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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Nov 07. 2024

<롱레그스> 악마의 슬라이드 프로젝터

가족들을 죽인 범인이 가장이고, 그 가장은 자살한 미제 사건들. 그 사건 집의 딸들은 모두 생일이 14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건은 모두 생일날이 아닌 전후로 일어난다. 이 집에는 모두 롱레그스라는 사람이 보낸 암호 편지가 있다. 많은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무릎을 치는 논리로 단서를 찾아 해결하게 되지만,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그것을 거부한다. 직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사건에 접근하며, 그것이 이 사건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마치 아주 오래전 필름이나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보는 것 같은 비율로 영화가 시작한다. 슬라이드 필름이란 일반적으로 음영이 반대로 나오는 네거티브 필름이 아닌 파지티브 필름을 말한다. 네거티브 필름은 인화할 때 주로 쓰이지만 파지티브 필름은 빛을 비추면 그대로 스크린에 비치므로, 프로젝터에 넣고 빛을 비추고 버튼을 누르면 스크린에 커다랗게 비춰볼 수 있다. 또 버튼을 누르면 한 장씩 넘어간다. 고전 영화에서는 경찰들이 발표하는 모습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현재는 수업이나 발표를 할 때 그냥 영상을 빔스크린으로 쏘거나 좀 더 옛날에는 OHP필름을 썼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많이 썼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알게 되지만, 이 화면 비율은 누군가의 기억에 대한 화면들이다. 마치 슬라이드 필름을 돌려보는 것처럼, 과거는 영화 중간중간에 끼어든다. 그리고 슬라이드로 발표를 하다 보면 종종 잘못된 필름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에도 그런 방식으로 이미지들이 뒤섞이는 걸 발견하게 된다. 마치 주인공 리 하커의 기억과 감정이 뒤섞이는 것처럼. 


리 하커는 누군가 슬라이드 프로젝터에서 필름을 빼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한 부분의 기억에 사라져 있다. 그것은 왜 사라져 있을까.




[이하 스포일러]




<롱레그스>는 영화에 나오는 사건에 어떤 논리적인 명분이나 주제가 전해지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영화의 느낌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독은 롱레그스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 했지만, 난 이 영화의 대사 중에, 주인공 리 하커의 상사인 카터의 딸이 하는 대사가 맘에 걸렸다. "송아지를 낳으면 상자에 넣어서 다리가 자라지 않게 한다"라는 이야기였다. 


사탄을 숭배하는 롱레그스가 벌이는 짓은, 죽일 집의 딸과 닮은 인형을 만들어 거기에 사탄을 넣는 것이다. 일단 그 인형이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게 되면, 나머지는 사탄이 알아서 해준다는 것이다. 롱레그스는 인형에 사탄의 혼을 불어넣는 아버지이며, 이 사건의 집적적인 주관자이다. 즉 사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직접적으로 일을 행하기도 하는 자다. 


그에 비하면 주인공 리 하커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기억하는 바가 많지 않고, 감각적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항상 긴장해 있다. 마치 그녀는 아직도 겁먹은 어린아이에서 자라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알게 되는 진실이지만 리 하커의 집에 롱레그스가 리 하커의 인형을 들고 찾아왔었으며, 하커의 엄마는 롱레그스가 딸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일을 도왔다고 나온다. 아니, 정확히는 하커 본인이 자신의 지하실에서 롱레그스가 그동안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에서 자며 진실에 대한 꿈을 꾼 것이다. 


키가 크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어른이라는 뜻이다. 롱레그스는 자신이 이 세상의 많은 딸들에 비해 많은 진실을 알고 있고, 직접적으로 인형을 배달하는 하커 뒤에 숨어 그들을 사탄에게 인도하려는 어른이다. 키다리 아저씨도 원어는 대디 롱레그스(Daddy long legs)이니, 롱레그스와 그가 죽이는 집의 딸들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커는 엄마가 조력자가 되면서 살아났지만, 온전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자라났다. 즉 롱레그스가 되지 못했다. 롱레그스의 인형과 싱크가 되어 그의 성장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하커의 인형을 쏘자 검은 연기가 하커의 날아간 인형에서도 피어오르지만, 하커에게서도 빠져나간다. 그리고 쓰러져 진실의 꿈을 꾸게 된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666이나 요한 묵시록, 사탄 숭배 등은 영화적으로 식상할 정도로 매우 오래된 소재다. 또한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이, 종교나 오컬트에 깊이 있게 접근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악마가 내 기억의 슬라이드 필름을 몇 개 빼놓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 하커가 모종의 테스트를 받을 때, 이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테스트를 받는다. 그때 보이는 화면이 영화에서 기억의 화면과 같은 비율이다. 영화는 혹시, 영화 전체가 관객을 테스트하는지도 모른다.



스릴러나 공포 영화에 서브리미널 메시지처럼 짧게 영상을 끊어 편집함으로써,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는 영화는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억을 마치 악마가 돌려보는 슬라이드 프로젝터처럼 만들어, 나의 잃어버렸던 공포와 마주하게 한다. 내 감정과 기억을 막고 있던 것, 답답하게도 알고 싶던 진실의 조각이 도려내진 것. 영화를 다 보고 나오자 그런 것들이 떠올라 기분이 매우 안 좋아졌다. 그리고 그 기억을 찾아서 기억을 잃어버린 장소에 나도 하커처럼 찾아가야 했다.


하커가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점점 사탄의 일을 하던 자들은 죽게 되며, 마지막으로 하커의 엄마도 하커가 총으로 쏴 죽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결국 하커는 카터의 딸 인형을 부수지 못한다. 총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볼버의 총알이 하필 그때 다 닳았을까? 아니면 기억의 슬라이드를 빼놓는 사탄이 총알에 장난을 친 것일까. 롱레그스도 사탄의 단체 일부였고, 엄마는 딸을 지키려다 사탄을 숭배하게 된다. 이제 홀로 남은 카터의 딸을 지키려는 하커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하얀 천사의 모습으로 악마의 말을 따른다. 악마는 천사의 옷을 입고 있을 수도 있다. 롱레그스가 아닌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알 수 없겠지만.






*개봉이 조금 지난 영화의 리뷰는 아래의 <카시모프의 영화관>을 봐 주세요 :)

https://brunch.co.kr/magazine/newmovies


* 영화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보는 글들인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시리즈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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