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을 존재에 대한 학문과 구별하여 일컫는 이름으로 풀이한다. 현상과 존재의 구별에 친숙한 사람에게는 이렇게만 풀이해도 충분하다”
- 피터 싱어 [헤겔] 중에서 –
현상과 존재에 대해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볼 때 두 가지로 인식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상과도 같다. 이것은 인간 만이 가진 유일한 능력이며 이것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체험할 수는 없다. 이건 논리적으로 모순이면서 또한 과학적으로 증명 불가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절대 (동시에)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 (1770~1832)
헤겔의 철학을 드려다 보다가 가장 하이라이트에 진입했다. 헤겔 철학의 진수는 그의 철학 저서 초반에 나타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뒷부분에서 이야기한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더라면 헤겔은 그저 현실 사회 정치에 타협한 철학자로만 생각하고 그를 평가 절하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왜 칸트의 대를 이은 위대한 철학자인지는 [정신현상학 : 원제 : Phanomenologie des Gesistes](1807년)에서 드러나는 듯하다.
이 책에서 헤겔은 칸트의 관념론을 좀 더 구체화 체계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칸트의 관념론은 서양 철학의 일대 변혁을 일으킨 개념이었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철학의 끝없는 논쟁을 잠시나마 통합시켰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회와 맞먹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 것이 바로 칸트였다. 그의 관념론은 기존에 인간의 외부 대상을 바라보면 논하던 인간의 사고를 인간의 안(뇌)으로 옮겨놓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앎은 우리가 진리를 파악하는 도구에 곧잘 비유된다고 헤겔은 말한다. 도구에 결함이 있으면 우리가 손에 넣는 것은 오류에 불과할 것이다"
- 피터 싱어 [헤겔] -
인간은 결국 자신이 가진 뇌의 프레임 안에 갇혀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관념론의 핵심이다. 그 프레임의 크기는 자신이 앎의 크기에 비례하고 그 앎에 결함이나 오류가 있다면 내가 아는 진리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의 앎, 즉 세상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말하는 인간의 프레임 자체도 인간의 기준일 뿐 만물의 기준이 아니다.
인간이 세계를 인지하는 것과 박쥐나 돌고래가 인지하는 세계는 다름은 자명하다. 인간이 보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를 다른 생명체는 인지하고 볼 수 있음을 간과했다. 하지만 이 영역은 인간이 인지할 수 없기에 증명될 수 없고 그저 상상과 통찰에만 의존한다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 이건 우리가 좋아하는 팩트가 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과거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그것을 팩트로 만드는 노력들이 상상이 현실에서 증명되는 역사를 써왔다.
문명과 의식의 발전은 언제나 상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의 원천인 문학과 예술이 소외받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뭐 모두가 아이처럼 상상하면 경제와 사회는 누가 돌리겠는가… 물질세계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서론이 길었다.
피터 싱어 [헤겔]
헤겔은 이런 칸트의 관념론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는 인간의 관념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현상’과 ‘존재’이다.
- 현상 :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모양과 상태.
- 존재 : 현실에 실제로 있음, 또는 그런 대상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사전에는 위와 같이 두 단어를 정의한다. 헤겔의 두 관념을 설명하기엔 너무도 부족한 정의이다. 헤겔이 말하는 현상이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대상이다. 시력 1.0으로 보고 있는 대상과 사물이다. (물론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기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시력과 새의 시력은 다르며 새의 시력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남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새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UV) 영역의 빛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높은 하늘에서도 땅 위의 작은 곤충을 찾아서 사냥할 수 있다. 그럼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인간이 보는 현상은 인간의 눈(시각, 시력, 시야) 갇혀 있다. 이것이 관념론의 핵심이며 이것이 인간이 보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가 자외선으로 사물을 보고 인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이건 지금 내가 설명해서 알게 되신 분도 있으면 이미 알고 계신 분도 있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다. 우리는 새가 자외선으로 보는 세상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는 있다. 왜냐 우리는 자외선의 성격과 역할을 지식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상상의 이미지로 모니터에 시뮬레이션으로 돌려 볼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새의 뇌에 찍힌 영상과 동일한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건 새의 시신경에서 뇌에 전달되는 동안 그리고 어떤 형태로 뇌에서 재생되는지는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인식할 수가 없다. 오로지 인간의 뇌의 한계에 갇혀서 이해하고 인지한다.
보는 달과 밟는 달 사이 (시각적 해석)
이걸 좀 더 넓은 거시적인 환경에서 설명하면 좀 더 쉽게 와닿을 수 있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는 달과 확대한 망원경에서 보는 달 그리고 직접 탐사선을 타고 달에 가서 발을 딛고 보는 달은 모두 다르다. 여기서 당신은 무엇이 현상이고 존재(실재)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혹자는 직접가지 않고 멀리서 본 것은 현상이고 직접 가서 본 것이 존재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존경한다. 내가 적어나갈 글의 한 수 앞을 내다보신 명석하고 유연한 뇌를 가지신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구에서 보는 달과 달에서 보는 달
우리는 지금 현상과 존재를 구분 지어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적이다. 달의 현상과 존재는 관찰자에 따라 계속 변하는 것이다. 설사 당신이 달에 발을 딛고 달을 보다고 한들 그것이 달의 실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럼 달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그 안에서 볼 때의 달은 달이 아닌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그것도 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현상과 존재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정확히는 동시에 경험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를 인식하면 다른 하나는 인식 밖으로 사라진다.
사랑의 현상과 존재 (인문학적 해석)
그럼 이것을 인문학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잘 따라오시길 바란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영역 넘기 사고의 일환이다. 오랜 시간 나의 글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연결시키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을 아시리라.
상상을 해보자. 당신이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이성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사랑이라는 현상이 그 대상을 통해 당신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 현상은 그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 즉 외모와 말과 행동과 향기 그리고 목소리(음향)의 총체적인 결과이다. 만약 누군가를 멀리서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면 나는 이건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성적 충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 신체적 외모, 즉 유전자가 생각하기에 건강하고 우월한 신체적 유전인자를 복제할 수 있겠다는 아주 단순한 동물적 감각으로 사랑을 오인한 것이다. 이건 현생 인류(사피엔스)가 5만 년 동안 축적해 온 유전 데이터가 뇌에서 반응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란 총체적인 과정의 결과물이다. 사랑은 현실에서 함께함으로 전제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는 많은 시간을 함께 있고 싶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사회가 만든 제도에 편입되어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을 강제화 시키는 구속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함께 하는 시공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상대에게서 느꼈던 사랑이라는 현상은 사라지고 상대의 존재(실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계속 사라지는 사랑을 찾아 떠나는 남녀
문제는 사라진 현상은 다시 절대로 똑같은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설렘과 두근거림은 다시 오지 않는다. 존재를 받아들이는 순간 현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랑이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니겠는가? 사랑은 현상일 뿐 존재가 없다. 그런데 이 현상이 다시 재현되는 때가 온다.
그건 그 상대라는 존재가 소멸되고 난 뒤이다. 만약 그 존재와 사랑이라는 현상을 경험했다면 그 존재가 소멸(죽음)을 맞이하면 과거의 현상을 추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감사와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아니던가? 곁에 항상 있는 존재에겐 과거의 그 현상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현상과 존재를 동시에 경험할 수 없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사랑했던 존재가 있어도 다시 사랑할 현상(대상)을 찾아 헤매게 된다. 외로워서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어도 외롭다. 모순이다. 우리에게 감사 훈련이 필요한 이유이다.
미시와 거시 사이 (과학적 해석)
저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설명을 추가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떠올렸던 생각을 저자도 같이 하고 있었다. 이건 과학에서 가장 큰 모순인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과학은 특히 물리학은 언제나 존재(실제)와 현상을 일치시키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물의 존재(실제)를 인간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식과 개념으로 증명하는 것이 물리학이 하는 역할이다. 물리학은 세상 모든 만물의 실체와 이치를 증명하는 학문이다. 다만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바로 실체(원자 구성과 조합)가 같은데 그 실체가 생명이 있고 없고 의식이 있고 없고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과 존재의 일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이 탄생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미시의 세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빛의 영역, 전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인간이 눈으로 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 신기한 세계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 없다. 볼 때는 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안 볼 때 파동으로 존재하는 빛의 세계를 기존의 물리학(고전)으로 설명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을 깨닫는다. 모든 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이상한 존재의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관찰자의 있고 없음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 이건 앞에서 설명한 시각적, 인문학적 설명과 공통되는 부분이다. 내가 존재에 닿으면 (이전) 현상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리고 그 상태가 현상이 되어버렸다.
우물 안의 개구리 (사회학적 해석)
그럼 이제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우리의 삶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는 인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한민국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보다는 당연히 더 많이 알겠지 하는 것이 중론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한국을 떠나보시라. 그런데 이건 며칠 동안 다녀오는 여행이 아닌 한국 밖에서 최소 3년 이상의 거주를 하며 그 나라의 생활과 문화와 인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 그럼 당신이 보는 한국이라는 현상은 바뀌게 될 것이다.
이것이 관조(觀照)이다. 관조는 당사자가 아닌 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기존에 당사자에서 보던 것과 타자가 되어 보는 두 가지의 관념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헤겔이 생각해 낸 또 하나의 걸작인 변증법(정반합의 불편한 성장)[서평참조]이다.
기존의 관념과 새로운 관념이 충돌하면서 생겨나는 새로운 관념이다. 헤겔은 이것을 변증법적 사고의 성장과정이라고 봤다. 이건 아주 어렵고 또한 불편한 과정이다. 왜냐 이건 계속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경향은 더욱 짙어진다. 노후화된 세상은 변화에 더뎌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하지만 사는 곳, 보는 것, 관계하는 사람들이 바뀌면 인식하는 것이 바뀐다. 그리고 이건 일정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바쁘다. 그래서 이것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컨설팅 업체를 들이고 심리상담사를 찾는 이유 아니겠는가. 우물 안에서는 우물을 볼 수 없는 법이다. 우물 밖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 밖에 없다. 만약 당신이 우물 밖을 나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다만 당신이 우물 안에서 우물 밖의 사람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건 더 어렵다. 나이가 들면 쓴소리는 듣기 싫은 건 누구나 같다. 내 삶이 만든 철학 속에 갇혀 산다. 죽을 때까지… 칸트의 관념론을 철저히 실천하며…
"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내부 사정을 어떻게 제대로 알겠어?"
이 말은 이제 맞지 않다. 그 안에 있으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관계 당사자이기 때문이고 이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의 현실적인 인식…(중략) 즉 앎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곧 실재를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 피터 싱어 [헤겔] 중에서
책을 읽고 현상과 존재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서술한 장황한 이 글은 책이 던져준 몇 가지 문장 속에 품고 있는 앎(깨달음)이 만들어낸 시도였다. 이 시도는 철학적인 앎이 다른 영역과 연결되면서 더 큰 앎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앎이 연결과 융합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원자핵에 쏘아진 중성자 탄과도 같다. 원자를 깨뜨리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터져나가는 형국이다. 나는 이것을 경험할 때 환희를 느낀다. 지금 이 순간 한 편이 글이 완성되면서 환희의 마지막 순간을 경험한다. 이것 때문에 계속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럼 관찰하고 귀 기울이고 더 읽게 될 것이다.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면서 내 앞의 놓인 사물과 존재와 관계를 계속 관조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것이 보인다.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게 된다. 이것은 마치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안드로메다 같은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당신의 정신 안에 모두 다 있다. 다만 찾지 못하고 찾는 길을 모를 뿐이다. 문득 페소아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이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