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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같은 사람

만나면 반가운

by 당근

우리 학교 운동장은 트랙에 야자매트가 깔려있어서 걷기에 불편하다. 그래서 관사에서 도보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인근 고등학교에 가서 자주 걷는다.


오늘 아침에는 이웃 학교 선생님과 산에 가기로 약속해서 5시 20분에 등산할 준비를 갖추고 1층으로 내려갔더니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톡으로 비가 와서 못 가겠다고 알리고 집에 올라왔다가 6시 전쯤 비가 그치는 걸 보고 다시 집을 나섰다. 6시 좀 넘어서 나가면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a기사님을 만날 텐데 오늘은 못 만났다.


고등학교 운동장을 느리게 달리기와 빠르게 걷기를 반복하며 10바퀴를 돌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삼거리 골목에서 a기사님을 만났다. 큰 도로에서 학교 쪽 골목길로 걸어오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a기사님이 한쪽 손을 위로 흔들며(이때까지 한 번도 손을 흔든 적이 없었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이, 운동 다녀오세요?"


"예"


대화 끝. 그리고 각자 가던 길을 걸어갔다. a기사님은 6시 좀 넘은 시간에 관사 분리수거장을 정리하고 집에 갔다가 우리 학교 세콤을 해제하러 가는 길일 것이다. a기사님은 칸트 같은 사람이니까.


a기사님은 80대 초반의 할아버지로 우리 학교 출입문 개폐 전담원이다. 아침 7시경 학교의 문을 열고 오후에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문단속을 하신다. 작년까지 우리 학교 청소일을 하셨던 허여사님 보다 서너 살 아래인데 예전에 공무원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허여사님께 들은 적이 있다.


a기사님은 4시 20분이 되면 1층부터 4층까지 파란색 큰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문단속을 하면서 복도나 교무실의 비워지지 않은 휴지통을 비우며 올라오신다. 진로실에도 청소하는 학생이 배정되어 있고, 또 내가 버리면 되니 하시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한 번씩 들어와서 진로실 휴지통도 비워주신다. 한꺼번에 버리려고 모아둔 종이박스가 치워져 있는 날도 있다. a기사님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 내가 미리미리 버려야만 한다. 출입문 개폐 전담원이라 휴지통 비우는 일은 안 하셔도 된다. 학교에 청소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고 a기사님은 문단속만 하셔도 되는데 그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a기사님과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자주 마주친다. 약간의 수고비를 받고 관사의 분리수거장 정리도 해주시는 a기사님을 6시 좀 넘은 시간에 운동 나가다가 보면 꼭 만난다. 가을에 아침 일찍 학교로 산책하러 가다 보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낙엽을 쓸고 계시는 a기사님을 만나기도 하고, 눈 내리는 날은 어김없이 교정의 눈을 쓸고 계시는 a기사님과 마주쳤다. 작년 겨울 눈이 발목까지 쌓인 날은 주말 아침인데도 넉가래로 중년 남성(나중에 a기사님께 같이 눈 치우던 분은 누구였냐 물었을 때 흐뭇한 표정이라고 아들이라고 말함)과 함께 눈을 치우고 계시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또 어느 겨울 깜깜한 새벽에 이웃 고등학교 운동장 트랙에서 둘이 마주친 적도 있는데 서로 인사만 나누고 더 이상의 말은 안 했지만 a 기사님도 나처럼 '아니, 이 추운 날에, 이 시간에' 그런 얼굴이었다.


나는 a기사님을 만나면 반갑다. 오래 일하시며 건강도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5년째 보다 보니 이제 아침에 학교에서 만나면 "일찍 오네"하며 a기사님이 반말로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오늘은 또 존댓말을 하셨군) 말씀이 별로 없으셔서 긴말을 나눈 적은 없다. 어느 날부턴가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a기사님이 나를 보면 반가운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내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a기사님을 만났을 때의 내 표정도 a기사님 표정과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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