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마고산의 석실에는 서늘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왔다. 마고가 내민 그것을 보며 유안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유안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들었다. 생각치도 못한 일에, 유안은 무어라 말해야 할 지 몰랐다.
‘뇌…? 이것이 마고의 뇌라고…? 인육을 먹는 것은 오랑캐 사이에서도 야만족이나 할법한 일인데, 그것도 마고의 뇌를 먹으라니? 아니 애당초, 자신의 뇌를 어떻게 꺼냈단 말인가? 이건 무슨 속임수란 말인가? 내가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고 있단 말인가?’
마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인, 대왕께서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나이다. 일전에 소인은 인간이 아니고, ‘청록의 시간’을 여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씀드린 바 있사옵니다. 소인의 뇌 속에는 ‘청록의 시간’을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주 작은 장치들이 있는데, 그것은 여분이 양이 있사옵니다. 소인은 머리 뒤쪽으로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으니, 소인 걱정은 마시옵소서. 또한, 그것이 뇌 조각이기는 하나 아주 미미한 양이고, 살을 먹는다기보다는 뗄 수 있는 작은 부분을 떼어 드리는 것이오니 인육을 먹는다 생각 마시옵소서.”
유안은 얼굴이 조금 창백해지긴 했으나, 마고가 거짓말을 하진 않을 것이라 여겼다. 또한 이제와 무엇이 두렵겠는가? 고작 아주 조그만 살덩이일 뿐이다. 마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것을 드시면 이제 돌이킬 수 없사옵니다. 소인이 말하지 않고 그냥 직접 옥체 안에 주입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마음 깊은 곳의 변화에는 스스로의 결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의식을 하는 것이옵니다. 의식은 비록 형식이나, 그 의식을 행함으로써 대왕께서는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시는 것이니, 청록의 시간을 여행하는 몸으로 변화할 결심이 서시면 그것을 드시옵소서.”
마고는 큰절을 올린 채로 엎드려 기다렸다. 유안은 그동안 자신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그가 어린 시절 선친께서 역모로 잡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천자께서 마음을 돌리고 유안 자신을 회남의 왕으로 봉하셨을 때는 살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전국의 학자를 모아 지식을 나누고 토론하며 책을 만들 때는, 그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또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 자부했으나, 마고를 만나 그것은 새 발의 피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이것을 먹고 여행을 시작하면, 자신은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 같았다. 마고가 그에게 주는 것은 불로불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마고와,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다. 세상과 지식에 대한 호기심. 마고와 함께 여행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전부다. 그거면 됐다. 유안은 그릇을 들어 올렸다.
“그대를 따르겠네.”
유안은 그것을 집어,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살짝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에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어라고 그렇게 망설였는지 조금 머쓱해질 정도였다.
“자, 그래. 그대의 말대로 의식을 치렀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고는 용머리 아래 있는 의자로 손을 뻗었다.
“대왕이시여, 저기에 좌정하시지요.”
유안은 용머리처럼 생긴 기구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뒤로 눕듯이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마고는 의자에 앉은 유안에게 다가가 책을 건네며 최대한 천천히, 유안이 기억할 수 있도록 말했다.
“여기 이 장치의 사용 방법을 적어 놓았사옵니다. 혹여 소인에게 일이 생기더라도, 여기 적힌 대로 하시면 대왕께서 직접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 들어가는 재료는 적힌 대로 만들어서 이쪽 통에 넣으십시오. 그것을 섞어서 넣고 연기로 만드는 데는 항상 일정하고 사람의 손보다 정확해야 하므로 이 기구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이 기구는 정확하게 액체로 된 약을 만들어 옥체 안에 바늘로 꽂아 넣을 것입니다. 옥체에 들어갈 바늘은 특별하게 금으로 세공된 침입니다. 동시에, 이것을 입에 물고 연기를 들이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손잡이를 당기시고 일각 정도의 시간 동안 계십시오. 그 시간이 끝나면 장치는 저절로 멈출 것입니다. 그다음 여기 이 청록색의 약을 반 숟갈 정도 물에 풀어 눈을 뜨고 얼굴을 담그고 계십시오. 숨을 최대한 참고 계시면 됩니다.”
유안은 신기한 듯 기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걸 얼마나 해야 하는가?”
“매일같이 해서 이천오백일을 해야 합니다.”
이천오백일이라. 거의 7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이미 나이가 들어 손자도 있는 마당에 그렇게 오랫동안 해야 하다니, 유안은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가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설령 집착이라 할지라도.
유안은 팔에 바늘을 찔러 넣고, 관을 입에 문 채로 손잡이를 당겼다. 그리고 누웠다. 석실 가득히 똬리를 틀고 있는 용의 몸통이 큰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자 위에 있는 용의 머리 부분이 유안을 삼켜버릴 듯 입 같은 것이 벌려지며 내려왔다. 그 머리는 유안의 상반신을 덮었다. 마고가 빛을 쪼인다고 했으나 어디에도 빛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고 캄캄했다. 멀리서 동굴 지하수가 흐르는 소리와, 수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수차로 이 장치를 작동시키는 모양이었다. 유안이 연기를 들이마시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침을 꽂은 팔이 뻐근했다. 일각의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각이 지나고, 용의 머리는 유안을 다시 토해냈다. 유안은 팔에 꽂힌 침을 빼고, 관을 입에서 뺐다. 마고가 옆에서 청록색의 약이 담긴 작은 대야를 가지고 왔다. 유안은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얼굴을 담그고 눈을 떴다. 그는 눈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작업이 끝난 후, 유안은 옆에 마련된 작은 침소에 누웠다. 힘은 하나도 없고 몸에 열이 났다. 마고는 그런 그를 옆에서 돌보아 주었다.
유안이 누워서 쉬는 동안, 마고는 문을 열고 석실 밖으로 나왔다. 거기엔 하령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하령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으나, 혹시나 왕과 마고의 은밀한 무엇일까 생각해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마고는 하령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무위장군, 아니 하령. 소인의 부탁을 꼭 들어주시겠소? 친구로서의 부탁이오.”
“무엇입니까? 걱정 마시고 말씀하시오. 당신의 말은 잊지 않고 따르겠소.”
마고는 나무로 된 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문을 불태우면, 석실은 무너지고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불타 없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약 소인과 대왕께 무슨 변고가 생겨 이 석실이 필요 없게 된다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 문을 불태워주시오.”
하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궁 내부 신하들의 동향이나, 천자의 소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겠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책임지고 석실을 소각하겠소.”
마고는 하령의 그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석실로 들어가 유안을 보살폈다.
유안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반나절이 걸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되어 궁으로 돌아온 유안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혹시나 해서 팔짝팔짝 뛰어 보기도 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당연했다. 무엇이든 하루 했다고 뭔가 달라질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유안은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때 마고가 1년 전 만들어 준 신기한 돌이 눈에 띄었다. 유안이 다시 그것을 잡자, 그 돌은 손바닥 위에서 떠올랐다.
‘그래. 당장 변하지는 않겠지. 마고의 말대로 이천오백일을 꾸준히 해 보자. 늘그막에 새로 생긴 취미라고 생각하자.’
매일같이 산속의 동굴로 들어가 오후가 되어서야 나오는 왕을 본 신하들은, 왕이 여인에게 빠져 이상한 약을 하고 있다며 수군거렸다. 몇 년이 지나자, 유안은 자신이 점점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도 약해지는 것인지, 이젠 산을 오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이제는 자신의 몸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유안의 몸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마고는 제대로 되고 있다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을 향하는 것인지, 광기로 향하는 것인지, 신선으로 향하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환각과 환청 속에서 매일매일 용에게 영혼을 먹히는 느낌이 들었다. 유안은 환각과 환청에 먹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했다. 더 이상 자신들과 지식을 논하지 않는 왕을 보고 학자들도 하나 둘 떠난 것 같았다. 사람들로 가득했던 궁은 신하와 군사들을 빼고는 텅 빈 느낌이었다. 내 옆에 있는 마고가 실체인지 상상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허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고독을 느낄 때마다 유안은 마고와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다짐을 되새겼다. 손바닥에서 떠오르는 신비한 돌을 만지작거리며.
그날은 유안이 기구를 이용한 지 이천삼백칠일이 되던 날이었다. 유난히도 큰 달이 뜬 밤, 하령은 궁 안을 순찰하다 한 그림자가 숨죽여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그림자는 소리하나 내지 않고 달밤의 궁 건물 사이를 재빠르게 이동했다.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하령 역시 숨을 죽이고 그를 쫓았다. 그 그림자는 태자궁으로 들어갔다. 하령은 잔뜩 긴장하여 담 위 지붕에 엎드려 그 그림자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그림자는 가만히 태자 유천의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유천은 그의 부인 태자비와 같이 크게 떠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담장 위에 있는 하령에게도 들려왔다.
“정말 대단했어! 그대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요!”
“설마, 마고산의 비밀을 아셨습니까?”
“알다마다! 마고산이야 내가 어릴 때부터 수백 번은 돌아다니던 곳이 아닌가. 안에 지하수가 흐르는 큰 동굴이 있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고, 그곳을 탐험하는 게 내 낙이었지. 동굴 입구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지만, 사실 동굴에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입구 말고도 많아.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곳이 없어서 잘 모르는 거지!”
“너무 흥분하셨사옵니다. 태자께서는 숨을 좀 고르고 말씀하시지요.”
“대왕께서 마고와 그 산속 동굴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두들 궁금해했지. 신선이 된다, 무기를 만든다, 심지어는 마고와 약에 취해 환락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모두들 틀렸어. 내 아버지지만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하핫, 글쎄, 오늘은 드디어 뒤쪽 언덕에서부터 그 석실로 이어지는 어른이 겨우 기어 들어갈만한 작은 통로를 발견했지. 그 비밀의 석실 안에는 말야, 놀라지 말게나. 용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용!”
“…네? 아니 어찌 그런…!! 용?!”
“그래, 그 똬리를 튼 거대한 몸통, 강철 같은 피부, 커다랗게 벌려진 입에서 나와있는 금처럼 반짝이는 바늘 같은 이빨까지…. 군사나 무기 따위가 아니야. 용신을 불러서 언제 천자를 내치고 자신이 천자가 될까 계획하고 계신 거라고!”
여기까지 듣던 그림자는 유천이 있는 방으로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유천과 태자비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그 그림자는 유천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등불에 아른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정체는 뇌피였다.
“듣자 하니…. 태자께서는 마고산의 석실로 가는 다른 길을 아신다구요?”
“… 뇌… 뇌피! 이게 무슨 짓이오!”
태자 유천은 황급히 검을 잡으려 했으나, 뇌피의 검이 더 빨랐다. 유천이 검을 잡기 직전, 달빛을 받는 뇌피의 검이 어느새 유천의 목 바로 앞에서 소리도 없이 번뜩이고 있었다. 유천은 검을 잡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서 식은땀을 흘렸다. 태자비는 옆에서 숨죽이고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용이라…. 용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면, 천자의 군대따윈 일도 아니겠지. 대왕께선 역시 엄청난 일을 꿈꾸고 계셨던 거야…! 사실 회남에 모인 모든 학자들은 천자가 유학을 중시하는 바람에 모두들 쫓겨온 셈이고, 대왕께서 나서서 천자를 폐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모두들 죽게 될 운명일 터….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소. 하지만 용이라…. 그 용이 어떤 것인지 직접 봐야겠네. 그리고 대왕께서 망설이신다면, 어떻게든 우리와 같이 하도록 힘으로라도 설득해야겠지. 자 그럼, 어서 그곳으로 절 안내하시지요.”
유천의 땀이 흘러 뇌피의 검으로 떨어지는 순간, 창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무서운 검기가 번뜩였다. 그 파편 속에서 달을 등에 지고 날아온 자는 바로 하령, 무위장군이었다. 하령의 검은 뇌피의 검을 순식간에 쳐 내리고, 바로 검을 올려 쳐 뇌피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뇌피는 유천의 깃을 잡고 뒤로 누워 하령의 검을 가까스로 피했다. 뇌피는 재빨리 유천의 뒤로 돌아가 검으로 유천의 목을 겨누며 소리쳤다.
“이놈…. 하령! 내 언젠간 너와 검을 다시 맞댈 거라 생각했다….”
“뇌피 공. 그 검을 내려놓으시오.”
“그럴 수야 없지…. 대왕의 비밀을 알았으니.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직접 용의 주인이 되어 천하를 차지하리라!”
쉭! 바람소리와 함께 뇌피의 검은 순식간에 하령의 얼굴로 향했다. 하령은 얼굴을 돌려 피했으나, 뇌피는 검을 비틀며 휘둘렀다. 등 뒤의 검을 하령은 보지도 않고 검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뇌피의 검은, 물 흐르듯 미끄러져 하령의 옆구리를 베었다. 뇌피는 하령과 검을 주고받으면서도 유천의 목을 잡아 조르고 있었다. 뇌피가 유천의 목에 검을 다시 가져가며 말했다.
“그 입구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 아니면 바로 목젖을 두 동강 내줄 것이니…!”
바로 그때, 작은 표창이 하령의 뒤에서 날아왔다. 아무런 살기도 소리도 없는 표창이 달빛에 반짝이며 뇌피의 미간을 향하자, 뇌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뇌피의 왼쪽 눈썹이 표창에 길게 베였고, 피가 흘러 뇌피의 얼굴 반쪽을 붉게 물들였다. 뇌피와 하령 모두 놀랐다.
하령은 자신의 등 뒤에서 표창을 던진 것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뇌피와 유천에게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이 조용하고 서늘한 살기를. 짐승도 귀신도 인간도 아닌 그것. 하령의 등 뒤에서 청록색의 눈이 나타났다. 마고였다. 마고는 하령의 뒤 어둠 속에서, 흰 나삼을 입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뇌피, 처음부터 당신을 주시하고 있었소만….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마고…? 네년이 이렇게 뛰어난 무공을…?”
뇌피가 한눈을 판 사이를 놓치지 않고 하령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뇌피는 유천을 끌어당겨 막아섰다. 하령이 검을 멈칫하자, 뇌피는 유천을 밀어 하령에게 던져버리고 부서진 창문으로 순식간에 뛰어나갔다. 하령이 뒤를 쫓으려 했으나, 옆구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마고…! 부디 저놈을 막아주시오. 아니면 대왕께서….”
“걱정 마시오, 하령. 당신은 태자를 지키고 계시오.”
마고는 이미 궁에 올 때 갖고 왔던 시황제의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창문 밖으로 날듯이 뛰어나갔다. 마고는 은색의 달빛이 내리쬐는 궁에서 뇌피의 뒤를 쫓아갔다. 뇌피의 경공술은 대단했으나, 마고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뇌피는 북문 앞에서 마고에게 바로 따라 잡혔다. 그곳엔 문지기 둘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뇌피는 그 둘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검을 휘둘러 문지기들을 쓰러트렸다.
바로 그때, 뒤쫓아오던 마고가 검을 뽑아 들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보름달 아래 비치는 마고의 청록색 안광은 더욱 섬뜩하게 번뜩였다. 마고의 검기는 뇌피에게 벼락처럼 내리 꽂혔다. 뇌피는 검으로 마고의 검을 막았지만, 뇌피의 검은 바로 두 동강 나며 멀리 날아갔다. 뇌피는 쓰러지며 머리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이마에 검이 스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왔다. 땅에 사뿐히 착지한 마고는 천천히 일어서며 뇌피에게 검을 겨누었다. 뇌피는 자신이 마고에게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뇌피는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잠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느새 마고의 등에 검 끝이 닿아 있었다. 마고는 흠칫 놀랐다.
‘누구지? 이렇게 쉽게 내 뒤를?’
뇌피 역시 놀라 마고의 뒤를 힐끗 보았다. 아까 자신이 베었다고 생각한 문지기였다. 그 문지기는 반으로 쪼개진 투구를 벗고 마고를 쳐다보았다. 뇌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자의 눈이 마고처럼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자가 있었던가? 그자는 마고의 등에 검을 댄 채로 마고에게 말했다. 그러나 뇌피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뇌피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마르고트, 아니 TBPST-BA. 당신 만나기 참 힘들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말이야.”
등 뒤의 목소리에 마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은….”
“그래. 일단 나와 같이 가 주어야겠어. 더 이상 역사를 흐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