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며칠 전 도서관에서 다시 읽었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생각과 관점은 많이 바뀌었다.
가장 불행한 자
6년 전 독후감에서 느껴지듯 나는 당시 인혜(영혜 언니)에게 가장 많은 감정이입을 했던 모양이었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건 아마도 그때까지의 나의 삶이 그녀와 비슷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문학을 읽으며 타인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문학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대변하는 인물, 즉 내가 그 안에서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스토리 텔링을 따라서 다른 인물의 내면과 말과 행동들을 보며 타인의 상황과 감정도 함께 보게 된다. 그 과정이 나를 타자화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드려다 보는 것이다. 관조이다.
당시 나는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해외로 떠나기 전이었다. 10년이 넘는 직장 생활 동안 내가 느꼈던 고단함을 인혜를 통해 보는 듯했다. 사실 처음엔 영혜 남편에게 감정이입이 되기도 했지만 미혼인 나에게 그 상황들은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결혼과 사랑에 관해서 부정적이긴 했지만 희망 같은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적잖은 이질감과 거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이질감과 거북함은 죄책감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6년이 지나 다시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작가는 우리 안에 깊숙한 곳에 가려져있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이리라. 그것을 바로 본다는 것은 아주 힘들고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문학이 해야 할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문학마저도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서 우리를 제대로 드려다 볼 수 있겠는가? 온통 가식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는 그나마 영혜 남편 또한 결국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아내의 고통을 모른 체하는 모습에서 결국 그도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족은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상처주기도 가장 쉬운 존재이다.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편, 나무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녀는 철저히 현실에 홀로 남겨진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통만 받는다. 그리고 그 고통을 치유할 방법도 없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냥 그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영혜는 환상 속에서 살고, 영혜 남편은 현실 속에서 욕망을 채우며 살고, 인혜 남편은 상상 속에서 살며 각자의 도피처를 가지고 있지만 인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인간들 속에 있는 둘러싸여 있는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다. 6년 전에 나는 그 인혜의 고통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해한 존재는 말라죽어 간다. 저 말라가는 나무는 누구인가?" 유해함과 무해함 사이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제 나머지 3명의 인물들에게서도 알 수 없는 연민과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살았다. 그것이 그들 각자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곳을 갈망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야만 현실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혜만 그걸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고통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은 없고 타인만 있는 자와 타인은 없고 자신만 있는 존재, 이 둘은 서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의지한다. 이 양쪽의 균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6년이 지나고 지금 다시 읽은 [채식주의자]에서는 6년 전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영혜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수많은 관계와 역할 그리고 관습(제도) 속에 엮이는 순간부터 자신이 정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맞이하는 최후가 너무 가슴 아프다.
이건 지구에서 가장 유해한 존재가 마침내 무해함의 소중함을 깨달아도 그렇게 되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수많은 관계와 역할 그리고 사회적 가치와 제도에 의해서 희양생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수함과 무해함은 현실을 견딜 수가 없다. 한 인간의 ‘채식주의’, 즉 순수와 무해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오염되고 유해한 인간들에 속에서 파멸을 맞이하는 형국이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될 것을..."
- 굴원 [어부사] 중에서 –
굴원의 시조가 떠오른다. 누군가는 오염되고 유해한 존재 때문에 고통받지만 누군가는 순수하고 무해한 존재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건 세상이 오염과 유해와 혼돈으로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지 않을 뿐이고 설사 그것을 인정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갈등과 분열은 끝이 없다. 우리는 말로는 순수와 무해함을 입에 담지만 생각과 행동은 오염되고 유해한 것들만 찾는다. 모순이다.
무해력 [트렌드 코리아 2025] "삶이 다 그런 거 아니겠니..."
이런 말로 자신을 위안하는 건 우리가 현실의 삶을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며칠 전 서점에서 본 [트렌드 코리아 2025]에는 내년에 떠오르는 키워드에 "무해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유해한 삶이 아닌 무해한 삶을 살려고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사람들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것이 또다시 냄비현상이 아니기를 바라본다. 이런 독서 문화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순수와 무해를 지향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 문학은 우리가 나와 타인을 온전히 드려다 볼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무해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세상이 지금보다는 좀 덜 냉혹하고 덜 유해할 것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채식주의자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Ik1uon3vzQ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