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

by Carroty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서 분야를 살펴보다가, 새삼 이 책이 '소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했지만, 소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책이랄까. 한 권의 종교서적 같았다. 차라투스트라를 예수와 같은 인물로 받아들이게끔 써 내려간 책이라고 가히 말해도 될까. 이는 니체가 신학을 오래 공부했기 때문에 성경의 방식을 많이 차용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천주교의 교인으로서 생활했을 당시 느꼈던 경험들이 겹쳐 보였던 것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해설을 제외하고 57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역으로 작품해설을 읽고 들어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위버멘쉬'라는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매일 10쪽 이상 읽기로 이 책은 한 달 가까이 걸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싯타르타를 나흘 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난이도 차이가 상당했다. 솔직히 말해서 읽기 싫은 날도 있어서, 입에 과자를 넣어주며 '착하지, 오늘 10쪽만 읽어보자.' 하며 나 자신을 달랜 적도 있었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p.15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민음사


도입부터 이 책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나는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 루틴'을 만들었다. 매일 10쪽 이상 읽기, 매일 10줄 이상 쓰기, 매일 10분 이상 걷기 등 크지 않은 목표로 나를 독려했는데, 이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한 달 넘게 이 루틴을 지켜가고 있다. 지금은 여기서 매일 01강 이상 보기 등을 추가해서 읽고, 쓰고, 배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극복해 나가는 중이다.


중반부 이후부터는 의외의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바로 사회의 민낯을 보게 해 줬다는 것이다. 이게 왜 도움이 됐냐면 인간 군상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덕에 쓰고 있던 소설에서 풀리지 않던 부분을 '이런 식으로 풀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줬다.


자기-희열이 증오하고 구역질을 하는 것은 자신을 조금도 지키려 하지 않는 자, 독기 서린 침이나 사악한 눈길을 꿀꺽 삼켜 버리는 자, 너무도 인내심이 많은 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자, 모든 일에 만족하는 자를 볼 때다. 이것들은 노예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p.338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민음사


특히 위 대목에서는 직장 생활하던 나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게 됐다. 그리고 아래 대목과 더불어 우리는 회사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 당연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작은 행복을 겸손하게 얼싸안는 것, 그들은 이것을 순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새 또 다른 작은 행복을 향해 곁눈질한다. 겸손하게.
사실 그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즉 누구로부터도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그것은 비겁함이다.
(중략)
그리하여 그들은 늑대를 개로 만들었고, 인간 자체를 인간 최고의 가축으로 만들었다.

p.301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민음사


니체는 우리가 당연하게 마주하고 있는 삶에 대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의 내 모습이 최선이 맞는지, 더 극복하고 나아갈 수는 없는지. 그러면서 니체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초인(위버멘쉬)'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초인은 '영원회귀'의 진리를 체득하고, '힘의 의지'를 실현할 미래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려면 영원회귀를 극복해야 하는데, 이는 내가 이해한 바로는 영원회귀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 그러니까 사소한 순간 모든 것까지도 모두 그대로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정말 재밌는 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살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반추해 보았을 때 나는 스스로의 추한 부분만 기억해서 내가 그 순간을 다시 견딜 수 있는지 자문하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아니 어릴 때부터 '다시 이 기억을 가지고 어릴 때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상상을 자주 해왔던 터라, 내 삶을 온전히 긍정하기 어려웠다. 불행은 사랑해도, 부끄러움까지 사랑하기엔 아직 어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정말 멋지고 알차게 산다면, 나는 내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해서 삶을 오롯이 긍정할 수 있을까. 독자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의도한 것이 니체의 의도인가. 에너지가 조금 회복되면 다시 한번 재독 해보고 싶은 책이다. 지금 생각한 것과 그때 이해하는 것이 똑같을지,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있을지도 참 궁금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도 참 궁금한 책이다. 아직은 부끄러움까지 사랑할 힘이 없지만, 언젠가는 그마저도 껴안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해 본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나의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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