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가에게도 인간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수동적인 저항을 유지했다. 국가는 나를 오직 행동하는 개체로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하지 않는 이상, 국가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간밤에 대한민국 역사에 또 하나의 치욕의 흔적을 남겼다. 다행히 그 흔적이 6시간 만에 수습되고 크게 번지지 않았다. 하늘의 도우심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아직 하늘이 한국을 버리진 않은 모양이다.
계엄군 국회 난입
절제하지 못한 그릇된 감정이 이성을 잃고 상식을 깨뜨리고 폭주하고 말았다. 한 나라를 이끄는 군주가 개인이 되면 벌어지는 일이다. 5000만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가 그 5000만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개인의 사욕과 감정으로 나라를 좌지우지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사건이었다. 민심을 위한다는 그의 말은 도대체 어디서 들은 민심인지 도무지 출처를 알 수가 없다. 꿈속에서 다른 민심을 듣는 것인가? 현실의 민심에는 눈과 귀를 닫고 간신배들의 달콤한 말에 놀아나지 않고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가 군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국민이 직접 뽑은 군주였기에 그 죗값을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그건 국민이 무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가식과 위선으로 눈과 귀를 속인 그의 가면극에 놀아났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아카데미 남우주연감이다. 완벽한 가면을 만들었다. 하지만 권력을 얻고 난 후부터 그 가면이 점점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젠 민낯이 다 드러나 버렸다.
절대 권력을 가지려는 자는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시간 글을 쓰면서 되도록이면 정치와 관련된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서 동떨어져서 글을 쓰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 느껴진다. 글쟁이는 나에서 시작해서 타인, 그리고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언론과 문학은 그 시대상과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가짜 기사이고 판타지 소설이다.
사실 요즘은 뭐가 허구이고 뭐가 진실인지 헷갈린다. 문학이 허구를 가장해 진실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론이 사실로 위장하고 허구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국민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현상을 보고 그 안에 숨은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둘 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각을 키우려면 비판적 사고에 상상과 통찰이 더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이성적인 상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상상을 체계적인 글로 표현해야 때문이다. 문학이 다른 예술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적잖은 시간 온라인 플랫폼에 글을 쓰면서 나의 그런 생각들을 표현했다. 쓰면서 성장하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나의 글은 개인적인 사유의 과정임으로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렇게도 때론 저렇게도 생각해 보면서 생각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나의 사고방식이 누군가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고 누군가는 불편할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 특정인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쓰지만 다만 이젠 읽는 자들도 생각하며 쓰는 것뿐이다.
온라인도 검열의 공간
언제부터인가 나의 글도 감시와 검열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론 글을 쓰면서 환희와 두려움이라는 아주 이질적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만약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쓸 때면.글을 오랜 시간 쓰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글 속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 나는 인문, 교양 분야 크리에이터로 등록되어 있다. 이건 내가 등록한 것이 아니다. 플랫폼의 AI 시스템이 나의 글을 성향을 파악하고 정한 것이다. 인문, 교양은 인간의 삶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대와 사람과 사회에서 벗어나서 이야기를 쓸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같은 사회 구조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글을 쓰는 문학인 혹은 언론인이 해야 할 일이자 그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허구로 언론은 사실이라는 재료를 쓰는 것만 다를 뿐이다. 언론사에서 문예지를 발간하는 이유는 그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무명의 글쟁이지만 나는 누구나 글로서 자신의 드러낼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실제 현실은 그와 다를지라도 말이다. 말과 글을 자신의 생각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없는 나라는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입 닥치고 노동력만 제공하고 세금만 내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누구를 위해서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그런 국민이 되어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생각은 나만 드는 것일까.
비상 계엄 (24.12.0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 [계엄사 포고령 1호] 24.12.03 –
간밤에 충격적인 뉴스 보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국회 위로 군용 헬기가 날아다니고 장갑차가 시내를 활 거하고 군인들이 국회로 난입하는 장면은 작년에 이맘때 봤던 영화 [서울의 봄]을 현실에서 다시 보는 듯했다. 마치 내가 태어나던 시절의 군부 독재 시대가 다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와 경악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가 한밤 중에 발표한 계엄 선포문에서 말하는 반국가 세력 중에 왠지 모르게 나도 포함된 것 같았다. 왜냐 나는 [반국가 세력 누구인가]에 관한 칼럼을 썼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억압과 공포 속에서 글은 더 간절해진다
페소아가 살던 시기도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무너지고 제1공화국이 수립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는 군사 쿠데타는 더욱 심해져서 결국 군사 독재의 시작되었다. 그가 이명(異名)으로 글을 쓴 것은 어쩌면 자신을 최소한의 안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이명들의 글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었고 쿠데타와 군부 독재를 비판했다. 그의 숨겨둔 수많은 원고 속에서도 그의 사회적 시선과 정치적 시선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인이지만 한국의 일제강점기 때의 시인들처럼 그렇게 함축적으로 쓰진 않았다. 그의 글도 추상적이고 함축적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산문 형태의 시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그래서 비록 포르투갈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더라도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난 후엔 그 이해와 공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더라. 그의 글이 포르투갈의 국보로 지정(2019년)된 것은 그의 글이 포르투갈의 시대상을 품고 그 시대의 국민 정서를 아주 잘 드러내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군부 독재(1926~1974)
“이제는 더 이상 사형으로 인간을 처벌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기껏해야 국가는 나에게 불쾌감 정도를 선사할 수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폭력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페소아는 폭력 앞에 비록 능동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지만 폭력의 뒤에서 두려움에 글을 쓰며 피동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것이 문학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페소아를 존경하고 사모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매일 아침마다 읽는다. 그리고 그는 나의 문학적 멘토가 되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1988 ~ 1935)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나는 정신을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더욱 깊이 내 꿈으로 몰입하여 살아간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인간은 폭력에 무력하지만 폭력으로는 절대 인간의 정신을 굴복시킬 순 없다. 그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내가 오늘 아침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 된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폭력으로 굴복시키려는 건, 그것만이 그들의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자는 그래서 무서운 법이다. 그래서 인간의 흑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는 분쟁과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 분쟁과 전쟁을 주도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명분은 언제나 국민과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 말한다. 그런데 왜 자국과 타국의 국민을 죽여야 하는 일이 국민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모순이다.
무력과 무력 사이
무력(武力)과 무력(無力) 사이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을 둘러싼 비슷한 욕망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국민에게서 권력을 얻었지만 국민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그 권력이 무력이 되었다. 배신이다. 배신당한 국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력(無力) 항쟁이다. 국민까지 무력(武力)으로 맞서면 이건 권력의 무력(武力)화에 명분을 줄 뿐이다. 지금의 세계의 최고 권력자들은 세상을 날려버릴 선택까지도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과학의 힘(Nuclear)은 그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쥐어주었다.
“내 행동을 늘 내가 통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게 진실이다”
-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인간은 절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이성은 대부분의 경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하지만 이성의 가면이 벗겨지고 나면 더 이상 이성적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럼 폭주(暴走, 暴酒?!)하게 된다. 다 드러났으니 이판사판이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다행히 폭주는 잠시 멈추었다. 비상계엄이 철회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이다. 오늘 아침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감사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운 사실을 이렇게 느끼게 된다. 다시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계속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