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다음 날 저녁 재호는 한걸음에 내달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어 남한산성 북문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재호는 숨을 고르면서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서쪽 하늘엔 이미 해가 져서 하늘 반쪽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재호는 북문 문루 옆에 망원경을 기대놓고, 성벽에 기대고 서서 북문 밑에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막 지난 참이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나왔네? 난 더 늦게 나올 줄 알았지.”
재호가 옆을 돌아보니 진주는 어느새 재호의 옆에 와서 서 있었다. 진주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진주가 재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성곽길로 죽 한 바퀴 돌고 있었어. 여기 산책하기에 좋거든.”
“아하, 그랬군요. 하하…. 자 여기, 망원경 보실래요?”
재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삼각대를 펴기 시작했다.
“그래. 근데 여긴 지붕 때문에 하늘이 안 보이잖아. 저기 옆에다 펴야지. 정신 차려, 양재호!”
“하하하…. 네 맞아요. 아휴 정신이 없네….”
재호는 자신이 왜 이렇게도 덤벙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일에 느긋하고 자신감이 넘쳤고, 실수를 해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게 본래 재호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만나거나 얘기할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당황하거나 실수하는 쪽은 상대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여자 앞에서는 달랐다. 평소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집에서 몇 번이나 조립하고 만져보고 어제도 하늘을 잘만 봤었는데, 지금은 삼각대조차 제대로 펴지 못해 허둥댔다.
“어, 이게 원래 이렇게 해야 펴지는데…?”
“으이그, 누나한테 줘 봐.”
진주는 망원경과 삼각대를 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휙휙 한 번에 착 폈다. 조금 만지작거려 보더니, 아예 별을 향해 각도를 맞춰갔다.
“오, 이렇게 하는 거구나. 알았어. 좋아. 다 됐다! 이제 보면 돼?”
“네…네! 와, 누나는 이 제품 처음 보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거 잘 다루시나 봐요.”
“원래 기계 다루는 걸 좀 잘해. 그런데 달이 어디에 있지? 맞췄는데 왜 안 보여?”
“그건 이걸 이렇게 돌려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진주에게 재호는 허리를 숙여 망원경을 조작했다. 진주에게선 특이한 향이 났다. 꽃향기나 샴푸, 섬유유연제 냄새 같은 것이 아니라 뭔가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났다. 재호는 두근거리는 것을 참고 달을 향해 망원경을 맞춰 주었다.
“자, 이제 한번 보세요. 조금만 움직여도 시야가 달을 벗어나니까 조심해요.”
“그래! 어디…. 와…! 정말 크다! 꼭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그런 달 같네! 일렁이는 건 공기 때문일 거고…. 이게 실시간 달의 모습이라는 거지? 신기해!”
“정확히는 실시간은 아니고, 1.3초 정도 늦죠. 빛의 속도로 그만큼 걸리니까요.”
진주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썩소를 지으며 재호를 쳐다봤다.
“으이구 그래, 이과 티 내냐? 어제 망신당한 거 만회하려고?”
진주는 다시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목성, 토성들을 보며 진주는 까르륵 웃었고 재호는 그런 진주를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이게 사랑일까 싶었지만 그것과 다른 묘한 감정이 뒤섞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재호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밤마다 재호와 진주는 남한산성 북문에서 만났다. 주로 망원경을 보며 이야기하고, 아니면 별이나 야경을 보며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재호는 진주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진주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5일이 되던 밤, 진주는 재호에게 말했다.
“나는 달이 가장 신비로워. 어째서 길고 긴 지구의 역사 속 찰나인 인간이 탄생한 이 시기에, 하필 달은 태양과 겉보기 크기가 똑같을까? 달은 태양보다 600배 작지만, 태양은 달보다 정확히 600배 멀리 있잖아. 달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지금보다 가까웠고, 앞으로는 더욱 멀어질 거야. 단순히 지구에 위성이 하나였기 때문에, 또 그 크기가 하필이면 태양과 비슷해서,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와 문명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 정말 신비하지 않니?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니지만, 거기엔 어떤 메시지가 있을 것만 같아. 아니, 메시지가 있다고 믿고 싶어. 세계는 둘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라는 것을 말이야. 나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재호는 달을 가만히 보다가 별생각 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달은 계속 멀어져만 가는걸요. 언젠가는 지구를 떠날 거예요.”
진주는 재호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 그래서 지금의 달은, 언제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달이라는 거지. 만나게 되었고 서로가 연결되었다고 느낀 순간, 우리 모두는 사실 이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거야.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결말을 피할 수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재호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불현듯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일어난 재호는 그만 망원경 삼각대에 다리가 걸렸다. 비틀거리며 넘어지다 순간적으로 문루의 기둥을 손으로 짚었다. 뜨끔하는 느낌이 손에 전해졌다.
“윽!”
재호는 손을 급하게 감싸 쥐었다. 나무 기둥의 결을 따라 갈라진 틈에서 삐져나온 나무 조각에 손을 찔린 것이다. 진주도 놀라 급히 일어났다.
“괜찮아? 손 줘봐.”
“…네, 괜찮아요. …아!”
재호의 손은 피가 철철 흘렀고, 2~3센티가 찢어진 것 같았다.
“어떡하지? 너 파상풍 주사는 맞았니?”
“아니요…. 이런 거 빨간약 바르고 밴드 붙이고 있으면 돼요. 걱정 말아요.”
“아니야. 응급실이라도 가야지. 이런 상처 그냥 두다가 큰일 난다, 너.”
“괜찮아요!”
재호는 소리 지르며 진주에게서 손을 확 뺐다. 고개를 돌린 재호의 어깨가 떨렸다.
“… 너, 우니?”
다친 손을 잡고 몸을 돌리고 있는 재호와, 뒤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진주 사이에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조금은 서늘한 산바람이 그들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가고, 은색의 달빛은 가루가 되어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검은 실루엣만 남은 산의 나무들은 가만히 흔들리다 이윽고 멈추었다.
“… 알았어. 손 줘봐.”
재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조금 그 큰 눈망울에 맺혀 있다가 굴러 떨어졌다. 진주는 재호의 피나는 손을 붙잡고, 뒤통수에 가져갔던 다른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거기엔 조그만 붉은색이 도는 젤리 같은 것이 언뜻 보였다. 재호는 궁금해져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무슨 연고예요?”
진주는 그것을 재호의 상처에 펴 바르며 말했다.
“상처가 잘 낫는 나만의 약이야. 너한테도 효과가 있을 거야. 종로에 유명한 약국에서 산 거니까.”
그러고 나서 진주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재호의 상처를 덮고 묶어 지혈했다. 재호는 밀려오는 슬픔은 잊고, 그저 자신의 상처를 응급처치해 주는 진주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제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재호는 손에 묶은 손수건을 풀러 보았다. 상처가 씻은 듯이 아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연고는 대체 뭐였을까? 재호는 어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 진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그 많은 대화 중에, 정말로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고 무슨 학교를 나왔으며, 정확히 나이가 몇인지 딱 부러지게 말한 적이 없었다. 집도 연락처도 몰랐다. 전부 두리뭉실한 대답이었지만 재호 자신은 그저 진주와 대화한다는 사실에 빠져 넘어갔던 거였다.
저녁 7시가 되자 재호는 망원경을 챙겨서 남한산성 북문으로 서둘러 갔다. 가서 망원경은 기둥 옆에 기대어 두고, 왔다 갔다 하며 진주가 오기를 기다렸다. 산책하고 운동하는 사람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북문을 드나들고 지나쳤다. 그러나 밤 9시가 넘어도 진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호는 손수건을 꽉 쥐고,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재호는 땅바닥에 글을 썼다.
‘한 바퀴 돌고 올 게요’
재호는 성곽을 따라 남한산성 서문, 남문, 동문을 쭈욱 따라 한 바퀴 돌며, 혹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진주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밤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진주는 없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다시 북문으로 왔을 때, 바닥에 써 둔 글씨도 그대로였다. 재호는 가슴이 아파왔다. 절망이 엄습했다. 이제야 나와 맞는 사람을,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데. 어둠 속을 서성이며 밤이 깊어졌다. 11시가 넘어서야 재호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며칠 동안 재호는 저녁마다 계속해서 남한산성 북문으로 나갔다. 진주가 일한다고 했었던 경기교육도서관에도 가 보았다. 직원에게 물어봤으나, 그런 인상과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아무 곳에서도 진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 같았다. 그래도 재호는 아무도 없는 남한산성 북문에 매일 나갔다. 그리고 8월 6일 아침이 되었다.
“어머, 세상에…. 아휴, 저걸 어째….”
재호는 희영이 호들갑 떠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 뉴스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호는 머리가 뭉근하게 저려왔다. 이게 뭐지? 머릿속이 저리는 처음 느끼는 두통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호야, 괌으로 가던 비행기가 떨어져 수백 명이 죽었다 카네. 우야꼬….”
재호는 놀라서 TV 앞으로 갔다. 대한항공 여객기 801편이 괌에서 추락했다는 뉴스 속보가 뜨고 있었다. 탑승한 사람들은 총 254명. 그중 2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아나운서는 격앙되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진주는 곧 여행을 간다고 했었다. 혹시 저 비행기에 타고 있던 건 아닐까? 재호는 계속해서 뉴스와 신문을 보며 생존자와 사망자 명단을 살펴봤다. 하지만 그런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재호의 불안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몸이 떨려 왔다. 몸이 떨려서 마음까지 불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밥도 먹지 않고 재호는 다시 남한산성 북문으로 향했다. 뛰어가는 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생각들은 점차 입으로 튀어나와,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안돼.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저기에 가면 전처럼 누나가 서 있을 거야. 항상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웃어줬잖아. 죽은 거야? 왜 이렇게 죽어? 그럴 리가 없어! 내 탓이 아니야.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이제야, 그때는, 너는, 나는, 연민, 동정, 눈, 나를, 왜, 왜, 왜, 왜!
재호가 북문에 도착하자, 북문 문루에 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머리칼이 날리는 모습도 보였다. 안 그래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재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재호는 그 하얀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그날 이후로, 재호의 기행이 시작되었다. 밤이면 망원경을 메고 산속으로 사라졌고, 거의 새벽이나 되어서야 돌아왔다. 나갔다가 돌아오면 온통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달고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희영은 재호가 걱정되었지만, 별말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 뭐든지 혼자 잘 해결하던 아이였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다시 일어설 거야. 하지만 9월이 되고 개강할 때가 되어도 재호는 학교에 가는 것 같지 않고, 하루 종일 산을 쏘다니다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강아지 샘을 좋아하던 아이가, 샘이 낑낑대는데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재호는 희영과 말도 하지 않았고, 밥은 거의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재호는 날이 갈수록 말라가고 있었다. 다시 저녁도 안 먹고 문 열고 나가는 재호를 보며, 희영은 뒤에서 걱정스레 물었다.
“호야, 학교 안 가나? 아까 전화 왔었다. 니 등록 뭘 안 했다 카데?”
“안 가도 돼. 신경 쓰지 마.”
재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며 현관문을 닫았다. 희영은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희영은 문을 열고 재호를 몰래 따라갔다. 재호는 생각보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어서, 길이 미로 같은 복잡한 태평동 골목인데도 불구하고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어쩐지 신나 보였다. 재호는 이리저리 구불구불 걸어가더니, 산성역으로 향했다.
산성역을 건너 등산로 입구로 향한 재호를 따라, 희영도 10m쯤 뒤에서 따라갔다. 재호는 누가 뒤에서 따라온다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가끔 멈춰 서서, 희영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혼자 무어라 말을 중얼거렸다. 혼자 웃기도 하며 귀를 막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 산길을 죽 따라 올라가면 남한산성 로터리가 나온다. 남한산성 로터리는 산성 꼭대기 중심의 종점으로, 대부분 산성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해서 간다. 하지만 재호는 그리로 가지 않고, 갑자기 멈춰 섰다. 희영은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재호는 뒤를 돌아봤다. 바닥은 야트막한 언덕이어서 재호에겐 희영이 보이지 않았다. 재호는 고개를 돌려 산길을 벗어났다. 희영은 조심스레 일어나, 재호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재호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서, 혼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이상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희영은 두려움보다 슬픔이 밀려 올라와 눈물이 고였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 같았다.
재호는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집안에 못 보던 남자가 셋이 있었다.
“엄마, 이 사람들 누구야?”
“재호야, 가만히 엄마 말 들어. 여기 이 슨생님하고 얘기 좀 해보그라…. 늬 몸이 좀 안 좋아 보여서, 슨생님을 좀 불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아파? … 어디가? 나 안 아픈데?”
그러자 그 남자들 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재호군, 난 뇌를 연구하는 남우석 박사라고 하네. 돌아가신 자네 아버지 친구였지. 어머님께서 걱정이 많으셔서 학생과 잠깐 얘기를 해 보려고 온 거니까, 흥분하지 말고 여기 잠깐만 앉아봐. 괜찮아.”
재호는 남 박사의 말을 듣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원래의 차분하던 재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흥분하기 시작했다. 희영은 재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 뇌 연구? 그게 뭔데? 아저씨가 의사라구요?”
“아니, 의사는 아니지만….”
“엄마, 이게 뭐 하는 거야? 내가 미쳤어?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냐고! 날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재호야! 야가 와이카노! 씰데없는 소리 말고 퍼뜩 안그라!”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을 미친놈 취급해? 엄마한텐 말 안 했지만,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그냥 데이트하고 온 거야! 스무 살 남자가 데이트하고 다닌 게 뭐가 그렇게 큰 일인데! 어, 알았다. 엄마 날 그동안 계속 미행하고 다녔지? 내 여자 친구를 본 거야.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 짓으로 떨어트리려고 하는 거야. 맞지? 다 들었어. 아까 슈퍼에서 할머니도 나한테 잔돈 100원 덜 주면서 경고를 하더라고. 네가 사귀는 여자 조심하라고 TV에서 봤다고! 어떤 꼬마애는 날 계속 쳐다보면서 분명히 그러는 거야. 그 여자 미친년이라고. 그런 소리 안 듣고 무시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씨발 왜 다들 그래? 조용히 해! 왜 날 여자 친구랑 어? 떼어 놓으려고 안달이야? 어!”
재호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마구 쏟아내며 망원경 삼각대를 거꾸로 들었다. 샘은 그런 재호를 보고 마구 짖어댔다.
“재호야! 이게 미칬나!!”
“오지 마, 오지 마!”
재호는 삼각대를 휙휙 휘둘렀다. 삼각대는 희영의 머리를 쳤다. 그때 샘이 달려와서 재호의 다리를 세게 물었다.
“악!”
재호는 소리를 지르며 샘을 걷어찼다. 샘은 깨갱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재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앞을 봤다. 희영의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희영은 눈을 똑바로 뜬 채 눈물을 흘리며 재호에게 소리쳤다.
“재호야…. 제발 정신 좀 차리라!!”
희영이 소리치는 모습에 재호는 공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주위를 둘러봤다. 그 방에는 남자 한 명과 희영, 재호, 샘밖에 없었다. 다른 남자 두 명은 사라졌다. 재호는 희영이 머리에서 흘리는 피를 보고, 자신의 손에 든 피 묻은 삼각대를 보았다. 옆을 돌아보니 샘이 절뚝거리며 방문 뒤에 숨어서 아직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환각? 환청? 들렸던 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보였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다 환각이란 말인가? 아까 그 사람들은? …진주는? 재호는 힘이 풀려 삼각대를 떨어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실의 형광등은 천천히 깜빡거렸다.
정신분열증. 그것이 재호가 진단받은 병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