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유안은 서고로 갔다. 서고에는 그동안 지방 각지에서 모은 다양한 사상의 책들과, 얼마 전 완성한 <홍렬>의 사본이 있었다. 마고가 유안의 책 <홍렬>을 읽어보겠다고 했기에, 서고를 내어주어 며칠 동안 보도록 했다. 유안이 서고에 들어가 보니, 마고는 아주 흥미로운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서고의 한쪽 창에서는 햇빛이 드리워져, 서고를 가로질러 마고를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여전히 숭고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숭고한 매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고는 아름답긴 하였으나 혼을 뺄 정도의 미녀도 아니요, 색기가 넘치는 자태로 유안에게 교태를 부리지도 않았다. 외모로 보자면 자신의 부인인 도왕후가 더 빼어났으니. 그러나 지식에 대한 그 순수한 갈망과 한치도 흔들림 없이 예의 바른 자태, 그리고 그 청록색의 기묘한 눈이 그렇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청록색의 눈.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려고 애쓰며 유안은 마고에게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느냐?”
마고는 유안이 옆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 책은 듣던 대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훌륭하지만, 대왕의 대단한 통찰이 느껴지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소인은 그것이 너무도 흥미롭습니다.”
“두 부분이라?”
유안은 약간 실망했다. 수많은 내용 중에 단 두 가지라니.
“바로 이 부분, 농사를 짓기 위해 1년을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24개로 구분해 절기를 만들고, 24절기의 이름을 붙인 것 말입니다. 이 이름들이 정말 훌륭합니다. 소인도 이 나라의 역법에 따르면, ‘대설大雪‘에 태어났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생일에 유난히 눈을 본 날이 많았사옵니다. 많은 경험과 학설, 주역의 이치 등을 따져 만드신 것이겠으나, 이 24절기의 이름은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잊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천 년이 지나도록 세간에 오르내리며, 앞으로 세상에 세워질 많은 나라의 근간이 되겠지요.”
마고의 극찬에 유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조금 겸손하게 대답했다.
“글쎄,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24절기의 이름을 정리한 것일 뿐이니라. 24절기를 과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름을 정리하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긴 했지. 각자 지방마다, 나라마다, 학파마다 조금씩 다르게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래,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인고?”
“왕고래금위지주往古來今謂之宙, 천지사방상하위지우天地四方上下謂之宇.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것을 주宙라고 하고, 네 방향과 위아래를 우宇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우, 우주. 이 세상을 시간과 공간으로 보고, 그것이 합쳐진 시공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를 '우주'라는 새로운 단어로 집약하시다니……. 이것은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서역에서도 해내지 못한 통찰이십니다. 대왕의 통찰에 소인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옵니다. '우주'. 앞으로 영원토록 남을 위대한 말이 될 것입니다. 이 책에 쓰여진 다른 성어들도 역시 훌륭하고 수천 년 뒤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말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두 부분에 비하면 미약하옵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해맑은 얼굴로 설명하는 마고를 보자 유안은 다시 청춘이 된 듯이 즐거웠다. 이 여인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영원의 시간에서 존재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인간의 생각이 기호로 변해 가득한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마고와 나 단둘이.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마고를 오래전부터 이미 연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안은 홀린 듯 천천히 손을 들어 마고의 어깨에 얹었다. 마고의 어깨는 따듯했다. 마고는 고개를 조금 돌려 유안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고는 가만히 그 흰 손으로 유안의 손 등을 살포시 포개어 얹었다.
“… 부디 지금은 저를 여인으로 취하지 마시옵소서.”
마고의 작은 목소리에 유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황해서 손을 거두려는 찰나, 마고는 유안의 손을 꼭 잡았다.
“소인을 그저 하나의 여인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러하셨듯이 학자로 대하여 주소서. 그래야 저희의 이 즐거운 대화가 달콤하지만 금세 시들어 버리는 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향으로 남을 것입니다.”
유안은 마치 나쁜 짓을 하다 엄마에게 들킨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자신이 왕이라는 것도 잊고 말했다.
“미… 미안하네.”
그리고 유안은 그 앞 작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혼란스러웠다. 왕이 마음에 드는 여인을 취하고 첩을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영원히 계속될 수 있었던 시간을, 자신의 실수로 깨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고는 그런 유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떼었다.
“소인, 언젠가 대왕께 청록의 시간에서 왔다 하였사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마고가 화제를 돌리자, 유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궁금하다마다! 내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어쩐지 곤란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고 있었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있지 않은가. 그대가 과인에게 말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
마고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청록의 시간이란, 모든 시공을 관통하는 의식의 강이며 초월의 세계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의식은 그곳에서 유래하였지요. 그곳에 들어가면 과거도, 미래도, 중원에서 서역까지 모두 내 집에서 옆집으로 드나들 듯이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전설로 내려오는 신선이라 불리는 자들은 그곳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이들일 지도 모릅니다.”
유안은 잠깐 멍해졌다. 지금까지의 보아온 마고의 지식과 언행으로 보아, 이 여인은 검증되지 않은 허황된 것은 믿지 않으며 대단히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때문에 학자들과의 논쟁에서도 도교와 같이 상제나 신선들의 이야기에 별로 말을 섞지 않아, 나이 든 도가 학자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던 마고가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초월의 세계…. 그대가 그런 말을 하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만약 그렇다면…. 그대가 정녕 선녀란 말인가?”
“대왕께서 선녀라 부르고 싶으시다면 선녀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저는 땅 위에 발을 딛고 여행하는 여행자들과 같은 그저 여행자일 뿐입니다. 단지 앞날을 보고 왔으며, 또한 과거를 살다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을 뿐이지요. 저의 눈을 보시오소서. 제 동공이 청록색인 것은 ‘청록의 시간’에서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유안은 다시 한번 마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청록의 안광이 선명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 눈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구나.”
“황공하옵니다, 대왕이시여. ‘청록의 시간’이란, 모든 생명이 죽으면 의식이 가서 닿는 곳입니다. 그곳은 의식의 강이며, 우리의 의식은 그곳의 일부가 흘러 들어왔을 따름이지요. 비유하자면 인간의 의식은 '청록의 시간'의 일부가 매듭으로 묶여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청록의 시간'은 대왕께서 정의하신 우주, 즉 시공간보다 더 복잡한 곳이기 때문에 인간이 죽으면 그 매듭은 풀리고, '청록의 시간'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인간의 의식은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즉 무에서 온 의식은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만약 매듭이 풀리지 않고 어떻게든 형상을 유지해 의식이 청록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눈부시게 밝은 청록색에 길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청록의 시간’을 여행해서 원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육신과 정신, 새로운 눈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아주 먼 훗날, 그런 비전을 연구한 사람들의 실험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저를 시기한 다른 자들이 절 죽이려 했었고, 저는 ‘청록의 시간’을 통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이어지자, 유안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실험으로 태어났다면 역시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쫓겨 도망 다녀야 하는 마고의 인생이 너무나 가여웠다. 의식의 실체, 그리고 그 실체를 통한 시간여행, 그리고 마고. 마음이 복잡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다른 이야기들은 과인의 지식을 벗어난 것들이니, 그저 그대의 말을 믿겠네. 허나 그대가 죽음으로부터 쫓겨 다녀야 했던 삶이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군. 어리석은 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남을 두려워하는 자는 두려움을 혐오로, 폭력으로 나타내기 마련이지. 겁먹은 개가 사람을 무는 법…. 하지만 이제 그대의 말에 따르면, 그대는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이 아닌가? 더 이상 근심은 없지 않은가? 그대는 이제 선녀와 다름없을 터인데.”
마고는 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지만, 저는 불로불사의 선녀가 아닙니다. 비록 범인들의 육신보다는 견고하나, 때가 되면 모든 사슬은 끊어져 모래로 지은 집처럼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지친 이 고독한 여행길에, 대왕처럼 열린 마음을 가진 분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고가 곧 죽기라도 할 것 같은 말을 하자, 유안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마고를 향한 연심을 깨닫자마자 이별이라니. 유안은 가슴이 저려왔다.
“그럴 수가…. 이제 그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인가? 이제 와서 그대를 잃는 것은 삶에서 취하지 않는 술을 끊임없이 마시는 것이고, 뜨지 않는 달을 기다리는 밤과 같을 것이네…. 과인이 어찌 도와줄 방법은 없겠는가?”
겨우 말을 잇는 유안은 목이 메었다. 마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은 유안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아 갔다.
“대왕이시여. 소인과 여행을 같이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