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을 수 있지
외동이 아니고 형제가 한 명 이상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모든 자식을 공평하게 사랑할까?”
나 역시 그런 고민을 했었고, 아직도 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고민을 하진 않는다. 우리에겐 지금까지 축적된 수없이 많은 심리적 데이터들이 있다. 우리는 엄마가 차마 감추지 못한 은은한 태도 차이를 예민하게 인지하는 능력이 있다.
일단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나에겐 3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내성적이고 무뚝뚝한 나와는 달리 외향적이고 살가운 성격의 남자애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바쁘셨다. 자식 둘을 어려운 시기에 키워내느라 맞벌이를 하셨다. 덕분에 어린 우리는 할머니의 손에 길러졌다. 어릴 적의 나는 부모님보다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모든 옛날 분들이 그러신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옛날 분들이 그러하셨듯이 할머니는 아주 확고한 ‘남아선호 사상 주의’를 가지고 계셨다. 나는 누나였지만 동생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으며, 동생과 다투는 날엔 나만 호되게 혼이 났다.
매일 밤 할머니는 동생을 끌어안고 잤는데, 혼자 자는 게 너무 무서웠던 나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나도 같이 자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혀를 차며 자리를 내어줬다. 옆자리가 아닌 발치에. 할머니의 발과 동생의 발을 보며 나는 설움을 느꼈다.
하루는 옆집 남자아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 아이와 나는 한 살 차이였기에 나름대로는 자존심이 걸린 꽤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러다 우리 할머니와 옆집 할머니에게 들켰다. 그때에도 혼이 나는 것은 오로지 나였다. 우리 할머니마저 옆집 남자아이의 편을 들었다.
또 할머니는 동생은 부엌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중요 부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나는 ‘누나’여서인지, 아니면 ‘여자’여서인지 부엌에 반드시 출입해야만 했다.
일주일에 몇 번 오는 초코 우유도 모두 동생의 몫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냉장고에 방치된 하얀 우유만 먹어야 했다. 지금은 너무 달다고 쳐다도 보지 않을 그 초코 우유가 그 당시엔 왜 그리도 맛있어 보이고, 탐이 났는지. 내게 초코 우유가 허락되는 날은 동생이 집에 없는 날 뿐이었다.
어릴 땐 그런 차별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내게 그것의 부조리함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나조차도 부모님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나는 자라났고, 세상에 대해 배웠고,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것이 ‘남녀차별’에서 비롯된 ‘학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술을 마시면 할머니를 원망한다. 누군가는 왜 그 머나먼 과거에 묶여있냐고 하지만, 내 정서와 성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의 나는 사랑받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했다.
지금의 약간 우울하고 모난 구석의 내가 할머니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린 날의 상처와 위축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되지 않는 어떤 부분으로 남았다.
나는 애정결핍이었고, 타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늘 불안한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도 자라났다. 내가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는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지난날의 설움 때문인지 나는 강박적으로 부모님의 공평한 사랑을 원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동생과 ‘같은 양의’ 사랑을 달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이잖아.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럼 할머니와 달리 공평한 사랑을 줘야 하는 거잖아.
나는 어쩌면 부모님에게 매 순간을 저울질을 하며 신중하게 행동하길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민감한 나는 아주 조그마한 차별이 느껴질 때마다 강력하게 항의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별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내 오랜 염원이었다. 깊은 상처로 인한 방어기제였다.
물론 부모님이 동생의 학업을 위해 나를 희생시키거나 매사에 무조건적인 양보를 해야 한다는 등의 구시대적인 요구를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주 미세한 차별을 느꼈다. 나와 동생을 대하는 말투, 시선, 실수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 집안일 분배의 차이 등이 묘하게 나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대놓고 행해지던 할머니의 차별보다 은연중에 새어 나오는 은은한 엄마의 차별이 나를 더욱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최후의 믿을 구석까지 무너진 기분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1순위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엄마는 말했다. 나와 동생을 모두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게 회피처럼 느껴졌다. 엄마로서 쉽사리 인정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머리로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다만 마음이 서운할 뿐.
우리는 첨예하게 대립했고, 몸살이 날 정도로 감정 소모를 했다.
싸움에 지친 나는 마침내 그저 입을 다물고 속으로 삭히기에 이르렀다.
원망이 올라오면 덮었다. 원망이 또 올라오면 또 덮었다. 원망이 또다시 올라오면 또다시 덮었다.
작은 불씨는 속에서 곪았고 더 큰 상처와 흉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30대가 되었다.
사실 그전까지의 나는 물질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징그럽도록 커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다니.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엄마의 앞에선 아이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난 오늘부로 모든 갈구를 접고 인정을 시작하려 한다. 엄마는 인정하지 못한 사실을 나는 인정하려고 한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동생을 더 사랑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겠지만, 동생은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이다.
차라리 인정을 하고, 포기를 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엄마도 사람이니까. 부모와 자식 관계도 결국 인간관계이니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
이렇게 다짐하고서도 또 어느 날은 견디기 힘들 만큼 원망스럽겠지만 노력하다 보면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게 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어떤 부모는 모든 자식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기도 한다. 부모는 끝내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아래 자식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엄마 또는 아빠가 나를 다른 형제보다 더 사랑하는지, 덜 사랑하는지.
그러나 슬프게도 그건 우리가 바로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마음이 가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돌릴 수 없을 테니까.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대입해 가족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저 우린 조금 안 맞고, 성향이 달라 거리가 있는 것뿐이다. 같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독 더 코드가 맞지 않는 친구가 있듯이.
차별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만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상처의 규모를 반으로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며 버티자.
비록 나의 부모님은 나를 동생보다 덜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최고로 사랑해줄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그땐 내가 1순위인 거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부모님들에게 바라건대, 혹여 마음이 덜 가는 자식이 있더라도 너무 티를 내진 말아 주세요.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세요. 어쩌면 자식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