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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남한산성 南漢山城> - 1. 경계에 사는 자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청록의시간2-2.jpg


기원후 1996년, 대한민국 성남시.




그곳에는 땅 위에도 별이 가득 뜬다. 지상의 별들은 하늘에 떠오른 별들의 반영이다. 하늘의 별 하나하나에도 태양계 같은 계系가 있듯, 지상의 별 하나하나에도 각자의 계, 가족이 있고 삶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라는 세계에 산다. 실체와 허상사이에는 경계界가 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저기 보이는 노을빛 지평선처럼, 가늘고 모호해서 확실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반영인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 반영이라면, 그 실체는 또 무언가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하늘과 땅 위의 별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결국 멍해지는 지점이 온다. 멍 때린다는 것은 뇌의 평온함이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뇌가 쉬고 있다는 느낌이다. 주변에서 야경을 찍기 위해 모여든 카메라 동호인들만 뺀다면 말이다.


재호가 앉아 있는 남한산성의 서문은 서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다. 도로가 거의 산 꼭대기까지 나 있어 관악산이나 북한산처럼 본격적인 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남한산성 서문은 항상 카메라 동호회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자리를 잡기 바쁘다. 이곳에 자주 오는 재호는 취미 사진가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문 사진사들이 잘 찍은 사진을, 비슷하게 찍어보겠다고 똑같은 곳에서 열을 맞춰 찍고 있는 그 모습은 뭔가 괴이했다. 그래도 이 추운 저녁에 나와서 저러고 있는 것을 보면 열정이 대단하다. 수능 한파라고 할만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이곳은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부니까.


방금 수능을 마치고 재호의 친구들은 모두 노래방에 가거나, 술을 마시러 갔다. 재호도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꼬셨으나, 모두 거절하고 하늘과 지상에 모두 별이 뜨는 이곳 남한산성 서문에 왔다. 재호는 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시간만 되면 이곳에 와 성곽에 앉아 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서글서글하지만 어딘지 날카로워 보이는 큰 눈, 굳게 다문 얇은 입술. 게다가 186cm의 큰 체구에 비해 긴 팔다리를 가져서,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성곽 위에 앉아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었다.


“야, 양재호! 수능 잘 봤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재호의 등을 툭 쳤다.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박현주였다. 조그만 체구에 커트 머리를 한 현주는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재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잖아. 나야 나. 안 맞춰봐도 돼.”


“짜식아, 겸손해라 쫌. 생긴 거부터 겸손하질 않아가지고 말야. 하여간에 으휴.”


현주는 앉아 있는 재호의 등을 발로 툭툭 차더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재호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현주를 바라보았다.


“왜, 망했어?”


“아, 몰라. 이번 수능이 400점 만점으로 바뀌느라 그런지 난이도가 개판이야. 뭐 이렇게 어려워? 답지 사서 맞춰 보다가, 열받아서 걍 접었어. 될 대로 되라지 뭐. 인서울이라도 할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


재호는 주머니에서 엿 하나를 꺼냈다.


“야, 엿 먹어라.”


“어머, 고마워, 꺄르륵~”


현주는 금방 장난스럽게 웃으며 엿을 까더니 냠냠 먹었다.


“아침에 과학반 후배들이 수능 잘 보라고 엿이니 사탕이니 포크니 잔뜩 주잖아. 가방에 꽉 찼어. 좀 더 줄까?”


현주는 재호의 등을 ‘탁’ 치며 웃었다.


“역시~! 한 인기 하는군? 내가 먹는 걸 마다할 거 같아?”


재호는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서 현주에게 주었다. 현주는 그것들을 받아서 가방에 푹푹 집어넣었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현주는 뭔가 생각난 듯이 입을 떼었다.


“아, 그러고 보니 9반에 정이주라고 알아? 부회장.”


재호는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이주…? 부회장…? 알 것 같기도 하고….”


“축제 때 네가 노래 부르고 나서 꽃다발 줬다던데? 기억도 못 하냐?”


“아, 알겠다. 별로 안 친한데 갑자기 꽃다발 줬던…. 그런데 걔가 왜?”


“너 완전 좋아하나 보던데?”


재호는 어렴풋이 정이주라는 아이를 떠올렸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모난 데 없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평범한 얼굴이었고, 몸매도 뭐 그닥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겠지만, 재호는 그냥 걔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그 아이는 내 옆에 두고 여자 친구라고 하기엔 좀 창피한 느낌이랄까. 키가 훌쩍 크던 중학교 때부터 조금만 잘해준다 싶으면 여자 친구처럼 들러붙는 애들이 많았어서, 이런 거는 좀 선을 그어야 했다. 재호는 대답하기 전부터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 걔는 좀.”


현주는 괜히 말했다 싶어 한숨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니가 그렇지 뭐. 걔 앞에서는 표정 그렇게 짓지 말고 그냥 잘해줘. 그러다 울릴라.”


“알아서 할게~ 별 걸 다 걱정하셔~”


야경을 찍고 있던 어떤 아저씨는 재호와 현주가 그렇게 앉아서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있더니 둘에게 물었다.

“학생들 보기 좋네! 둘이 애인 사이인가? 사진 찍어줄까?”


그 말을 들은 둘은 동시에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아니요! 미쳤어요? 얘랑!”


사진을 찍어주겠다던 아저씨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야경을 찍었다. 현주는 옆구리에서 삐삐를 꺼내서 들여다보았다. 825가 찍혀 있었다.


“엄마가 빨리 집에 오래. 가야겠다.”


“그래, 조심히 내려가라. 누가 널 잡아가진 않겠지만 길 어둡다. 다리 짧아서 넘어질라, 크크큭.”


현주는 일어서다 장난스럽게 앉아 있는 재호의 등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얌마, 그래, 롱다리라서 좋겠다!”


“윽! 야, 야, 그만해~!”


현주는 툭툭 털고 내려가다가 뒤돌아보며 손을 들고 외쳤다.


“야, 삐삐 좀 쳐! 같은 학교에서 얼굴도 보기 힘드냐. 대학 가면 만나기도 힘들 텐데, 졸업하기 전에 맥주나 한잔해!”


“어~ 그래~!”


재호도 가는 현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현주는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배도 고프고, 슬슬 내려가야 할 때다. 재호는 마지막으로 야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고 내려가면 서울, 서쪽을 바라보고 내려가면 성남이다. 많은 산의 능선이 그러하겠지만, 이곳 역시 세상의 경계다. 무언가의 경계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그건 비록 인간이 임의로 정한 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 세상에 경계가 존재할까? 지구와 우주의 경계도 카르만 라인, 즉 해발 100km에 있는 임의의 선이다. 사실 지구는 우주의 일부이므로, 어디부터가 지구이고 어디부터가 우주인지 명확하지 않다. 애인과 친구 사이에도 선을 명확히 그어야 하지만, 그 선이라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나라는 것도 세계와 경계가 있는 것일까? 가족도 친구도, 나라는 사람의 경계가 있기 때문에 진짜 나를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진짜 나를 알고 있을까? 또….’


반짝이는 별 같은 야경을 바라보니, 이러한 생각들로 재호의 뇌가 끊임없이 가득 채워졌다. 재호의 머릿속에도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재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발길을 돌려 집으로 내려갔다. 하늘과 지상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뒤로한 채.








“어델 쏘다니다 인제 오나? 밥 무라. 배고프제? 늬 좋아하는 제육볶음 해놨다. 난 병원에서 밥 묵고 왔니라.”

재호의 엄마 희영은 늦게 들어온 재호를 살짝 타박하며 말했다. 동시에 저쪽에서 재호와 희영이 키우고 있는 개, 샘이 파다닥거리며 달려 나왔다. 재호는 낑낑대는 샘을 안고 들어왔다. 부엌에는 제육볶음이 한가득이었다. 재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산성에 들렀다 왔어. 이따 맞춰봐야 알겠지만, 원하던 점수 나올 거 같아. 평소대로 320은 나오겠지.”


“얼라맹키로 아직도 별이나 보러 댕기나…. 그래, 서울대는 가나?”


“간당간당 할걸. 그리고 그거보다 점수 잘 나와도, 가고 싶은데 있어서 거기 갈 거야.”


“… 어데?”


“경희대 수원캠퍼스.”


희영은 앞에 앉아 말을 듣다 말고 재호의 이마를 철썩 때렸다.


“수워언~? 마, 네 성적 가지고 서울 안에도 몬 들어갔다 카믄 사람들이 욕한다! 얼라 때부터 에미 고생 하나 안 시키고~ 말도 잘 들어 생긴 것도 지 애비 닮아서 훤칠 하이 대학만 잘 가믄 여자애들이 줄을 설 긴데, 우야면 좋노, 니 에미 복장 터지는 꼴 보고 싶나? 으이? 서울대 못 가도 서울 안에 대학 다른 좋~은데 쌔고 쌨다 아이가! 입에서 단내가 나게 장사해서 키워 놓았더만~ 하나뿐인 아들이라 카는 게 지방대를 갈라 카네~ 이 문디 자슥아!”


희영이 가슴을 두들기고 삿대질하며 걸걸한 사투리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재호는 익숙하다는 듯 제육볶음을 맛있게 먹었다.


“거기 지방대 아니야. 과가 좋은 데야. 교수들도 유명해서 같은 과 연대보다 커트라인이 더 높아. 무시할 만한 데가 아니라니까? 국내 대학교 중에서 천체망원경도 제일 커.”


“과 이름이 먼데?”


“우주과학과.”


제육볶음을 한가득 입에 물고 무심하게 대답하는 재호를 보고 희영은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리 별 보고 쏘다니더니 기어코 별 공부하러 가나~. 쯧쯧. 돈 잘~벌고 대우받으려면 사짜직업 가져야지! 의사, 판사, 검사, 으이? 거 가면 뭐 되는데?”


“나도 사짜 될 수 있어! 잘하면…. 박사?”


희영은 한 번 더 재호의 이마를 ‘탁’ 쳤다. 찰진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며 재호는 ‘풉’하고 입에 든 밥풀을 뿜었다.


“박사? 박사하고 교수되면 돈 잘 번다 카드나! 지 애비랑 똑~같네~! 내사 마 몰겠다. 니 인생이니, 니 알아서 살그라!”


재호는 히죽 웃으며 제육볶음을 한입 더 크게 입에 넣었다. 그때 안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희영은 전화받으러 들어가면서 재호의 뒤통수를 한 번 더 툭 쳤다. 재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밥을 싹싹 긁어먹은 참이었다. 방 안에 들어가서 전화를 받는 희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희영은 전화를 끊고 나와서 가만히 재호를 쳐다봤다. 재호는 살짝 이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다. 희영은 눈물이 고인 채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듯 말했다.


“늬 아빠 돌아가셨다. 채비해라.”


“… 응.”


재호의 아빠는 폐렴으로 오래 투병 중이셨고, 이미 의식이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였다. 희영과 재호는 아빠가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별로 살갑지도 않고 항상 대학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데다 동료에게 보증사기를 당해 희영을 그리 고생시켰기에, 재호는 아빠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합격 소식은 전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안그래도 재호의 아빠는 마지막으로 문병 갔을 때, ‘니 합격했다 안 했나?’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긴 하지만.


서둘러 옷을 입은 희영과 재호는 택시를 타고 분당 차병원으로 향했다. 택시 안은 고요했다. 가로등과 다른 자동차의 붉은 정지등이 길게 늘어지며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붉은빛은 비처럼 하염없이 뒤로 쏟아졌다. 쏟아지는 빛의 비는 재호의 눈 속을 지나 과거로, 과거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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