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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Oct 25. 2022

<아바타> 지배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민지를 지배하는 두 가지 방식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시 여겨졌다. 그리고 그 과정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무력으로 제압해 나라를 지배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것, 둘째는 약소국을 '교화'시킨다는 명목 아래 자신들의 선진문화와 종교를 교육하거나, 제도를 지배해 경제를 발전시켜준다는 이야기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에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모두 나온다. 겉보기에는 첫 번째 방식을 취하고 있는 지구의 해병들과 RDA 기업이 빌런처럼 나온다. 하지만 두 번째 방식 역시, 자신들이 과학적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선민사상이 은연중에 깔려있는 방식이다.



아바타는 겉보기에는 케빈 코스트너의 1990년 작 <늑대와 춤을>의 SF 버전으로, 백인들의 제국주의와 침략의 역사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침략자인 백인이 원주민과 동화되어 백인과 싸운다'는 기독교 메시아적 서사는 <라스트 사무라이>, <미션>, <듄>, <터미네이터>, <타임머신>등 셀 수 없이 많다. 이 이야기들의 문제는 은연중에 백인이 구원자라고 믿게 된다는 점이다. 악당도 백인이고 구원자도 백인이다. 원주민은 그들의 힘이 없으면 무너질 존재들처럼 연약하다.


첫 번째를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악인으로 설정해 마치 두 번째는 구원자 같지만, 실제로는 두 번째도 침략자다. 제국주의 시절 선교사들은 선인들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종교와 문화가 얼마나 하등한 지를 깨닫게 해 주는 정서적 침략의 일부분으로 활용되었다. 정말 원주민을 위한다면, 조금 느리더라도 공정거래를 통한 상거래로 문화와 지식이 서서히 전해지도록 해서 원주민 스스로 배워 기술과 경제가 발전되는 게 맞다. 위와 같은 기독교 메시아적 서사에 백인들을 비유해 넣는 것은 자신들의 식민지배나 세계 경찰 역을 하는 관점을 정당화할 뿐이다.



<아바타>라는 용어는 원래 힌두교 용어로, 산스크리트어 '아바타라 अवतार Avatāra'에서 온 말이다. 천상계의 신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신의 화신'이라는 표현을 한다. 원래 힌두교 용어였던 아바타를 '인간이 창조한 또 다른 세계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용어로 확장해 미디어에 이용한 최초 사례는 1986년작 게임인 <하비다트>이다. 원래는 그 이전인 1985년 <울티마 4: 퀘스트 오브 아바타>가 먼저라고 나와있으나, <울티마 4>에서 아바타는 원래 힌두교의 아바타와 의미가 더 유사하다. <하비다트Habitat>는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를 가지고 하는 MMO RPG 게임이다. 세간에는 1992년 <스노 크래시>를 출간하며 홍보 기사로 최초의 메타버스와 아바타를 쓴 것으로 되어있으나 잘못 알려진 말이다.


원래 아바타라는 단어의 뜻이 신의 화신이고, 1980년대 이후 미디어에서 응용된 아바타도 인간이 만든 가상현실에 들어가는 인간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영화 <아바타>는 인간, 백인들이 곧 신이라고 비유한다.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의 불편한 시선

<아바타> 영화에서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은연중에 굉장히 불편한 부분이 있다. 바로 나비족의 모습이다. 판도라 행성의 동물들은 머리에 뇌와 연결된 신경다발이 있다. 그것을 서로 연결해서 정신적인 교감을 한다. 그리고 나뭇잎에서 자거나, 동물들과 교감해 타고 다닌다. 에이와와 연결되는 나무는 그들의 선조들의 기억이 가득하다.


자연과 사는 그들의 방식은 인간에겐 유토피아와 다름없다. 마치 현대사회의 인터넷이나 AI, 과학기술이 유기체로 모두 저절로 만들어지는 모양새다. 이것은 물질문명과 대비되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원주민'에 대한 과한 판타지와 다를 바 없다. 기계와 쇳덩어리로 가득 찬 인간과 대비시켜, 나비족의 모습은 마치 에덴동산에 온 것처럼 안락하고 편안하다. 주인공이 그들과 동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비족은 정말 '자연과 더불어'살고 있는 걸까? 도구들이 유기체일 뿐, 그건 나비족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모양새다. 그걸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하늘을 날기 위한 수단인 '이크란'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는 모습과 흡사하다. 강제로 등 뒤에 타고, 길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강제로 신경다발을 연결해 지배한다.



영화에서는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 강한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고 나온다. 그래서 '토루크'를 길들일 수 있는 나비족이야말로 가장 강한 영혼을 가진 것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그러나, 왜 서로 대등하게 연결되었는데 인간 형상인 나비족이 단번에 지배할까? 동물들이 신경다발로 인간을 지배하는 모습은 왜 나오지 않을까? 그건 그저 기독교에 나오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물'이라는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한 영혼을 가졌으면 그저 날아다니기 위한 탈것으로 하나의 생물을 정신적으로 지배해도 되는가? 그리고 왜 인간(나비족)이 모든 생물 가운데 가장 영혼이 강한가? 나비족과 이크란이 신경다발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자. 이크란이 나비족에게 끼치는 영향은 없다. 연결되는 순간 이크란은 자아를 상실하고 나비족의 명령에 따른다. 이것을 '자연과 교감하는 종족'이라고 한다면, 힘센 남자가 힘없는 여자를 강간하고서 '그건 교감과 사랑이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비족은 철저히 판도라 행성을 그들의 방식대로 지배하는 종족이다. 그 외적인 모습이 폭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게 교감인 건 아니다. 실제 자연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자연에서 사는 일은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 아니다. 자연과의 사투에 더 가깝다. <아바타>는 그런 사투의 과정이 없이, 약자가 강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섭리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건 제국주의 시절 식민사관과 똑같다. 섬뜩하지 않은가? 가장 악인을 설정해놓고, 그것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가스라이팅해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건 착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이. <아바타>에는 선한 백인들의 모습 뿐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원주민도 철저히 지배자의 시선으로 그려져있다.




<아바타 2: 물의 길>의 개봉일이 가까워오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전과 다른 더 좋은 영화일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바타>가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에서 획을 그은 수작인 것도 맞고, 나 역시도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인간 중심적 사고, 백인 구원 서사, 식민사관 등을 어떻게 할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제임스 카메론이 알고 저렇게 만든 건 아니다. 그는, 백인 남성들은 정말 저게 약자를 위한 방식이고 교감이라 여기는 것이다. 또한 자연을 대하는 나비족의 모습도 지켜볼 것이다. 과연 자연과 정말 교감을 하는 것인지.




https://brunch.co.kr/@casimov/148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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