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소리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지만 지금은 너무도 소리가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원하는 소리는 음악이지만 원치 않은 소리는 소음이다. 소음이 많아지면 공해가 된다. 몸에 해롭다. 세상에는 나를 두드리는 수많은 소음들로 인해 잠시도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며 사색할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산책과 사색 in Aus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한참 책에 집중을 하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어떤 한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시선을 옮겨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웅웅웅”
잠시 뒤,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그리 크진 않았다지만 규칙적으로 빠르게 떨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건 소리뿐만 아니라 진동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진동은 책상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미세한 울림과 떨림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뭔가 싶어 시선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방금 나의 앞에 앉았던 남자가 책상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기댄 채 발 뒤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빠르게 반복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가히 볼 만했다. 마치 미싱기계가 박음질을 하듯이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떨림이 책상다리를 타고 나에게 미세한 소리와 진동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도저히 책을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 다른 빈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킁킁”
이번엔 옆에 앉은 사람이 코에서 소리를 냈다. 난 그가 잠시 코가 막혔나 싶었다.
“킁킁”
그런데 1분 채 못 지나서 또다시 킁킁거렸다. 그 ‘킁킁’ 거리는 소리는 일정한 시간 격차를 두고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미세먼지로 비염이 유행이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런데 그 ‘킁킁’ 거리는 소리가 꽤나 커서 이어폰으로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왜 그 사람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아주 넓은 책상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다. 요즘은 피해를 해결하려는 의지보단 피하려는 강하다. 그건 세상이 너무 흉흉해서 그런 것이리라. 괜히 타인과 불필요하게 감정 섞는 일은 삼가하는 것이 낫다. 특히 이런 유의 사람들은 말이다. 지금 이런 행동을 하면서 그 어떤 미안함이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건 그 사람이 이미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한 말과 행동이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교양은 혼자만 가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운전을 한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좀 전까지 독서 삼매경에서 빠져 있던 나는 다시 그 삼매경으로 빠져들 수 없어 보였다. 나는 결국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와버렸다. 때론 독서도 운이 좋아야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원치 않은 소리들이 너무 많다. 나는 그날 저녁 바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헤드폰을 주문했다. 그리고 이젠 그것이 가방 속에 항상 들고 다니는 필수품이 되었다.
“현대 도시는 사방에서 두드리는 소리 천지이다. 불가피한 것에 화를 낸다면, 그자가 천치일 뿐이다.”
-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중에서 -
목수일을 하면서 공사현장에서 있을 때는 항상 소음 속에서 머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소음이라고 인지하지만 그것에 불쾌해하거나 화를 내진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소음 때문에 짜증을 낸다면 그는 천치일 뿐이다. 이건 불가피하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음이 누군가에겐 피하고 싶고 불쾌한 것일 수 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아침이 시작되면 알람을 시작으로 소음이 시작된다. 고요하던 세상이 소음으로 가득 찬다. 수많은 기계 장치들이 내는 구간 반복의 소음들과 손 안에서 수시로 울려대는 알림 소리들. 사람들도 거기에 익숙해져 그들도 자신이 모르게 그와 같이 반복되는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듯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받은 소음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소음을 안겨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존재함을 알리고 내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서로 소음을 전달하며 서로의 존재를 알리며 불쾌해한다.
나는 내가 만든 소리에서 안정을 찾아가는지 모르지만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는 불안을 떠안아야 한다. 원치 않은 소음을 피해서 온 사람들은 또다시 그곳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 도시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귀를 막고 다닌다.
길거리에 수많은 행인들이 귀에 꽂고 귀를 덮고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사람들이 세상이 들려주는 소리가 아닌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소망이 반영된 행동이다. 듣지 않을 권리가 사라진 세상에 사람들은 귀를 닫는다.
로베르트 발저가 살던 그 시절은 지금처럼 소음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가 지금 현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짧은 산문 형태의 일기 같은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는 책이다.
글의 형태로만 보면 [불안의 서]와 비슷하지만 그 색깔과 의미와 깊이는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을 배수아 작가가 번역을 했다는 점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는 읽고 싶어서 찾아 읽은 책은 아니었다. 처음 가입한 독서 모임의 첫 토론 주제가 이 책이었다.
독서 모임
독후감을 쓸 생각도 없었지만 이 모임은 특이하게도 토론 전까지 독후감을 제출해야만 참석이 가능하단다. 특색 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짧게 독후감을 써봤다. 그래서 이 모임에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책이 생각처럼 잘 읽히지 않는다. 작가의 이력을 찾아보니 발저도 페소아와 다소 비슷한 이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가 쓴 글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비운의 작가였다.
[산책자]는 나에게 가독성이 좋은 글은 아니었다. 말년에 그의 정신발작 때문일까? 글이 다소 정신없는 느낌을 준다. 번역의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배수아 작가의 [불안의 서] 번역은 너무도 매끄럽고 자연스러웠기에 [산책자]도 기대를 많이 했다.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실망도 적지 않았다.
아쉽지만 [산책자]의 번역은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원작의 문체와 느낌을 살리지 못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로베르트 발저의 평판과 글에 대한 평론들이 극찬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번역이 그것들을 깎아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뭐 번역가도 많이 번역을 해봐야 발전하는 법 아니겠는가? 번역가를 잘못 만난 원작자가 불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