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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May 22. 2024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생각하지 않기

Intro


교회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거다. 즉, 내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걸 은혜로 불러주셨다고 믿는 거다.


그런데 기독교 엘리트 중에 이런 기본적인 기독교적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 사람들이 꼭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무시하기 일쑤이다. 나는 이만큼이나 신앙이 좋고 똑똑한데, 왜 목사인 너는, 장로인 너는, 집사인 너는 무식하냐는 거다.


물론, 기독교의 기본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모습은 전혀 똑똑하지 않다.




토요일에..?


교수이신 분들과 같이 사역을 한 적이 꽤 있다. 교수라고 한다면 엘리트에, 학교도 매우 좋은 곳을 나온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자기 반성이 없고,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교수들을 은근 많이 보았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다.


뭐.. 필드에 있는 상담사들 중에 상담학 교수들을 이론만 알고 실제를 모른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종종 보긴 했는데.. 상담학, 심리학 교수들 중에도 자기 지식에 취한 사람들 중에 사람을 모르고 사람에 대한 학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는 했다.


그 중에 한 분은 부서 부장이었다. 부장 선생님이 부서 교사 모임을 토요일에 잡아놓았기에 나도 갔었는데.. 중간에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다.


자기 친구도 사역자인데, 주일 사역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토요일에는 모임에 나가지 않는 친구가 있다는 거다. 자기는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왜 당신은 나왔냐고 한참을 비판해서 의아했었다.


부장 선생님이 토요일에 교사 모임을 잡고, 부장 선생님이 저를 불렀잖아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정말이지 그때는 교수라는 이 분의 지능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사역자는 토요일에 모임에 나오지 않고 주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역자가 그럴 수 있도록 지켜줘야지 자기가 불러 놓고 "왜 나왔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똑똑함에 취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에 열을 올리다, 이 비판이 실제로는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거였다. 사역이 있어도 어떻게 시간을 만들어서 나온 사람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가.. 하는 의구심이 엄청 들었다.





음향 시스템이..?


또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몇 개의 교회가 연합으로 수련회를 했는데.. 어떤 교회에서 음향을 셋팅해주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 교회의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따지는 거다.


"음향 준비를 이렇게 개판으로 해도 됩니까"


그러면서 음향 준비를 안한 것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참았다. 하고 싶은 말은 아래와 같았다.


아니, 당신네 교회에서 음향 셋팅을 해줬는데, 음향 셋팅이 엉망이면 당신네 교회에서 따져야지 왜 나한테 그러냐.


이것도 누워서 침뱉기와 같았는데.. 놀랍게도 이렇게 따진 분도 교수였다.




듣는 마음이 없다면..?


교수들도 자기 똑똑함에 취해 있다면 저렇게 비논리적인 비판을 하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을 해보았는데, 이건 서울대 출신이건, 카이스트 출신이건 상관 없다. 변호사건 의사건 똑같다.


최고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이 왜 저렇게 비논리적인,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무식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누구나 이러한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기 때문이다. 논리는 뒷전이 되고, 비판을 위한 논리를 만들어 이상한 소리를 하게 되는 거다. 특히, 자기 똑똑함을 드러내고 싶을 때 이런 실수가 두드러진다.


그래서 나는 토론을 할 때에는 다양한 규칙을 정해놓는다. 누군가가 토론을 위한 토론, 이기기 위한 토론을 한다면 제지한 뒤, 그 사람의 발언을 세세하게 정리하여 카페에 올린다. 토론을 위한 토론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똑똑해 보이는 것이 목적이라서 다양한 논리적 오류를 일으킨다. 이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토론에서 이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론 참여자들이 토론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토론을 위해 토론을 벌이는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교회에도 토론을 위한 토론을 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거다. 안타깝게도 사역자라서 그들의 비논리를 지적하지 못한다. 왜냐면 상처 받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사람은, 논리적 모순을

지적 당할 때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저런 사람들 때문에 사역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보통은 "듣는 마음"과 복음을 강조한다. 복음의 기초를 이해한다면, 위의 두 교수들과 같이 자기 똑똑함을 드러내려다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의 연약함을 가르치고, "나보다 남"을 배려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듣는 마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면 내 주장만 견지하다가 초등학생도 안 할 저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보다 신중하게 된다. 자기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를 줄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면, 그 말 속에 있는 모순도 좀더 발견하기 쉽기 때문이다.


(듣는 마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위의 링크, 솔로몬의 지혜 - 듣는 마음을 참조하자.)




정리하며


교수라도 복음의 기초, 복음의 기본을 잊으면 위와 같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우리 스스로의 똑독함에 취해 있다면, 나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듣지 못하고 실례를 저지를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이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5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인됨, 우리의 괜찮음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기억하자.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죄인되었을 때, 주님의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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