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사유 방식이 그 밖의 모든 철학자들보다 뛰어났던 점은 그 저변에 거대한 역사적 의식이 놓여있었다는 것이었다”
- 피터 싱어 [헤겔] 중에서 -
‘철학’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광장에서 대중들을 향해 떠들어대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현실의 모습은 그지없는 한량과도 같은 존재였다. 가정과 생계 같은 현실적인 것들과는 동떨어져 항상 대중들 속에서 묻혀서 설변을 쏟아내고 토론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아내(크산티페)도 악처로 이름을 남겼다.
소크라테스 (???~BC399)
“청년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되나니”
- 소크라테스 -
우리가 철학과 그리 친숙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정확히는 그것을 익히고 배워도 즉각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비실용적인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라면 우리의 생각은 좀 달라진다. 교과 과정에도 철학은 빠져도 역사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왜냐 역사는 과거의 현실이고 팩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팩트 속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는다. 그에 비하면 철학은 너무 피상적이다. 배움과 지혜가 상상 속에만 떠도는 것 같다. 헤겔은 그런 피상적인 철학을 역사와 연결시켰다.
그의 철학은 당대 독일의 대중들을 매혹시켰다. 그는 명성을 얻었고 베를린 대학의 총장의 자리에 까지 올라갔다. 그는 칸트이후 서양 철학의 큰 줄기가 되었다.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서양철학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거쳐야 할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바로 ‘헤겔’이다. 칸트를 읽었다면 그다음은 헤겔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왜냐 헤겔이 칸트의 철학을 그나마 가장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어받은 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모범(칸트와 헤겔) vs 개성(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칸트나 헤겔 보다는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헤겔과 쇼펜하우어는 동시대의 같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시 헤겔이 구독자 100만 명 유튜버였다면 쇼펜하우어는 고작 구독자 1만 명의 인플루언서였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 당시 대학에서 헤겔의 인기는 엄청났다. 반면 쇼펜하우어의 수업은 파리만 날리는 수준이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몹시 질투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고 지금은 그 인기가 반전된 것 같다. 예술가도 그렇지만 철학자도 시대마다 다른 평가와 인기를 누리는 것 같다. 살아서 누리지 못한 걸 죽고 나서 누리기도 한다.
쇼펜하우어(1788~1860)와 니체(1844~1900)
왜 지금에 와서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이 인기를 끄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한국인은 좀 더 자극적이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것에 더 끌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그런 점에서는 아주 개성 있고 매력적인 철학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니체와 쇼펜하우어도 칸트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면 칸트와 헤겔의 철학을 드려다 봐야 한다. 오랜 시간 그를 외면하다 결국에 집어 들었다. 이건 순수한 흥미와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마치 의무감과 책임감에 집어 든 책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서 뜻밖의 놀라운 수확을 얻은 느낌이다. 읽지 않았음 어쩔 뻔…
헤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변증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채사장의 [열한 계단]을 읽고 변증법과 관련된 독후감[정반합의 불편한 성장]을 쓴 적이 있다. 헤겔의 철학 그 영역 방대하다. 이 책에서는 헤겔의 철학 중에 역사철학에 집중한다. 나는 그중에서 서양철학역사의 시작에 큰 관심이 쏠린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던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내 생각과 함께 얘기해 보려 한다.
서양 철학 역사의 시작 – 소크라테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서양 철학의 기틀을 세운 사람을 떠올리라면 ‘소크라테스’를 떠올릴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서양철학이 그토록 꽃 피우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시작으로 플라톤(절대주의)과 아리스토텔레스(상대주의)로 이어지는 두 갈래의 철학 기조는 2000년이 넘는 서양철학역사의 시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범주를 넘어 성인(聖人)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과거 나는 소크라테스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죽음이 마치 예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의 비판적 사유와 성찰은 자유의 발전 과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열쇠다”
- 피터 싱어 [헤겔] 중에서 -
고대 아테네는 시민 사회였다. 소크라테스 같은 평민들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그것을 공론화하며 대중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된 사회였다. 만약 그런 사회 분위기가 아녔다면 소크라테스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설변은 대중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대중들로 하여금 항상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던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 아래 많은 걸출한 철학자들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 스토리의 뼈대만 보면 예수의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 또한 당시 만연해 있던 신에 대한 오랜 관습을 타파하는 뉴에이지 선동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비판적 성찰의 판단 근거는 기존의 사회적 관습이 아닌 철저히 이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 점이 예수와는 다소 다른 점이다. 예수는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성의 영역(영적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성인이 되었다.
몸은 죽어도 정신은 영원하다
“그리스의 멸망은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됐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이 한 문장이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이고 이것은 나의 생각의 반향을 일으켰다. 헤겔의 역사의식이 철학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와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시작한 고대 아테네의 정신문명은 지금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는 일찌감치 역사의 뒷 켠으로 사라졌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스는 지적이고 이성적으로 고양된 정신문명을 탑재한 국가였음에도 현실의 역사무대에서 금방 사라져 버렸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기원전 4세기말, 마케도니아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의 시민 사회는 그 막을 내렸다. 헤겔은 그 멸망의 원인을 소크라테스에서 찾았다.
고대 아테네는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한 최초의 국가였다. 물론 이 시민의 자격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당시는 노예제도가 존재했고 여성과 외국인등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간접 민주주의보다는 좀 더 많은 다수의 지식인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다수의 의견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토론과 문답의 장이 끊임없이 펼쳐졌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탄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탁상공론만 한다고 세상(현실, 경제)이 돌아가지 않는다. 말(사고)하는 자 말고 행동하는 다수가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당시 그리스 아테네 국가는 그 노동력을 노예라는 제도가 떠 받쳐주고 있는 사회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노예제도를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예수와 크게 다른 부분이다.
국력의 약화 원인 – 다수가 말(생각, 사고)하는 사회
그리스에는 아테네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국가들로 함께 존재했다. 그중 아테네와는 달리 왕정과 과두정으로 도시를 운영하는 스파르타가 있었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체제로 인해 끊임없는 분쟁과 전쟁을 겪었다.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아테네의 이상 사회는 종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가족 간 싸움으로 국력이 쇠퇴한 그리스는 결국 마케도니아게 멸망 당한다.
[소크라테스의 독배] - 다비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국민의 정신을 고양하는 존재였긴 했지만 국가의 힘(경제력, 군사력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독립적인 다양한 생각들이 혼재하는 사회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여기에 적합할까?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왜냐 이미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정신은 아테네의 시민들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린 뒤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서양의 개인주의 사상의 시초였을지도...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예수의 사랑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킨 자들은 인간을 현실세계에서 멀어지게 한 대가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연결
철학과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왜냐 철학이 역사 속에서 변형된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육체적 일상적 활동을 포함한다. 이건 생활양식과도 같다. 그리고 이 둘을 연결시킨 것이 바로 로마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AD 272~337)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밀라노 칙령, AD313년)한 이유는 과거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신(개인)과 중앙 집권적인 힘(국가)의 균형을 이루어 제국의 영원함을 도모하려는 시도였다. 개인의 독립 개체와 국가의 집단 개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건 마치 현재 미국이 다문화 다민족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개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지 않도록 자유와 공정의 이념과 평등과 박애의 종교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고 또한 영적인 동물이다. 이런 불안정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둘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성-사고하는 인간)과 예수의 박애(감성-영적인 인간)를 결합시켰다.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래서 이후 중세 서양 철학이 기독교와 연결(교부철학)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절대주의 철학이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으로 문서화 체계화 되고 그것이 중세에 신이라는 것과 연결되고 신의 아들 예수를 대중의 전면에 내세워 그를 통해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게 만든 것이다. 로마제국이 그렇게 오랜 시간 번영하며 서양 역사를 써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가진 이성과 감성을 아주 잘 균형 있게 이용한 덕분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해되지 않고 혼란스러운데 감성적인 위로와 치유를 통해 또 한 주를 살아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지금의 종교가 가진 형태 아니던가?
이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볼 수 있다. 웃긴 사실은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도 자신은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했었다는 것이다. 모순이다. 세상은 모순으로 밖에 다스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철학과 역사를 연결시키며 철학의 변천사를 설명하는 당대의 아주 신박한 철학을 선보인 덕분에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이성(소크라테스)과 감성(예수) 사이
우리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행동하며 때론 감성적으로 느끼고 공감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건 바로 우리가 현실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와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상 혹은 현실 그 어떤 한 방향으로 가려면 모두가 동시에 같이 그 방향으로 향해 가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이다. 지구의 모든 국가와 지도자들 그리고 그 국민들의 생각이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같이 국수주의의 분위기에선 더욱 힘들다. 그렇기에 고대 아테네의 이상적인 시민사회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히…
우리가 이성(철학)을 배우는 것은 현실의 삶을 사고하고 이해하기 위함이고 신앙(종교)을 가지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현실의 삶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성인으로 추앙되는 것은 비록 그들은 죽었지만 그의 철학과 그의 정신은 영원해졌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좀 더 지혜롭게 살도록 해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