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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roty Oct 20. 2024

남편에게는 비밀입니다

비밀이야기, 열여덟번째날 저녁

나는 학창 시절에, 특히 고등학생 때부터 길게는 20대 내내 '엄마'와 관련된 주제를 가진 모든 매체를 접하지 않았다. 책, 영화 등 어떤 것도 거부했다. 그 당시에 '엄마'라는 단어는 내게 눈물버튼이었기 때문이다. 울고 싶으면 '엄마'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보면 됐다. 엄마는 나에게 감정의 복합체다. 그랬었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고, 미웠고, 좋아했고, 안쓰러워했고, 싫어했고, 원망했다. 아빠는 정신적으로 우리를 성장시켰다면, 엄마는 우리를 물질적으로 성장시켰다. 내가 이렇게 말한 걸 알면 엄마가 적잖이 서운해할 텐데, 엄마의 정서적인 케어는 굳이 논외로 둔 이유는 내게 미친 정신적인 영향 때문이다. 엄마는 IMF로 사업에 실패한 아빠를 대신하여 가장의 역할을 했다. 엄마는 어린 우리를 키워내기 위해 나는 솔로 22기 순자처럼 살았다.


나는 학교 끝나고 집에 갔을 때 집에 있는 엄마가 좋았다. 추운 겨울날 호들갑 떨면서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두꺼운 이불을 덮으라고 곁을 내어주면서 이불속에서 먹을 수 있게 귤을 함께 줬다. 그런 엄마가 저녁 때 되면 출근해서 아침에 들어왔다. 우리를 먹고살게 하면서도, 돌봐주기 위해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의 빚이 엄마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가장 미웠던 순간은 비교적 최근인데,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엄마, 동생과 셋이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내가 중학생일 때 칼빵(커터칼로 자신의 신체에 상처를 내어 글씨 같은 것을 쓰는 게 유행이었다. 이 글로 알게 된 청소년이 있다면 절대 따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이 유행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자해'에 대한 인지가 더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된 나는 굉장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못했고, 결국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자해로 풀었다. 3년 내내 왼쪽 손목이나 손등을 커터칼로 긋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했는데, 어느 날 커터칼에 묻은 혈액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해 두었다. 그걸 우연히 엄마가 봤고, 다른 아주머니들과 대화할 때 '쟤는 그런 것도 하더라'라는 식으로 가벼운 가십처럼 이야기 나누는 걸 내가 들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그 여행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건데, 엄마는 그 이야기에 '그러게 자해를 왜 했어?'라고 타박해서 내가 크게 상처를 받았다. 나는 엄마에게 '중학생짜리 애가 자해를 했으면, 왜 그랬니라고 먼저 물어보는 게 아니야?'라고 와다다 쏟아냈고, 가정을 화합과 화목을 위해 자리를 주최한 동생에게 미안한 일이 됐다. 그 일전에도 갖가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누군가 내게 '엄마한테 가장 크게 상처받은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는 엄마를 자주 안 봤다. 의식적으로 피했다. 전화를 못 받으면 다시 전화 걸지 않았다. 엄마랑 눈을 마주치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는 내게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고, 미안함을 표했다. 특히 술을 마시면 내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게 더 싫었다. 그래서 엄마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익히 엄마가 나에게 심리적 부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 2년 정도 지냈을까,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용서한다고 한들, 엄마가 엄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되면 그건 내가 용서를 한 걸까?'


되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꼬박 하루를 넘게 고민하고,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를 용서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엄마도 나한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도 엄마 스스로를 용서하고 엄마가 앞으로 남은 삶을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어."


당신을 희생해서 내가 살아갈 길을 만들어준 사람이 내게 상처를 줬다고 용서하고 말고 할게 뭐가 있었나,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우습다. 결국 내가 용서를 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용서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그 뒤로 엄마와의 관계가 호전되는 데에는 약 2년이 걸렸다. 조급히 다가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성급히 관계를 회복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고, 그다음에는 엄마가 건 전화를 못 받아도 다시 전화를 걸고,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식의 단계로 찬찬히 나아갔다. 정신과 선생님이 ‘어머니를 억지로 용서하려고 하지 마세요. 용서하고 싶을 때가 오면, 그때 용서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는 말을 해줬던 것처럼 이후 단계도 천천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엄마에게는 내가 못 됐을 때나, 못되지 않았을 때나 사랑하는 딸이었겠지만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다시 사랑하는 중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가 돌아가실 땐 후회 없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직은 그게 늦지 않을 때 내가 엄마의 소중함을 알아차려서 참 다행이다.


오늘 저녁은 엄마와 우리 부부, 동생네 부부가 모두 모여 엄마가 사준 소고기를 먹고 돌아왔다. 조카의 말대로 할머니(나에겐 엄마, 조카에게는 할머니)가 조카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는 걸 보고 더 이상 지겨워 못살겠다 싶을 때 아빠와 삐삐, 단비를 만나러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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