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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요, 당근씨

저녁 얻어먹으러 다니느라 배추 못 심고 당근 심은 이야기

by 당근

감자를 캔 자리에 배추를 심을 생각이었다. 개학하고 정신없이 지내다 동네 텃밭 배춧잎들이 번져가는 걸 보고서야 올해도 또 배추 모종하는 시기를 놓쳤구나 싶었다. 그래도 늦으면 늦은 대로 작년처럼 좀 작은 포기를 얻으면 되니 배추를 지난주에 심을 작정이었다.


인제에는 4일과 9일에 인제장이 서고, 2일과 7일은 원통에 장이 선다. 지난주 월요일이 2일이라 원통장에 가서 배추 모종을 살 생각이었는데 퇴근 후에 A가 자기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A의 집은 학교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인제의 가게들은 저녁에 일찍 문을 닫는다. 오일장이라고 예외는 없다. A의 집에 다녀오면 배추 모종 사는 걸 포기해야 된다. 그전에도 A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피곤하다, 차 고쳐야 된다며 거절한 적이 있었다(감히). 실제로 피곤했고, 딱 그날 차를 고쳐야 했지만 거절하면서도 미안했다. 배추야 다음에 사면되지. A의 차를 타고 따라갔다. 나보고 누워있으라고 하고(늘 피곤해하고, 특히 월요일은 원주에서 오느라 더 피곤한 모습을 보여줬더니) A 혼자 부엌으로 갔다. 몇 분 후 저녁이 뚝딱 차려졌다. 능이소고기 미역국, 잡채, 육전 등등. 누구 생일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이틀 뒤 수요일이 4일이라 인제장 서는 날이었다. 그날은 꼭 배추 모종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A가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래, 배주모종이야 나중에 사면되지, 일주일 덜 자란 배추를 수확하면 되지. 또 쫄래쫄래 따라가서 볶음밥에 오이냉국을 얻어먹었다. 그날은 사부님과 셋이 저녁을 먹고(A는 나의 배드민턴 선생님이고, 그분의 남편이니 사부님) A가 직접 키운 키운 포도 한 송이, 새와 벌들이 먹고 남긴 몇 안 되는 멀쩡한 사과 중 한 알 그리고 포장된 파프리카(작년에도 여러 번 얻어먹었음, 형님네가 파프리카 농장을 한다고 했음)까지 선물로 받아서 돌아왔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어제 월요일. 9일, 인제장 서는 날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인제장으로 갔다. 인제장은 학교에서 1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인제읍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인제교육청 앞 사거리 도로에서 소양강 쪽으로 한 블록 아래에 있다. 인제장은 내가 아는 장 중에서 가장 작은 장이다. 상설 시장도 작지만 오일장이 열려도 작다. 인제 오일장은 한국관(나이트클럽 아님, 식당 이름임) 골목 사거리를 중심으로 사방 4, 50미터 이내에 열린다.


인제 오일장에는 과일 파는 곳 두어 군데, 생선 파는 곳 서너 군데, 분식 포장마차 하나, 신발 파는 곳 하나, 철물(호미, 가위, 칼 등) 파는 곳 하나, 뻥튀기 파는 곳 두 군데, 뻥튀기 아저씨 한 분, 옷 파는 곳 하나, 모종 파는 파는 곳 두 군데, 나란히 앉아 메밀 전과 떡 파는 할머니 두 분, 집에서 키워 들고 온 푸성귀를 앞에 둔 할머니 두어 분, 두부와 묵 파는 곳 하나, 반찬 파는 곳 하나, 가끔 올챙이국수 파는 분도 보이고, 운 좋은 날은 집에서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볏짚 꾸러미에 엮어서 들고 온 할머니를 만나기도 하는 그 정도의 크기다.


다이소 앞 전통시장 주차장에 차를 댔다. 처서 지나면서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지고 한낮 무더위도 좀 물러갔다 생각했는데 4시 40분경의 인제의 햇빛은 동남아 햇빛처럼 따가웠다. 가게를 접는 상인들이 보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빠른 걸음으로 모종 파는 곳으로 갔다. 모종 파는 곳 두 군데 모두 배추 모종이 없었다. 이제는 배추 모종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돌아오기는 아쉬웠다. 배추가 아니더라도 뭐라도 심고 싶었다.


다이소에 들어갔다. 다이소 씨앗 코너에는 당근 씨앗과 취나물 씨앗만 있었다. 당근 씨앗에 손이 갔다. 씨앗 포장지에 적힌 설명으로 봐도 당근 씨앗을 뿌리기에는 늦었지만 내다 팔 것도 아니니 좀 작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씨앗을 샀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당근 키우는 법을 검색했다. 씨를 뿌리고 3개월은 지나야 수확한다는데 3개월 후면 12월 9일. 늦어도 한참 많이 늦었다 싶었다. 씨를 뿌리고 나서 초반 일주일 정도는 매일 물을 많이 주고 어느 정도 자라면 솎아내고 복합비료도 주고. 아무리 게을러도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지. 검색하다 보니 당근꽃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찾아보니 하얀색 탐스러운 꽃이었다.


놀라웠다. 이 나이까지 당근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과 당근은 꽃이 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당근씨를 뿌리기에는 늦은 시기지만 그래도 어쩌면 약 400 립(천 원, 한 봉지에 약 400립의 당근 씨앗이 들어 있음)의 당근 씨앗 중에 성미 급한 씨앗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고 그 하나가 서둘러 꽃을 피워준다면 늦가을에 당근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 못생겨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빨리 씨앗을 심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알람도 안 울렸는데 5시에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보니 캄캄했다. 텃밭 가까이에 가로등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씨를 뿌릴 수도 있었지만 컴컴한 데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놀랄 사람들을 생각해서 참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6시쯤 되니 날이 훤해졌다. 감자를 캐자마자 풀이 나지 않게 멀칭해 놓은 비닐에 구멍을 뚫고 호미로 흙을 뒤집어 땅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감자를 캐고 난 세 이랑 중 한 이랑에 당근 씨앗을 뿌리고 흙을 얕게 흩뿌렸다. 그런 다음 텃밭 옆 쓰레기 분리 수거장에 상시 비치된 물조리개로 관사 야외 수도에서 물을 받아 듬뿍 뿌려줬다. 어떤 환경에서든 최선을 다해 뿌리를 내릴 당근씨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지난 주 월요일 저녁 / 지난주 수요일 저녁 / A의 선물


인제 오일장 풍경


다이소에서 산 천원짜리 당근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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