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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한국 교회의 상황과 처방

부교역자 대란과 그에 대한 대안

by 닥그라

Intro


비전이라는 것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상황을 모르면 구체적인 비전이 나오기 힘들다.


어느 주부의 예를 들어보자.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균형잡힌 식단을 비전으로 삼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한 끼의 식단은 그날 아침이나 점심에, 또는 전날 무엇을 먹었느냐를 생각하게 된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다이어트 중이라면 저탄 식단을 짤 수도 있고,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고 단백질 식단을 짤 수도 있다. 당뇨 환자라면 저당 식단을 짤 수도 있다. 돼지에 알러지가 있다면 돼지고기를 빼야 할 것이고, 노로 바이러스가 유행이라면 굴을 식단에서 빼야 할 것이다.


사는 곳이 한국이고 음식을 먹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한국 식단이 주가 될 것이고, 미국에 사는 한국인인데 근처에 한인 마트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미국식 식단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예산 또한 이 식단을 짤 때 중요 고려 요소 중 하나이다. 예산이 많다면 유기농 식단을 짤 수 있을 것이고, 예산이 부족하다면 타협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나라가 기근에 시달린다면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감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칼로리를 보충할 수 없어서 고 칼로리 식단이 균형 잡힌 식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달에 1만 원 밖에 식사비로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라면이나 쌀밥이라도 감지덕지일 것이다.


이렇게 균형 잡힌 식단이라는 것은 시대와 상황을 반영해야만 한다. 시대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균형 잡힌 식단"이라는 것은 공허할 뿐이다. 실제 식단을 짜는 입장에서 현실성도 없고 적용할 수도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냥 공허하게 "균형 잡힌 식단을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매일 같이 감자 튀김과 도너츠를 식단으로 내놓는다고 해도 이게 왜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닌 것인지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 비전이나 교회 비전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말씀 중심"이 목회 비전이라면, 시대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구체적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교회 가서 말씀을 들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건 말씀 중심이 아니야"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런데 심지어 말씀 중심이라는 목사들 중에 “주일 설교” 한 번 했다고 말씀 중심 비전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교회의 진단


이제 교회의 비전을 세우려면 시대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문제를 망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에 하나씩 초점을 맞출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은 아프리카의 상황까지 고려해서 공정 무역을 이야기한다. 공정 무역이라는 하나의 비전을 품고, (그것을 이 회사 하나의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손에 닿는 만큼이라도) 전 세계의 공정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다.


교회의 비전 또한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고민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망라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지점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은 무엇인가? 지금 상황에서 가장 극심한 필요 중에 하나가 바로 부교역자 문제이다. 코로나 이후 부교역자가 구해지지 않는다. 특히나 소형 교회와 중형 교회 중심으로 부교역자가 구해지지 않아서 난리이다.




처방


부교역자가 부족하다는 문제에 대한 처방은 세 가지 비전으로 나타난다.




1. 리더에 대한 비전


가장 첫 번째 비전은 바로 리더에 대한 비전이다. 신학교에서 공부중이거나 공부를 마친 사역자가 교회로 오지 않아 교회 내 리더가 부족한 상황이다. 외부에서 전도사, 강도사, 목사라는 리더를 수급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수급해야 하는가? 바로, 교회 내에서 리더를 수급해야 한다.


교회 내에서 리더를 수급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있는 평신도를 리더 훈련시켜서 세우는 방법이 있다. 다시 말해, 평신도 사역자를 키우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위기이면서도 기회일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직분자나 리더를 세울 때 아무런 기준이나 훈련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제자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선에서 끝났다.) 그러다 보니 훈련 받지 않은 리더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전도사, 강도사, 목사와 같은 전문 사역자에게 일이 과중하게 부과되는 문제도 있었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는 사역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구조로 변화하였고, 사역자들은 쉼과 가정이 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그룹 리더나 집사, 권사, 장로와 같은 직분을 받기 전에 리더 훈련을 받는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첫째, 리더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사로, 소그룹 리더로 섬길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리더란 훈련된 사람만으로 구성될 수 있게 된다. 둘째, 제자 훈련과, 그 이후의 리더십 교육으로 최소한의 검증 기간과 검증 과정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셋째, 리더로서 꼭 필요한 기술들을 리더 훈련을 통해 함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그룹이나 반을 인도하고 관리할 때 이 기술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교회에서 얻은 리더로서의 자질을 가정과 직장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넷째, 모든 일을 전문 사역자가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다섯째,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자립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어떤 리더 교육이 필요한지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도록 하자.





2. 예배에 대한 비전


부교역자가 부족하다는 것은 당장 예배 문제부터 시급하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나 주일학교 사역자가 없다면, 평신도가 주일학교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거나 주일학교 운영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위기이지만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 사실상, 주일학교라는 성경에도 없는 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일으켜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또 그 문제의 심각성을 점점 인식해가고 있기에 여기에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주일학교의 장점이다. 주일학교는 아이들에게 눈높이 성경 교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래끼리 친해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 무엇보다도 전도에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은 주일학교의 장점은 가려지고, 단점은 보완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 단점은 아래와 같다.


먼저, 주일학교 시스템은 주일학교 학생들의 부적응을 낳는다. 좀더 쉽게 말해서, 아이들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를 졸업할 때마다 교회를 탈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나 고등부 졸업 후 (대체로 우리가 대예배라 부르는) 주일 공예배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주일학교 시스템은 세대 간의 화합을 어렵게 만들고 공예배의 의미를 무너트린다. 세대 별로 격리된 예배를 드린다면, 교회 안에서도 "예수를 머리로 우리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지 못하고 교회 어른들과의 관계를 소원해지게 만든다.


세대별 맞춤 교육이라는 것도 옛말이다. 지금은 기도할 때 눈을 떠도, 설교 시간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도, 찬양 시간에 딴 짓을 해도 제어를 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도 손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교회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혼내는 것은 커녕 기도 시간에 눈을 감아야 한다고 (억지로) 가르치는 것도 부모가 기겁을 한다. 눈높이 맞춤 성경 공부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환경에서나 가능하다. 이미 예배의 자세에서부터 무너졌기에 주일학교 예배는 오히려 신앙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교회 교사가 아이들을 지도하는 게 불편하다면, 결국 예배 시간에 아이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은 부모들이 되어야 한다.


또래끼리 친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옛날에야 또래 아이들이 만나면 친해지고 그랬지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다. 20년 전에야 "같은 반이면 친구"라는 말이 통했지, 지금은 "우리 반인데 친구는 아니야"라고 말하는 세대다. 이런 세대에게 주일학교는 "억지로 관계를 이어주는" 부담스러운 시스템이 된다. (옛날에는 놀이터 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옛날에는 친구가 만나서 노는 문화였다면, 지금은 집에서 부모가 한 아이만 맞춤 놀이를 해주는 문화다. 즉, 또래가 만난다고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아졌다.) 오히려 서로 왕따 시킨다는 주장 탓에 사역자가 홍역을 치르기도 한다. 즉, 또래끼리 모아두면 친해지는 것보다 갈등이 많아지는 상황인데, 문제는 부모가 이것을 지도할 권한을 교회 교사나 사역자에게 주지 않는다는 거다.


ㄱ. 온가족 예배 + 성경 공부


이러한 상황에서의 대안은 바로 온가족예배이다. 즉, 부교역자가 없어 주일학교 운영이 안 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대안이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가 필요하다. 먼저, 영아부는 자모실을 통해 부모와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유치부와 유년부(1-3학년)은 설교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영상 시청 세대가 된 아이들에게는 성경 동화 영상만한 것이 없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매주 연속으로 보여주고 퀴즈 시간을 가지는 것이 기존의 주일학교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어린아이까지 아우를 수 있는 쉬운 설교와 찬양, 그 외의 예배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청년들에게 맞는 설교를 하면 청년들이 잔다는 거다. 장년들에게 맞는 설교를 하면 장년들이 잔다. 그런데 청장년들에게 초등부 설교를 들려주면 은혜가 넘친다. 즉, 온가족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의 수준을 초등학교 4학년도 들을 수 있도록 낮춰야 한다.


대신, 예배 후에 성경 공부 시간을 가지면 좀더 심화 내용을 다루거나, (어른들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간에 또래 모임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를 통해 모든 성경 지식을 무장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내려놓아야 한다.)


사실, 한국 교회는 예배에 집착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도 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주일학교 예배는 예배가 아닌 Sunday School인데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 예식이나 장례 예식, 개업 예배도 예배가 아니라 예식인데 예배라고 생각해서 생기는 문제점도 크다.



그런데 예배에 너무 집착하면서 생긴 문제 중 하나는, 예배만 드리면 할 거 다 했다는 거다. 예배에 참석했다면 굳이 성경 공부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는 모든 성경 공부를 설교로 대체하게 된다. 즉, 설교로 모든 성경을 가르치려니 설교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와 예배는 지루해지고, 예배만으로 지친 성도들은 점점 예배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설교와 성경 공부를 분리하게 되면 이런 문제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성경 공부를 소그룹으로 나눈다면, 또래 모임을 원하는 아이들의 경우 또래끼리 묶어줄 수도 있다.


ㄴ. 초대교회 예배의 부활


사실 나는 초대교회와 개혁주의 예배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 CRC 교단에는 초대교회 예배를 부활시키고 그것을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녹여낸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바로 CRC 교단 내에서는 예배 예전으로 가장 유명한 교회인 Church of Servant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교회가 따라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다만 이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도록 하자. (하지만 추후에 예배 예전에 대한 개혁을 일으킨 뒤에는 그에 대해서 자세히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3. 말씀에 대한 비전


그렇다면 말씀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많은 담임 목사들이 <말씀 중심>을 모토로 목회 철학을 세운다. 그런데 대체로는 <설교 중심>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하는 설교를 목회 철학이랍시고 말씀 중심이라고 말하는 거다.


이건 마치 모두가 삼시세끼를 다 먹는 상황에서 "하루한끼" 같은 비전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 나라가 가난해서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잘 먹었다고 하는 상황에서 삼시세끼 라는 비전은 엄청난 비전이다. 하지만 하루에 세끼를 먹는 사람들에게 "하루한끼"라는 말은 뭔가 싶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제자훈련과 성경대학 등의 각종 프로그램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상황에서 "나는 설교만으로 충분해"라고 말하는 것이 이와 같다.


게다가 당연해 매주 설교를 하는데, 이 비전을 가진다고 해서 뭔가 따로 할 게 없지 않은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이건 공허한 철학에 불과하다.


참고로 나는 말씀에 대한 비전에서 "성경 공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교육을 말씀에 대한 가장 첫 번째 비전으로 삼았다.


왜 그런지 설명해보겠다. 미국의 CRC 교단과 개혁주의 교단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지고 매년 공부를 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12년 동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12번 반복해서 공부한 거다.


자, 그러면 주일학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열두 번 공부한 학생과 한국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온 학생이 토론한다면 누가 이길까? 좀더 쉽게 말해, 주일학교 졸업한 사람과 신학교 졸업한 사람이 토론을 하면 누가 토론의 승자가 될까?


어처구니가 없게도, 미국의 칼빈신학교에 가보면,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12년 공부한 학생들이 훨씬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다. 학생들에게 들어보면,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아무리 똑똑한 신학생이라 하더라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으로 탄탄하게 공부한 미국 학생과 신학 토론을 하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것은, 주일학교 때부터 학생들 사이에 성경을 잘 안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소리다. 그런 학생이 신학교에 가서 4년이나 신학을 공부한 거다. 그러니까 주일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신학까지 공부한 학생주일학교에서 하이델베르크만 12년을 공부한 학생에게 토론에서 밀린다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적 측면에서 하이델베크르 요리문답의 위엄을 볼 수 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공부하면 이단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신앙을 형성할 수 있다. 다른 교회는 이단의 공격으로 다 무너져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으로 튼튼하게 공부한 교회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는 소식을 우리는 종종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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