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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20. 2024

순수한 이성과 보편적 욕망 사이

[헤겔] 피터 싱어 - 두 번째 -

“나의 준칙(이성)이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나 또한 바랄 수 있도록 오직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 칸트의 '정언명령'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원제 Groundwork of the Metaphysic of Morals] 중에서 -


보편적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하면 다수가 동의하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이 동의와 공감은 표면적이고 대외적인 것이다. 이건 모든 사람들이 그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위선과 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보편적임을 의미한다. 그것의 또 다른 함의(含意)는 우리가 내면과 외면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감을 의미한다. 칸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윤리를 의무화시키고자 했다.


“욕구(욕망)이라는 것은 직접 그 무언가를 욕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안출(案出, 만들어지는)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구가 생겨남으로 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안출 된다.”


- 헤겔의 [법철학, 원제: 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 중에서 -


그리고 헤겔은 그 이유가 개인(특정한)의 욕망 때문이며 이 욕망은 현실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피할 수 없이 끊임없이 마주해야 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했다. 욕망은 우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환경과 타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산업자본주의 세상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먹고 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의 핸드폰의 메일과 각종 앱에서는 재화와 서비스의 유혹이 끊임없이 날아든다. 눈과 귀를 닫지 않고서는 이 유혹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욕망이 사라진 곳은 (순수) 이성만 존재한다


하지만 칸트는 인간이 만약 이런 욕망이 모두 사라진 환경 속에 있게 된다면 순수한 이성만 남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순수 이성은 선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봤다. 성선설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칸트의 두 가지 큰 이론[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었다. 여기서 부가적으로 설명하자면 쇼펜하우어는 욕망이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이라고 봤다. 욕망을 쫓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금욕을 주장했고 이성은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는 성악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

“많은 욕망은 양육, 교육,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우리의 환경 일반에 의해 형성된다. 그 기원이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우리가 이 욕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욕망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욕망에 따라 행동할 때 자유롭지 않다”


- 피터 싱어 [헤겔] 중에서 -


헤겔은 자유란 의무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다. 산업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이 득실거리는 세상을 구축하고 자유롭게 그 욕망을 쫓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지만 이건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프레임)을 선택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프레임에 갇힌 채 태어났고 만약 이것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다른 별로 가야 한다. 아님 공산주의로 가던지 하지만 그곳은 더 지옥이다. 그곳은 소수의 욕망을 위해 다수의 욕망(최소한의)을 제거하는 수준이다.


칸트는 그래서 윤리도덕을 의무로 격상시키고자 했다. 인간이 가진 순수 이성을 강제로 장착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모순이라고 본다. 인위적이지 않은 환경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순수 이성을 교육과 제도화를 통해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칸트의 다소 추상적인 철학 개념들을 현실적인 정치와 제도 속에서 현실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의 철학이 실용적인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을 연상케 한다.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문서화 체계화 시키며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헤겔이 칸트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철학자라고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가 교과 과정에서 철학을 윤리 수업으로 배운 것은 다 이 때문이다. 사실 윤리는 철학의 아주 작은 한 범주에 불과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윤리' 과목으로 배운 것은 이것이 우리 사회와 현실에 가장 유용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의 철학과는 우스개 소리로 '칸트학과' 불린 정도였다. 뭐 윤리 수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칸트’인 것도 이 때문이다. 나도 과거 중학교 고등학교 윤리 수업하면 ‘칸트’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헤겔과 칸트의 연결

“정부는 철학을 그들의 정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학자는 그것을 하나의 장사거리로 삼고 있다”


-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원제: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중에서 -


우리가 학교(의무교육과정)에서 공부하는 것들은 앞으로 사회로 나가서 그 시스템과 프레임에 순응하기 위한  배움일 뿐이다.  그것은 아주 좁은 범주의 배움일 뿐이다. 진정한 배움은 그 이후에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독학에서 비롯된다.

야마구치 슈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기 위해 독학을 한다. 독학의 목적은 새로운 앎보다도 새로운 질문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이다”


- 야마구치 슈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중에서 (서평참조) –


이제 답을 찾는 시대는 끝났다. 정답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제는 어떻게 질문하느냐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당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나올 수 있으며 이 범위는 깊이 보다는 그 넓이에 의해 여러 영역을 연결시키는 과정 속에서 도출되는 그런 질문이어야 한다. (물론 넓고 깊다면 더 심오한 질문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


지금 내가 이 책 저 책에서 떠오른 내용들이 짬뽕이 되면서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쓰면서 생겨나는 의문들이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맹신한다.


현실 속 진정한 자유란…


칸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가져야 할 생각의 방향과 태도를 이론화하고 개념화했다면 헤겔은 이것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의 철학은(역사철학, 법철학, 종교철학, 정신현상학등)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는 우리가 사회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철학을 이런 여러 가지 현실적인 요소들과 접목해서 사회를 좀 더 온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철학이었다.


현실의 사회에서 자유란 에덴동산에서 뛰어노는 아담과 이브의 그런 모습이 아니다. 이젠 수많은 속박과 유혹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해 버린 세상에선 자유에 의무를 짊어지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문명(경제, 산업)의 발전을 지속하면서 인간이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니 막을 수 없는 인간의 타락을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해야 옳은 말이다. 그건 문명의 발전 속도를 우리의 인식 변화가 절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법과 규범과 제도는 현상의 변화보다 느리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익숙한 것과 결별하길 두려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순수한 이성을 되찾을 수 없기에 보편적인 욕망을 순수한 이성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선을 지향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태초의 순수한 이성이 각자 조금씩은 변형된 형태지만 우리의 마음속 깊이 곳에 (선한) 양심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이성과 보편적 욕망 사이


대중 앞에서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연설하고 연기하며 표를 얻고 인기를 얻고자 함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개인적인 물질적 풍요과 정신적 쾌감 때문 아니던가 하지만 풍요를 누리고 쾌감을 즐기는 모습은 절대 대중 앞에 드러내지 않는다. 이성 뒤에 욕망을 감추고 있다. 그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부정하고 부인할 수도 없다. 그건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보긴 싫지만 나는 누리고 싶은 것이다. 모순이다.


그래서 나는 칸트가 말하는 ‘순수한 이성’ 보다 ‘보편적 욕망’이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지금은 순수 이성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으며 그것도 본질은 남아 있되 표현(보이는)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순수 이성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욕망(다수가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그런)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피터 싱어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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