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상우 - 두 번째 -
“문학(文學)과 학문(學文)의 차이는 무엇인가?”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이건 한글도 같지만 한자도 똑같다. 단지 그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럼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학은 글(글자 문)이 앞에 있고 배움(배울 학)이 뒤에 있다. 학문은 배움이 앞에 있고 글이 뒤에 있는 형상이다. 이건 이 단어가 우선순위가 다름을 의미하고 그 방향이 다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은 상호작용하며 문학과 학문은 병행되어야만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가 있다.
도서관에서 낯익은 책을 발견했다.
예전엔 도서관에 가도 대부분이 영어 원서로 된 책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건 그 단어와 문장이 품은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장 속을 돌아다녀도 책들이 풍기는 어렴풋한 느낌들만 있을 뿐 그 느낌이 호기심과 반가움 같은 감정을 유발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국어로 가득 찬 책장 사이를 돌아다닌다. 수많은 제목들이 눈길을 끈다. 호주에서 전자책으로만 읽던 책들을 여기서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다 만난 소설가인 박상우가 쓴 [소설가]를 발견했다. 이 책은 내가 호주에 글을 쓰던 초창기에 읽고 아주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소설 작법을 위해 글쓰기 이리저리 글쓰기 관련 책들을 뒤적이다 찾게 된 보석이었다.
그때 책을 읽고 독후감[1과 0으로 수렴하는 삶](참조)을 썼던 기억이 있다. 하나의 독후감으론 너무 부족하다. 가슴에 와닿는 구절들과 놀라움을 이끌어 내는 구절들이 너무 많다. 반가움에 책장에서 그 책을 끄집어내어 다시 읽었다. 이미 읽을 책을 가방에 들고 왔지만 우연히 만난 과거의 인연(因緣)을 다시 읽게 되었다. 삶은 항상 이런 우연이 만들어 내는 즐거움 때문에 살아갈 만하다.
“문학, 사유로 채색된 회화, 현실의 결함을 배제하고 재현된 현실인 문학은 나에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도달한 만한 목표다. 그 노력이란 것이 정말로 인간적이라면, 즉 동물적이지 않다면 말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학문보다 문학을 더 선호한다. 학문은 돈이 되는 배움이고 문학은 돈이 안 되는 배움이다. 그래서 항상 문학은 학문에 비해 홀대받기 쉽다. 자본주의 세상에 돈이 되지 않는 것은 그 가치와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문학이 없다면, 즉 인간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빠르게 차가워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문학이 버티고 있어야만 한다. 홀대받고 힘겨울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에 문학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내가 자주 다니는 도서관에도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문학을 읽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과거 퇴사를 호주로 가기 전 자주 찾았던 도서관은 도서관이라기 보단 독서실에 가까웠다. 물론 한글 단어로만 보면 두 단어가 크게 다를 게 없지만 한국인이라면 이 두 단어의 어감 차이를 통해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실은 공부를 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책을 읽는다기 보다 지식을 이해하고 외우는 공간이다. 대부분이 전문 자격과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당시 도서관에는 이런 고시, 공시족이나 각종 자격증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수험서나 기술자격 서적들이었다. 배움(전문지식)을 위해 글을 보는 자들이다.
지금도 도서관에는 이런 배움을 위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노벨상의 효과 때문일까. 글을 음미하며 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어났다. 전자는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위해 글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이고 후자는 감동과 깨달음(각성: 覺醒)을 위해 글을 음미하는 하는 자들이다.
문(文)/학(學)=문학
“문학은 글을 우선하는 분야이다. 단지 글만 우선하고 오직 글로써만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 그 바탕에는 세상의 모든 학문이 거름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저자는 문학은 글로 표현하는 예술작품이라고 본다. 이건 나 또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문학이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문학은 학문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학문의 기초가 없는 문학은 모래성과도 같다. 글이 분자이고 학(배움)이 분모를 이룬다는 저자의 해석이 너무 와닿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아마 글을 쓰는 사람, 특히 문학을 하시는 분들은 절대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문학인이 문학을 많이 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문학인일수록 다른 분야들의 책을 더 많이 접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야기의 지평이 넓어진다.
이성적 예술
문학은 잡학의 미학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서평 참조)이라는 책이 있다. 문학인은 전문분야의 깊은 지식까지 알 필요는 없다. 다만 다른 많은 분야들을 두루 얕게 알고 있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문학은 삶과 세상의 모든 영역을 이성적으로 연결시키고 융합해서 감성적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이다. 이게 다른 예술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다른 예술은 그런 지적(다양한 지식), 이성적(논리적 집필) 능력까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은 이성적 예술이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과학 및 SF 소설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건 과학과 문학의 융합이다. 과학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인정받는다. 내가 전문적인 지식을 많이 안다고 다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서 특히 이야기(소설, 플롯)라는 구조 속에 담아내어 독자로 하여금 이해와 공감하며 거기에 감동까지 얹혀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지식의 깊이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이야기 속에 전문지식을 곁들이는 것과 전문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일반인은 봐도 알 수 없는 딱딱한 논문 밖에 쓸 줄 모르는 지식인은 세상과 사람과의 소통을 멈춘 자이다. 지식의 늪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지식을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재료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학문을 문학과 연결시키고 융합하는 것이다. 문학과 학문이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인도 여러 분야를 공부해야 하고 전문가들도 문학을 많이 접해야 한다. 분모의 배움이 많아지면 분자에 담길 문학이 많아지는 법이다. 좁은 지식에 갇혀 있는 문학은 생명력이 짧다.
학(學)/문(文) = 학문
“학문은 문학과 달리 글이 아니라 전문 분야를 우선으로 삼는다. 나름대로의 학문적 체계를 갖추기 위해 글을 전달 수단으로 삼는다”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사실, 학문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학문(學文)과 학문(學問)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학문이라는 단어는 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 學文: ≪서경≫, ≪시경≫, ≪주역≫, ≪춘추≫, 등 예(禮), 악(樂)따위의 시서/육예를 배우는 일
- 學問: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
-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
하지만 이것이 단지 시대적 배경의 차이라 생각한다. 과거 고대 문인들은 오직 서경이나 주역 같은 것만 학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모든 분야가 학문이다. 학문세계의 지평이 너무 광대하고 넓다. 그래서 문이라는 글자가 ‘묻다’ (물을, 문 問)로 바뀐 것일 뿐이리라.
학문(學文)은 전문지식을 익히기 위해 글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글에는 그 어떤 감성이나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사실과 이성 그리고 합리를 갖추어 적어놓은 영혼 없는 글자들이 조합이다. 하지만 세상은 사실과 이성과 합리라는 삼박자를 유지하며 돌아가는 곳이다.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무정하고 감정 없는 지식들의 많고 적음으로 그 사람에게 자격과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전문가 혹은 전문직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일반인은 전문가의 도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인의 수요와 전문가의 공급의 격차로 인해 부를 쌓는다. 그래서 도서관에는 문학보다는 학문을 위해 책을 읽는 자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도서관의 건립 취지와는 다른 용도로 쓰인다. 도서관은 국민들의 교양과 인문적 소양 그리고 얕고 넓은 지식을 쌓도록 하여 서로가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도록 함이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우물(전문영역)만 파고든다. 어찌하겠는가. 먹고 사니즘이 더 중요한데… 안타깝지만 뭐라고 할 수 없다. 삶은 읽고 쓰는 것보다 사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각박하고 분주하다. 다들 전문가이다. 자기 소리만 내기 바쁘다. 그래서 화합과 조화는 찾아보기 힘들고 갈등과 분열이 만연하다. 뭐 이건 이제 전 세계의 흐름 같기도 하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마태복음 11:15 –
성경에는 이와 같은 구절이 수없이 반복된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외치는 자들에게 들을 귀는 없다. 한 분야에 최고가 되면 마치 신이라도 된 것 마냥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보면 구토가 나올 것 같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감정 없고 짧은 글(분모) 위에 배움이라는 분자만 부풀려 가분수가 되어 휘청거린다. 위태위태하다. 글이 품은 수많은 것들을 모두 배제한 채 지식만 쌓은 자들이 세상을 움직이면 위태위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과 학문 사이
문학과 학문은 함께 가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병행하기 힘든 건 문학은 학문까지 모두 하려면 삶이 너무 곤궁해지고 학문을 하는 자는 문학을 들여다 보기엔 성공으로 가는 게 더뎌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 문학과 학문의 각 영역의 최고 자리는 AI가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 두 가지를 연결하고 융합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아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문학적으로만 그리움을 느낀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느끼는 동물이다. 이젠 학문은 감성 품어야 하고 문학은 지성을 넓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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