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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7. 고독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유안은 하령에게 소식을 들었다. 부상을 입은 하령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뒤늦게 뇌피를 뒤쫓았지만, 이미 뇌피는 역모를 획책했던 오피와 함께 장안으로 도망간 뒤였다고. 그리고 먼저 뇌피를 쫒던 마고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고 보고받았다. 마고가 뇌피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어디론가 도망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태자를 시해하려 했던 뇌피가 장안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뇌피 자신이 살기 위해 천자께 가서 유안을 되려 음해하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죄를 저지른 자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남에게 그대로 덮어씌우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더군다나 유안은 선친이 역모를 저질렀었으니, 더욱 의심을 살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천자께서 불로불사와 선약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회남을 도륙 내 차지할 명분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이미 유안은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지팡이가 없으면 거동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몇 년 전, 천자께서 하사하신 지팡이였다. 유안은 그 지팡이를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태자 유천은 뇌피를 잡겠다며 난리를 치고, 군사와 함께 장안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령은 그런 유천을 말리고, 천자께 상소를 올리자고 했다. 군사를 끌고 가는 것 자체가 역모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혼돈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안은 그 신비한 돌을 잡아 들었다. 손가락을 놓자, 여전히 그 돌은 손바닥 위에서 떠올랐다. 그 돌을 보고 있자 마고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설령 죽음이 눈앞에 있게 되더라도, 대왕께서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유안은 돌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무위장군, 마고산으로 갈 테니 좀 도와주게.”


“대왕이시여!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제 천자의 마음이 변하여 군대가 이곳으로 쳐들어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 있는 학자들과 저희 신하들은 대왕께서 지니신 충심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모두가 모여 상소를 올리고 읍소한다면…!”


유안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며 모여있는 대신들에게 말했다.


“마고산에서 과인이 하는 일은 불로장생을 위한 것도 아니요, 역모를 위한 것도 아니라, 인간을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할 위대한 일이다. 그것을 천자께서 직접 보시고 이 돌을 직접 들어 보신다면, 아마도 과인을 이해할 것이다. 혹여 이해받지 못해 죽는다면, 과인이 만든 것들은 그저 그런 것일 테지. 그러니 자네들은 괜한 화를 입지 말고, 떠날 사람들은 떠나도록 하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 과인에겐 마고와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네.”


하령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유안을 부축해 궁을 나갔다. 신하들과 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해서 남겠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궁 안은 조용해졌다.


마고산 석실 밖에는 몇몇 병사와 하령이 지키고 서 있었다. 유안은 이미 이천일이 넘게 기구를 이용했고, 마고의 책도 매일 봐 왔기에 어떻게 조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침을 꽂고 입에 관을 넣은 다음 손잡이를 당겼다. 용의 머리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유안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끝난 뒤에는 청록색의 약물로 눈을 씻었다. 이제 넉 달만 하면, 내가 청록색의 눈을 갖게 된다면, 마고를 만날 수 있으리라. 유안은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문틈으로 들어와 유안을 잠에서 깨웠다. 유안은 눈을 떴다. 몸이 개운했다. 힘이 없고 여기저기 아프고 눈도 잘 보이지 않던 몸의 병이 싹 나은 듯했다. 그날은 기구를 이용한 지 이천오백십삼일이 되던 날이었다. 유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팡이가 옆에 있었으나, 지팡이도 없이 걸어 보았다. 다리에 힘이 넘쳐났다. 유안은 기뻐서 마구 내달렸다. 남아있던 시녀와 신하들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보았다. 유안은 대전 한가운데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마고는 이 시술을 다 마치면 ‘청록의 시간’으로 갈 수 있는 몸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엔 어떻게 가지? 또 그곳을 간다 한들 거기서 어떻게 여행을 한단 말인가? 마고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유안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고가 그 뒤는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밖에서 하령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대왕이시여! 천자의 군대가 회남궁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유안은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 결국 올 것이 왔군…. 과인은 피하지 않겠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느니라. 자네와 다른 신하들 모두 궁궐에서 나가 집으로 피하도록 하게.”


그동안의 병약한 유안과 달리 똑바로 서서 말을 하자 모두들 놀랐다. 그 모습을 보고 하령이 말했다.


“대… 대왕께서 하시던 일이 완성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천자께도 어서 알려서 부당한 음해를…. 소신이 곁에서 옥체를 지키겠사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무위장군, 자네는 남월에서 왔다고 했었지. 가족을 데리고 남월, 아니…. 남월보다 더 남쪽으로 가도록 하여라. 지금은 남월이 버티고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게야. 천자는 무서운 정복의 황제이니, 언젠가 남월도 정복할 테지. 더 남쪽으로 가서 자네 집안에서 내려온다는 그 무술을 지켜내도록 하여라. 선대의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곧 죽을 왕의 곁에 있다가 개죽음당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지. 도왕후와 태자도 되도록 안전한 곳으로 모시게.”


“허나…!”


“어서! 마지막 어명이니라!”


유안의 외침에 하령은 눈물을 머금고 천천히 큰절을 올렸다. 하령은 슬픈 마음을 가다듬고, 뒤돌아 궁궐 밖으로 나갔다. 그때 하령의 눈에 마고산이 들어왔다. 그리고 오래전, 마고의 부탁이 떠올랐다.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 문을 불태워주시오.’


하령은 마고산으로 향했다. 다른 신하들도 우물쭈물거리다, 하나둘씩 궁궐 밖으로 도망쳤다.


유안은 텅 빈 대전에 홀로 서 있었다. 고독했다. 평생 다른 이들과 지식을 나누는 즐거움에 빠졌으나, 요 7년 동안은 자신을 끝없이 고독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자신을 알아줄 이는 마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법이다. 자신은 마고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군대를 보낸 것을 보면 역시 천자는 유안을 알아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유안은 혹시나 자신이 잊은 것은 없는지, 마고산의 석실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유안은 서둘러 궁을 나섰다. 그런데 마고산 동굴자락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곧 뒤이어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안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 철렁했다. 유안은 절망에 가득 차 소리 질렀다.


“안돼!”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천지를 울리는 그 말발굽소리는 유안을 더욱더 절망으로 빠트렸다. 유안은 허둥대다 옆에 있는 연못을 발견했다. 그곳에 숨을까 하는 생각에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연못에 유안의 얼굴이 비쳤다. 유안의 눈은 마고처럼 점점 청록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유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천자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쫓아오는 군대를 보니 대왕의 의연한 마음은 사라졌다. 무서웠다. 유안은 자기도 모르게 살기 위해 뛰었다. 허둥거리며 뛰다 신발은 벗겨지고, 상투는 풀어져 머리가 풀어헤쳐졌다. 유안은 뛰다 넘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다시 일어나 달렸다. 군사들은 앞에서 흙투성이로 허둥지둥 도망가는 남자가 회남의 왕이라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말을 탄 군사들은 유안을 그대로 짓밟고 지나갔다.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리며 한 인간의 비명을 집어삼켰고, 유안은 하찮은 조각처럼 펄럭이며 뒹굴었다. 한참 뒤 군대가 지나가자 먼지가 걷히고, 그 속에서 여기저기 찢기고 밟힌 유안의 시체가 드러났다. 유안의 눈에서 빛나던 청록빛은 마치 불이 꺼지듯 천천히, 천천히 꺼져갔다.








천자, 한 무제武帝는 유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대는 궁을 샅샅이 뒤졌으나, 불로장생과 관련된 문서나 장치, 선약은 찾을 수 없었다. 화가 난 천자는 곧 유안의 봉지를 몰수했고, 유안에게 받았던 책 <홍렬>을 태워버리라 지시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깝게 여긴 신하들은 <홍렬>이 잡학으로서 가치가 있으니 54권 모두 태우지 말고, 그중 내편 21권은 남기자고 천자께 간곡하게 건의했다. 그리하여 <홍렬>은 21권만 남기고 태워졌으며, 신하들은 역모죄를 저지른 유안을 비하하고 그 책의 의미를 평가절하하여 <회남자淮南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회남자>는 회남에 있던 ‘누군가’의 책이라는 뜻이다.


한편, 회남국에 살던 사람들은 마고라는 여인이 대단한 지식을 갖춘 자라는 것은 잊고, 왕을 홀려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만 기억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싫어하여 마고의 이야기를 팔공八公이라는 여덟 신선 노인의 이야기로 둔갑시켰고, 마고산은 팔공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몇 백 년 동안이나 백성들은 역모를 저지른 죄인의 음식인 두부를 감히 만들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두부를 기록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게 죽은 자들의 모든 것은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찢겨지고 잊혀져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유안이 신선이 되었다고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기원전 122년, 유안의 나이 5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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