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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Oct 10. 2024

<레드 룸스> T가 공감하는 방법

장르가 확실한 영화들은 몰입이 쉽고 보기에 편하다.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이해하기 쉽고, 그 장르의 클리셰를 마음껏 이용하기 때문에 '알고 보는 맛'이 있다. 공포물을 보면 놀래키는 장면을 기대하고, 액션물을 보면 스토리는 기대하지 않고 어떻게 때리고 부시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된다.


그러나 파스칼 플랑테 감독의 캐나다 영화 <레드 룸스 (Les chambres rouges)>는 그런 장르적 상상력을 파괴해 버린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소녀들을 강간하고 무참하게 죽이고, 그 영상을 다크웹에 올린 범인 뤼도비크 슈발리에 (맥스웰 맥케이브-로코스)에 대한 재판이고, 그를 옹호하는 여자 팬들, 특히 슈발리에 편에서 재판을 관람하는 켈리앤 (줄리에트 가리에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이 영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 슈발리에에게 유죄를 내리려는 검사와, 슈발리에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캐나다는 5년 이상의 형에 대해 배심원제를 하고 있어서 배심원이 무척 중요한데, 그래서인지 여기 나오는 캐나다 법원의 구조도 상당히 독특하다. 일반 재판영화에 나오듯 배심원이 옆에 있는 게 아니라, 법관과 같이 앞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는 각각 자신들이 앞으로 주장할 내용의 핵심을 설파하며 시작한다. 검사는 유죄를 내리기 위해, 배심원들의 감정을 자극하려 한다.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지, 저 범죄자는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지. 한편,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이성을 강조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증거가 정말 논리적으로 들어맞는지가 중요하다 말한다. 바로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이성적인 시선과 감정적인 시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캘리앤은 모델이며, 온라인 카드게임이나 주식 등을 아주 잘하는 인물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숫자에 강하다는 표현을 한다. 요새 유행하는 MBTI로 말하자면 극 T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슈발리에의 편에 앉아 재판을 방청한다. 기자들은 슈발리에의 편에서 재판을 본 켈리앤을 인터뷰하지만, 켈리앤은 전혀 감정이나 자신의 이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 전체적으로도, 켈리앤은 관객에게 자신이 하는 일의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는다. 즉 내레이션 등이 전혀 없고, 자신이 하는 일을 제삼자에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이 기묘한 느낌을 주는 켈리앤은, 진짜 어떤 인물이고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영화의 긴장감은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요새 T가 유독 F에게 조롱받는 밈이 많이 돈다. 공감을 조금이라도 못하면 T냐며 놀리듯 말하기도 한다. MBTI자체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유행 자체가 별로지만, T가 어떻게 공감하는지도 모르면서, 마치 F는 공감을 잘하는 양 우월하게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F는 공감을 잘하는 게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고, T는 공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것일 뿐이다. 


캘리앤은 재판 도중, 슈발리에를 지지하는 다른 한 여자 클레망틴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클레망틴은 슈발리에를 원래 잘 알거나 한 게 아니라, 방송에서 그의 눈빛을 보고 범인이 아니고 착한 사람일 것이라는 망상에 혼자 빠진 것 같다. 그녀의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말이 옳다는 쪽으로 해석하려 한다. 일종의 극 F성향인 사람이 가장 안 좋은 쪽으로 발현된 모습이다. 캘리엔은 그녀를 집으로 불러, 먹고 자고 하면서 서로 친해진다. 여성은 같은 편인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성과 감정.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영화는 어느 순간 전혀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터트려버린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잔인한 살해장면을 보여주거나, 점프 스케어 방식으로 깜짝 놀라게 하거나, 감정적인 대사를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기와 소리를 이용한 영화적 연출로 그것을 만들어낸다. 그 기묘한 방식의 감정전이는 그대로 피해자나 유족이 가질 감정을 관객에게 스며들게 한다. 어떤 영화들은 그 사건의 피해자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극적인 장면을 재생산해서 관객들에게 불행포르노처럼 괜스레 즐기게 만든다면, 이 영화는 전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그렇게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지옥 같은 불쾌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캘리엔은 사실 숫자에 강할 뿐만 아니라, 해커이기도 하다. 각종 어둠의 경로를 알고 있고, 다크웹에도 접속하는 방법을 안다. 그녀는 피해자 중 한 명인 카미유의 집 주소를 알아내고, 그녀의 부모 이메일이 유출된 것을 확인하고, 이메일을 해킹해서 집 와이파이 비번을 알아낸다. 그녀는 AI도 자체서버로 훈련시키고 돌리기도 한다. 그녀의 집은 굉장히 전망이 좋은 고층 오피스텔이다. 하지만 그곳엔 편히 앉는 소파도 없고, 오로지 컴퓨터 책상만 있으며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마치 그 방 자체가 그녀의 마음 같다.


캘리앤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저장하고, 확인한다. 켈리앤은 과연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또 완전히 맹목적으로 슈발리에를 사랑하는 클레망틴을 집에 들인 것인가? 재판이 진행되어, 결국 결정적 증거인 3명의 피해자 중 두 명의 다크웹 영상을 재판장에서 틀게 되었다. 피해자 중 하나인 카미유의 영상은 아직 FBI에게 없다. 재판장에서는 피해자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나가게 시킨다. 영상을 보고 싶어 하는 클레망틴은 계속 기웃거리지만, 피해자의 끔찍한 비명소리만 문 틈으로 들린다. 범인의 목소리가 나오는지 꼭 보고 싶다고 하는데 켈리앤은 목소리는 안 나온다고, 영상을 보려고 하지 말라 한다. 클레망틴은 말한다. "네가 그걸 왜 알고 있어?"


사실 켈리앤은 해킹을 통해, 영상의 유출본을 미리 봤던 것이다. 클레망틴은 자기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켈리앤은 그걸 보면 안 된다고 말린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르는 클레망틴에게 결국 피해자가 레드룸에서 살해당하는 영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 영상의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완전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클레망틴에게, 켈리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조목조목 영상에 대해 설명한다. 완전히 극 F와 극 T의 상태이다. 


영상을 본 클레망틴은 다른 논리적인 증거가 없어도, 이젠 그 영상이 슈발리에가 범인이라는 너무도 확실한 증거라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사랑에 빠졌던 그 눈, 영상에는 그 눈이 너무도 크고 선명하게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클레망틴은 도대체 왜 이 영상을 이미 봤던 켈리앤이 슈발리에를 지지하는 쪽에서 재판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클레망틴은 떠나간다.


영화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관객은 켈리앤의 진심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피해자 카미유의 집을 어슬렁거리고 와이파이를 해킹해 현관문이 열리는 것도 확인한다. 슈발리에가 아니라 이 여자가 진범인가? 피해자 가족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그녀와 카미유는 무슨 관계인가?


이 영화의 절정은 극 T라고 생각했던 캘리엔이 슈발리에에 대해 가지는 집착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슈발리에는 금발의 파란 눈의 여성만 죽인다고 알려져 있었다. 재판장에서 켈리앤은 금발의 파란 눈을 하고, 치아교정기를 끼고, 카미유 학교의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마치 나를 죽여달라는 듯이, 내가 카미유라는 듯이! 그리고 곧이어 경찰에게 끌려나갈 때도, 제발 나를 봐달라는 듯 난동을 부린다. 슈발리에의 눈길, 그 눈길이 필요해. 그리고 그 눈을 마주친 순간, 터져 나오는 피해자들의 비명. 그 살인마의 눈을 마주한 그 피해자들의 공포, 광기. 그 모든 게 관객에게 전염되는 그 순간.  


그 모습이 미디어를 타고 퍼져버리니, 캘리엔은 사회적인 모든 것을 잃은 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얻었다. 바로 카미유 영상을 경매하는 다크웹에 입장할 수 있는 입장권을. 그녀는 이제 공개적으로 슈발리에에게 집착하는 집착녀였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모든 주식을 매도하고 비트코인을 사고, 모자란 돈은 카드 게임으로 올인해 경매에서 결국 카미유의 영상을 따낸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보면서, 차가운 얼음 같던 켈리앤은 떨리는 희열의 미소를 짓는다. 여기서 다시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다크웹 영상에 중독된 중독자인가? 아니면 자기 파괴적인 광기 어린 해커인가? 그러나 켈리앤은 몰래 카미유의 집으로 들어가 영상이 USB를 놓고 나온다. 영상은 유출본이 아닌 원본인 만큼, 확실하게 찍혀있었고 그것으로 슈발리에는 유죄를 받는다.  


켈리앤은 삶의 다른 것들에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재미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카드 게임을 할 때도 운에 기대기보다는,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맞아 들어갈 때 승부를 걸어 상대방을 탈탈 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서 완벽한 증거를 따냈다. 그리고 그 증거를 피해자 유족에게 전달하는 방식도 괜히 그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듯했다. 더군다나 피해자 방에서 찍는 인증샷이라니. 그 아슬아슬한 기괴함이라니. 이것은 극T가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방식이며, 복수하는 방식이다. 조용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감정적 인척 해서 모든 것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봤고 범죄자도 유죄를 받았는데 내내 전해져 오는 이 끔찍한 불쾌감은 뭘까? 그 모든 작업을 해내는 켈리앤의 마음이 마지막에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어서다. 그 끔찍한 영상을 보며 계속 확인하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은 이미 레드룸 그 자체가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속에도 레드룸을 만들어버렸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이 <레드 룸스>인 것이다.


정의가 이겼는데 전혀 유쾌하지 않다. 그 끔찍한 일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고, 아직 잡히지 않은 범죄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의 마음은 어느덧 레드룸이 되어, 피해자들이 영원히 끔찍하게 죽어간다. 

영원히.







*개봉이 조금 지난 영화의 리뷰는 아래의 <카시모프의 영화관>을 봐 주세요 :)

https://brunch.co.kr/magazine/newmovies


* 영화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보는 글들인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시리즈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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