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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3. 피우지 못한 꽃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시간이 흐를수록 마고는 그 놀라운 지식을 뽐내었다. 홍렬서원에서는 학자들이 마고의 신기한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마고가 여인이었기에, 그를 투기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 가운데 뇌피와 오피라는 학자는 특히 유안의 총애를 받는 마고가 탐탁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그들은 홍렬서원의 뒷산에서 산책을 하는 중이었다.


“이보게, 뇌피. 자네는 마고라는 여인을 어찌 생각하는가?”


뇌피는 오피의 질문을 듣자 바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고. 그 여인이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무엇보다 겸손한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대왕의 총애를 받고 있지. 난 마고 그 여인이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네.”


오피는 대답을 듣고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그 여인의 말을 듣다 보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느낌을 받는다네. 그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린아이에게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우니, 동물이 물어다 놨다거나, 물어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것 말일세. 마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말로 설명해 주고는 있지만, 그 너머를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맞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난 말야, 오피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마고의 그 태도가 마음에 걸리네. 지식을 나눠주려고 하기보다, 대왕의 환심을 사는 데 더 집중하는 것 같단 말이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이, 첩이나 후궁이 되려고 그러는 게 아니겠는가?”


“대왕께선 워낙에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시지. 지금도 이미 마고에게 연심을 깊게 가지신 것 같아 보이네.”


“쯧쯧, 이러다 우리가 이룩한 학문의 가치가 한갓 여인 때문에 다 무너져 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


뇌피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들어 툭툭 갈대들을 쳤다.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갈대는 툭툭 잘려 나갔다. 뇌피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만약 우리의 대업을 망가트리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그 여인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오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큭큭, 뇌피 자네를 막을 수 있는 자는 회남에 없지….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어서 대왕과 함께 정….”


그때 저 멀리에서 징 소리가 울렸다.


“이크, 벌써 오시가 되었는가. 밥 먹으러 가야겠네.”


“그래, 어서 가세! 오늘은 두부가 나온다고 하던데!”


두 학자는 서둘러 산에서 내려갔다. 그러나 산속 깊은 곳에서 어떤 시선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 둘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초록의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 서늘한 청록의 안광이.








하령은 자신이 홍가 패거리를 도륙 냈다는 이야기가 왕에게 전해지고, 포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어느 정도 예상하였다. 마고가 여인이므로, 만약 자신이 그 흉악한 패거리를 도륙 냈다는 말을 했다면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왕이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말할 수 없었을 터. 분명 자신과 숙영의 핑계를 댔을 것이다. 그래서 하령은 그날부터 왕의 사신이 올 때까지 집에 묵혀 둔 검을 꺼내어 다시 몸을 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궁에서 대신이 당도해 숙영과 하령에게 궁으로 들라는 어명을 전했다. 그러나 숙영은 홍가 패거리와의 칼부림 이후로, 집 밖에는 나갈 생각도 못 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령은 숙영의 방으로 가 조심스레 말했다.


“도련님과 제가 그 여인을 구했다고 해야 도련님의 체면도 서지 않겠습니까. 똥까지 지린 것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야잇, 이… 이놈아! 이 버러지 같은…. 못된… 아니 하령 씨, 하령 선생, 하령 장군님. 그 말만은 제발…. 알았으니,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어전에 나가기 힘들다고 전하거라….”


숙영은 방 안에서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끙하는 소리가 마치 어린애의 투정 같기도 했다. 하령은 숙영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전쟁통에 죽은 자신의 아들이 생각나 안쓰러웠다.


“어명을 거역하면 아니 되옵니다. 어서 몸을 단장하고 채비를 하시지요.”


숙영은 투덜대며 일어났고 느릿느릿 관복을 입었다. 하령은 검을 챙기고 숙영과 어명을 전한 대신과 함께 길을 나섰다. 예서 궁까지는 한 식경이면 가는 길이다. 어깨가 축 늘어진 숙영을 나귀에 태워 뚜거덕 뚜거덕 가다 보니, 어느새 성 북문에 도착했다. 하령 일행과 동행하던 대신이 소리치자, 성문이 끼이익 열렸다.

하령은 들어가며 문 주위의 문지기들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중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그는 언뜻 하령을 쳐다보았는데, 눈동자가 청록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가. 하령도 파란 눈은 서역에서 온 상인을 통해 몇 번 보았지만, 청록색의 눈은 본 적이 없었다. 마고라는 여인도 그렇고, 왜 이렇게 자주 보이는 것일까. 혹시 저자도 마고와 관련이 있는 건가. 하령은 가만히 숙영의 귀에 속삭였다.


‘도련님, 저기 문지기 중에 한 명이 그 여인과 똑같은 눈 색깔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안 그래도 축 처져 있던 숙영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 아~ 몰라, 몰라, 귀찮아. 듣자 하니 서역인들의 눈알 색이야 뭐 노랬다 파랬다 여러 가지 아닌가. 청록색이 요즘 유행인가 보지.’


하령은 입 한쪽을 이죽거리며 숙영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편견이 없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하지만 이제 하령도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연무장에 거의 다 왔기 때문이다. 수십 년 남월에서 검술을 갈고 닦았지만, 사실 하령은 장군이 아니라 고작 삼십 명을 이끄는 단장이었을 뿐이었다. 과거 자신을 진위에게 팔았던 상인이 값을 높게 받으려고 거짓을 말한 것이었다. 하령은 검술에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허나 무언가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세상이 그것을 알아주는 건 다른 얘기다. 또한, 잘하는 것과 출세는 다르다. 그러니 애초에 자신의 검술을 이렇게 높은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는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하령은 족했다.


연무장에 들어서자, 홍가 패거리를 홀로 도륙 냈다는 사내를 보기 위해 많이도 모여 있었다. 앞자리엔 학자들이 앉아 있었고, 그 사이에 마고도 보였다. 하령은 마고에게 목례를 살짝 했고 마고는 싱긋 웃으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하령은 마고가 한쪽 눈을 왜 깜빡이는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자신이 하령을 추켜세웠다고 언질을 주는 것이라고 눈치챘다. 잠시 후, 회남왕 유안이 등장했다.


“대왕께서 들어오십니다!!”


연무장의 모든 이들은 일어섰고, 하령과 숙영은 넙죽 엎드렸다. 유안이 자리에 앉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유안은 그 둘을 보더니 입을 떼었다.


“그래, 자네가 진위 공의 아들 숙영이고, 그 옆은 하령이군. 둘이서 홍가 패거리를 도륙 냈다지.”


숙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그것은 저 여인….”


하령은 깜짝 놀라 엎드린 채로 숙영의 정강이를 찼다. 숙영은 말하다 말고 꽥하고 나귀가 궁둥이를 맞은 소리를 내었다. 숙영이 곁눈으로 돌아보자 하령이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까딱하며 무언가 언질을 줬다.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본 유안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러자 숙영은 정강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참으며 아뢰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대왕이시여. 실은 소인이 그날 이후로 많이 긴장해서인지 골병이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실수한 것이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인은 그저 여인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모든 건 여기, 이, 하령의 공이옵니다. 소인은 검을 쥐는 법도 모르옵니다.”


유안은 피식 웃었다.


“과인도 글공부만 하는 유약한 네 아비를 잘 안다. 너도 필시 그러할 것인데, 네가 직접 홍가 패거리와 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느니라.”


그리고 유안은 하령을 돌아보았다.


“네 이름이 하령이라 하였느냐.”


“그러하옵니다.”


“듣자 하니, 남월의 장수였다고.”


“아니옵니다. 소인 나름 검에 재주는 있사오나, 그 정도로 출세하지는 못하고 고작 수십의 부하들을 통솔하는 정도였사옵니다.”


“그래. 긴말할 것 없이, 내 너의 재주가 보고 싶어 불렀느니라. 어디 보여줄 수 있겠느냐.”


“미천한 소인의 검술을 부디 어여삐 보아주소서.”


숙영은 거의 기다시피 후다닥 연무장의 단상에서 벗어났고, 하령은 몸을 일으켜 세워 평생 남월에서 익혀온 검술의 기세를 잡았다. 남월이라는 나라는 진나라의 장수였던 한족 장군 조타가, 중원의 남쪽 끝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였다. 원래 남월의 토착민이었던 하령은 대대로 내려오던 검술을 익혔었으나, 한족인 조타가 쳐들어와 나라를 세운 이래로 남월 토착민의 검술은 멸시받고 출세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령에게 지금은 그 설움을 제대로 갚을 기회였다. 나의 검술, 내 민족의 검술이 이리도 훌륭하다는 것을.


흠! 하령은 무거운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내질렀다. 하령의 검술은 화려하지 않고 절제되어 있었으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허공을 찌르고 베었다. 하령은 팔을 굽힌 채로 검을 둥글게 휘두르고 무릎으로 올려 차며, 칼 손잡이로 내리치는 동작 등을 선보였다. 모두 한나라의 검술에서는 보기 힘든 기묘한 동작들이었다. 검을 순식간에 빠르게 다섯 번 연속으로 질러내는 동작은 너무도 빨라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단상 아래에서 짚단을 위로 던졌다. 하령은 뛰어올라, 공중에 뜬 짚단을 두 동강을 내고 착지했다. 실수하지 않고 해냈다. 하령은 숨을 크게 내쉬며 만족한 듯 일어섰다.


검술 시연이 끝나자 숨죽이던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그때 마고가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마고에게 가자, 마고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 손뼉을 멈추었다. 종종 마고는 서역의 전통이라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으니,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안은 마고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웃더니, 숨을 몰아쉬는 하령에게 말했다.


“듣던 대로 너의 공부가 대단하구나. 날래기는 제비와 같고 그 힘은 맹수와도 같도다.”


“황공하옵니다.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비록 단순해 보이지만 실전적인 동작들이고, 매우 빠르고 힘이 있어 홍가 패거리를 도륙 냈다는 그 이야기가 이제 믿어지는군. 자, 어떻게 보셨소, 뇌피?”


아래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뇌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왕께서 말씀하신 부분들은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이해가 가지 않는 동작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실전에서도 효용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긴 합니다. 초식은 조금만 배우면 누구나 화려하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검을 맞대고 싸우는 건 다르지요.”


“하하하! 회남에서 검술 하면 또 자네가 빠질 수 없지. 어떤가. 한번 저자의 검을 시험해 보는 것이?”


생각 못 한 제안에 하령은 살짝 긴장했다. 게다가 보아하니 상대는 높은 신분인데, 자칫 생채기라도 내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적당히 했다가는 되려 자신의 검술이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난처하게 되었다.


“대왕께서 하명하시니, 소인 한번 검을 맞대어 보겠나이다.”


뇌피는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하령은 옆에 있던 병사에게 말했다.


“목검을 주시오.”


그러자 뇌피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목검 따위로 어찌 검술의 진의를 알 수 있으랴! 사내라면 진검으로 맞대어봐야 하지 않겠소?”


하령이 놀라 쳐다보자, 뇌피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하령은 망설이다 다시 진검을 들었다. 다른 병사가 뇌피에게 검을 가져다주었다. 뇌피는 검을 빼어 숨을 가다듬고 조금 휙휙 돌렸다.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기세를 잡는데, 그 눈에 살기가 서렸다. 나이는 있으나 범상치 않은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봐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령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하령은 그보다 훨씬 서늘한 눈, 빠르며 강한 검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마고의 눈과 검이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그 검기가 하령의 눈에 새겨져 있었기에, 눈앞에 고수가 있었음에도 두렵지 않았다. 하령은 마고를 슬쩍 보았다. 바로 저 청록색의 눈이다. 마고는 하령을 똑바로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령은 마음의 요동이 가라앉았다. 숨을 크게 내쉬며, 뇌피를 보고 기세를 잡았다.


뇌피는 검을 천천히 흔들거리며 하령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하령의 들숨과 날숨 사이 그 애매한 찰나의 순간, 번개같이 훅 달려들었다. 하령의 시야에서 뇌피가 사라졌다. 뇌피는 어느새 하령의 밑으로 파고들어, 바람처럼 검을 위로 올려 쳤다.


챙!


하령은 뇌피의 검을 검의 코등이로 막아내며, 팔꿈치를 접은 채로 빙글 돌려 검의 손잡이로 뇌피의 손등을 꺾어 내리쳤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뇌피의 검은 땅으로 떨어지고, 하령의 검이 뇌피의 목 앞에서 멈추었다. 아까 보았던 그 동작이었다! 유안은 벌떡 일어났다.


“그만!”


하령은 검을 거두고 머리를 숙였다. 뇌피는 손등을 만지며 일어났다. 손등이 아파서인지, 살짝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과연, 아까의 동작은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이었군. 의심해서 미안하오. 훌륭한 검술이네. 그 검술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인의 검술은 그저 저희 집안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남월 남서쪽 지역에서는 조금 알려져 있습니다. 그쪽 말로 ‘끄라비’라고 불립니다.”


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왕이시여, 이자의 검술은 생소하나 그 공부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검술이면 충분히 홍가 패거리를 도륙 냈을 것이옵니다!”


유안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하하! 과인은 아주 기쁘도다. 이런 인재가 가까이에 있었다니, 참으로 세상은 모를 일이구나. 하령에게 쌀 열가마와 은자 열 냥을 하사하고, 궁의 경비를 맡는 무위장군으로 임명한다!”


하령은 엎드려 절하였고, 숙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유안과 하령을 번갈아 보았다. 숙영의 아버지인 진위는 냉큼 엎드리며 숙영의 뒤통수를 때렸다. 하령은 엎드린 채로 크게 외쳤다.


“이 미천한 소인을 알아주신 대왕께 충성을 바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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