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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30. 2024

그리움과 즐거움 사이

'닭의 장풀'을 보면서...

한 때의 즐거움이 기나긴 그리움을 견디게 만든다. 


꽃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한 때를 꽃피우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도 오랜 시간을 그리움 속에 살아왔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푸르른 싱그러움은 내일이면 사라질 즐거움일 뿐이다. 삶이 덧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꽃을 피워야 한다. 그때의 즐거움이 긴 그리움을 견디게 만듦이라. 아니 그 즐거움이 없었다면 그리움도 없으리라...




산길을 오르다 길가에 핀 꽃들이 눈길을 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길가에 핀 들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숨이 가쁘다. 땀이 흐르고 다리가 아파온다. 오르는 길에 잠시 멈춰 섰다. 거친 숨소리를 가다듬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들꽃들을 가만히 드려다 보았다.

승학산에서...

양쪽으로 펼친 파란 두 개의 꽃잎이 마치 닭 볏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 길게 드리운 대롱 모양의 수술은 마치 나비의 주둥이를 닮아있다. 암술은 주둥이의 뿌리에 발라놓은 꿀처럼 노랗게 묻어있다. 


세상이 좋아졌다. 이젠 들에 핀 꽃 들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름을 알아낼 수 있다. 왜냐 우리에겐 이제 항상 구글신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구글 사진 검색기능으로 사진을 찍었다.


"닭의장풀?, 헐~ 이게 꽃이름이야?” 


꽃 이름 치고는 너무 꽃답지 않다. 꽃인데 풀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검색해 봤더니 엄청난 번식력으로 잡초 취급을 받기도 한단다. 지금 이맘때 초가을에 피어나는 꽃이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보니 주변 곳곳에 이 작은 파란 물감이 점점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풀 곳곳에서 발견되더라.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생긴 모습이 닭 볏 같은 건 나만 느낀 게 아닌가 보다. 그런데 이건 한국사람만 그런가 보다. 

Dayflower

중국에선 야석초(鸭跖草)라 불리 운다. 중국인들에게는 이것이 오리발처럼 보이는가 보다. 일본에선 로초(露草)이다. 이슬처럼 보이는가 보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는 풀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영어로는 Dayflower(하루꽃)이다. 다행히 녀석은 서양에서는 꽃 취급을 받았다. 동양인들은 보이는 모습으로 이름을 지었고 서양인들은 식물의 생태를 보고 이름을 지었다. 나는 영어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든다.


하루만 피고 지는


하루꽃(Dayflower), 이름처럼 하루만 피고 지는 꽃이다. 여기서부턴 하루꽃이라 칭하겠다.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고 그  때문에 이 글이 쓰였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내일 다시 여기로 와서 이 꽃을 봤다면 그것은 어제의 그 꽃이 아니다. 그 꽃은 어제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을 때 생을 마감했다. 오늘 보는 꽃은 오늘 아침 핀 다른 꽃이다. 꽃 덩굴에는 수많은 꽃망울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시간에 차이로 인해 같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꽃들은 매일 새로운 것들이다. 


내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고 있다. 피고 지는 것이 죽고 사는 것과 같다. 내가 죽어도 누군가는 계속 살아간다. 멀리서 보면 다들 비슷하다. 누가 죽고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꽃과 삶은 모두가 다른 꽃이고 삶이다. 삶도 꽃도 모두 잠시 피었다 지는 것이다. 어찌 삶을 이 하루꽃에 비하겠는가 싶지만 삶도 이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하루꽃의 전 생애인 하루가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왜냐 우리는 인간의 삶에 프레임에만 갇혀있기 때문이다. 길고 짧음의 의미는 주체와 객체가 있어야 한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고 모든 기준은 인간이다. 모든 의미가 주체의 관점에서만 생겨난다. 이 꽃은 하루가 생이고 인간의 생은 길어봐야 100년이고 우주는 생은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없다. 이것을 비교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꽃보다 긴 생에 안도하고 우주보다 하찮은 생에 허무해하는 건 오직 인간 밖에 없다”


그리움과 즐거움 사이


하루꽃의 꽃말은 '그리움 그리고 즐거움'이다. 꽃말이 두 개다. 또다시 나의 호기심을 부른다. 그리움과 즐거움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루만 살고 죽지만 피어났을 때의 모습은 즐거움이다. 단 하루만 환하게 피어나고 나머지 시간은 덩굴로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다. 그 피었던 때만 그리워하며 다음 생을 기다린다. 


우리도 그렇다. 인생에서 꽃을 피우는 시절은 그리 길지 않다. 젊고 아름다움 시절은 너무도 짧다. 꽃다운 나이는 인생에서 아주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이 지나면 그 짧았던 청춘의 시절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비록 힘겨웠을지라도 가장 생기 있고 즐거웠던 시절이다. 아이들과 생기발랄한 청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자신이 꽃피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 때문 아니겠는가. 그건 자신도 그때 그 시절의 즐거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있기에 그리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대부분이 이 그리움 속을 살아간다.


꽃을 피웠던 시기 그 당시에 자신은 몰랐지만 그때는 뭘 해도 힘들지만 금방 즐거워졌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항상 무대 위에 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한다. 언제나 청춘의 활력과 아름다움은 열정과 관심을 불러온다.


이 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큰 열정을 불태웠고 얼마나 많은 관심을 주고받았는가에 따라 그 그리움의 여운은 달라진다. 컸다면 그리움 또한 크고 오래갈 것이다. 늙어버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것들을 추억하며 나머지 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누구보다 더 크게 느낄 사람이다. 하지만 이건 또한 삶을 후회 없이 살았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기도 하다. 열정을 불태웠고 수많은 관심을 주고받았다면 말이다. 

등산로에 핀 닭의장풀

“Dayflower(닭의장풀) 안녕!”


산을 오르다 만난 하루꽃(닭의 장풀)이 나에게 깊은 상념을 가져다주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잡풀이었다. 하지만 난 그것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러자 그것들이 나에게 의미를 만들어 주었고 한 편의 에세이를 쓰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이 꽃의 이름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또 이 꽃을 보게 된다면 지금 이 글을 쓰던 때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항상 가까이 있었지만 모르고 살아가는 것들이 많다. 그건 우리가 그것들의 이름을 찾고 불러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이 항상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건 의미 있고 이름 있는 것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불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멀리 있지 않음에도 항상 내일과 먼 미래에서만 찾으려 한다.


의미 있는 무언가를 얻고 싶은가? 그럼 가까이 있지만 사소한 무언가의 관찰해 보라. 그것의 이름을 찾고 그 이름을 불러주어라. 그럼 그것이 당신에게 의미가 되어 다가올 것이다. 그 의미들이 쌓이면 삶은 의미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꽃(닭의장풀)을 보며 그리움과 즐거움 사이에서 삶의 덧없음의 의미를 깨닫는다.    

바위에 핀 닭의장풀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승학산 정상에서

P.S. 이 시가 오늘 따라 더 깊이 와닿는 것은 내가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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