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회남왕 유안은 이제 막 천자에게 <홍렬鴻烈>이라는 54권의 책을 완성해 바치고 온 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부친이 벌인 일에 대한 속죄와도 같았다. 부친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천자께서는 그 아들인 자신을 다시 회남왕에 봉했다. 유안은 천자께 그 은혜를 갚고 싶었다. <홍렬>은 지금 현존하는 천하의 모든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며, 노장사상을 중심으로 제국에 있는 여러 학문을 통합하는 책이었다. 다들 자신이 말이 맞다며 새로운 사상을 만들기 바쁜 이때에, 유안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길 원했다. 그리하여 어느 한 사상에 치우치지 않는 불멸의 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만든 것만으로도, 유안 자신은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길 것으로 생각했다. 책을 받은 천자 역시 크게 기뻐했다.
책을 만드는 동안 중원 각지의 학자들이 회남궁을 드나들었고, 난상 토론을 했으며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고 애썼다. 유안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책이 다 만들어진 다음에도 꽤나 많은 학자들은 궁에 남아서 새로운 것들을 사색하거나 실험하고, 유안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오늘은 천자께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여로는 길고 험했기에, 따듯하게 덥힌 물에 몸을 담그고 저녁도 거른 채 쉬고 있었다. 그때 시녀 하나가 가림막 너머로 들어왔다.
“대왕이시여, 아뢰옵기에 황송하오나 한 여인이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유안은 피곤했으나, 여인이라는 말에 조금은 솔깃했다.
“여인이라? 그래, 어디서 온 누구라고 하더냐?”
“그 여인은 자신의 이름을 마고라고 하며, 먼 서역에서 학문을 닦던 사람이라 말하였습니다. 회남의 왕께서 온 천하의 학문을 집대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글자라도 보탬이 되고자 길을 떠났는데, 중간에 길을 잃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당도했다 하옵니다.”
“음…. 늦어도 너무 늦었구나. 하지만 그렇게 고생해서 학문을 나누고자 왔다 하니, 안 만나볼 수가 없겠군. 학자들이 모여 있는 홍렬서원으로 안내하라. 과인이 곧 가겠다 전하라.”
몸을 닦고 옷을 챙겨 입는 동안 유안은 호기심이 생겨 피곤이 싹 가셨다. 여인이 학문이라? 간혹 글에 재주가 있는 여인이 있기는 하나, 아주 드문 일이다. 하지만 먼 서역에서 왔다고 하니, 그곳은 우리와 문화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유안은 그 먼 길을 찾아온 여인의 재주가 어디까지 통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유안이 홍렬서원으로 들어서자, 그 여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차가운 백옥을 조각한 것 같은 피부에 칠흑 같은 머리칼, 무표정하지만 매혹적인 이목구비. 무엇보다 여인이 눈을 치켜뜨자 그 청옥과도 같은 청록색의 눈빛에선 어렴풋한 안광까지 풍겼다. 여인으로서 매력을 느끼기보다, 인간보다 더 우월한 존재처럼 숭고함이 느껴졌다. 선녀. 그 단어가 유안의 뇌리에 맴돌았다. 유안이 자리에 앉자, 모여있는 학자들 사이로 여인이 걸어 나와 큰절을 올렸다.
“그래, 먼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고.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고라고 하옵니다.”
“성은 없는가?”
“부모가 없이 태어난 미천한 몸인지라, 따로 성은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다.”
“마고. 독특한 이름이야. 그 이름에 무슨 뜻이 있는가?”
그러자 엎드려있던 마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며 말했다.
“먼 길을 여행했지만, 미천한 소인의 이름에 관해 물어보는 것은 대왕께서 처음이옵니다. 과연 회남국의 왕은 세상의 모든 일을 궁금해하며 편견 없이 학문을 대한다는 세간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소인 너무도 기쁩니다. ‘마고’는 본디 발음하기 어려운 서역의 이름을, 동방의 이 나라의 말로 음차한 것입니다. 본래 이름은 ‘마르고트’이며, 서역의 중원에 사는 갈리아족의 이름이고 조개 속에서 만들어진 ‘진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름은 사람에게 정체성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오랜 시간 갈고 닦여져, 인간 세상에서 빛나는 보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부르실 때 의미도 같이 생각해 주셨으면 하나이다.”
마고의 대답을 들은 유안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학자들은 웅성거렸다. 여인이 스스로 이름을 짓다니? 그리고 스스로 미천하다고 하지만 그 말에 느껴지는 기품과 수준이 너무 높지 않은가? 유안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먼 곳에서 왔다면서, 이곳의 말은 어떻게 배웠는가? 마치 평생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하는군.”
“소인의 여정은 아주 길었기 때문에 오는 지역마다 나라마다 그곳의 말을 익히면서 올 수 있었사옵니다.”
“그래, 그대는 무슨 길을 지나왔는가?”
“소인 청록의 시간을 지나 대도를 거쳐 이곳에 당도하였습니다. 학자였던 스승으로부터 서학의 이와 기를 익혔으며, 대도를 거치는 동안 공자의 예禮, 맹자의 의義, 노자의 도道를 익혔습니다.”
길에 대한 질문은 공부와 예법을 익혀 살아온 인생에 대해 묻는 중원의 방식이다. 이 여인은 그것을 꿰뚫고 있었다. 유안은 대견하게 생각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그곳에선 아르키메데스라고 불립니다. 아마 들어 보신 적은 없으시겠지만, 서역에서는 아주 훌륭한 학자이십니다. 특히 수리와 역학에 밝으시고, 신기한 전쟁 무기를 만드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청록의 시간’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생명이 가진 의식의 길을 관통해 왔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의식의 길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유안은 그 대답을 듣고 조금 갸우뚱했지만, 서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어 수긍했다.
“흠…. 재미있는 표현이로군. 아무리 자신의 학문을 나누고자 한다고는 하나, 천 리 길 여행은 목숨을 걸고 와야 하는 길이다. 굳이 이 먼 곳까지 온 연유는 무엇인가?”
“아뢰옵기에 황공하오나, 두부 때문이옵니다.”
홍렬서원에 모인 학자들은 술렁거렸다. 두부는 유안이 얼마 전에 고안해 낸 새로운 콩 요리법이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아 순식간에 퍼져 나갔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먼 길을 왔단 말인가? 유안은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두부?”
“그러하옵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마고는 자세를 고쳐 잡고 정좌를 한 뒤,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어갔다.
“콩은 사람의 몸에 더없이 좋으나, 그 질감이나 맛이 퍼석하거나 텁텁하여 먹기를 꺼리는 백성들이 많사옵니다. 또한 콩은 소화도 잘되지 않아 가난하고 힘이 없는 백성들이 먹기엔 불편한 곡식이지요. 대왕께서는 콩의 영양분은 그대로 하되, 그 물질성을 변형시켜 모양과 식감이 완전히 달라진 음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가루를 내어 반죽을 만드는 것이나, 데치고 끓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더욱더 작은 단위에서 변화를 주었으나, 그 근본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대왕께서 학문에 대해 가지는 마음가짐과도 같다 여겼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지식을 쌓고 각자 다른 자신의 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의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나오는 각자의 다른 학문일 뿐, 그 학문의 근본, 도의 근본은 다르지 않습니다. 소인 비록 미천한 자이오나 감히 그 귀하신 심중을 짚어보자면, 대왕께서 세상의 지식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시는 마음이 두부라는 음식에 나타난 것이라 여겨집니다. 모든 학문은 형태만 다를 뿐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여기시는 대왕의 그 넓은 마음 말이옵니다.”
학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 숨을 죽였다. 두부는 그저 다방면에 재주를 지닌 대왕께서 재미로 만들었다 생각했거나, 도가에 심취한 대왕께서 연단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안 역시 놀랐다. 이토록 근본적으로 자신의 심연에 도달한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학문에 대해 그런 열린 마음을 지니고 근본을 꿰뚫어 보려는 심안을 지니신 대왕이시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역의 학문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허나 너무 늦게 당도하여 때를 놓친 소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시녀 하나가 유안의 옆에 와 조용히 아뢰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유안은 조금 눈빛이 흔들렸다. 유안은 다시 마고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가 성에 들어올 때 큰 칼을 차고 있었다고 들었다. 그것도 범상치 않은 칼이라고 하던데, 어찌하여 그 칼을 갖고 있는 것이냐?”
마고는 고개를 조아린 채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소인이 회남에 들어섰을 때, 회수를 따라 서쪽의 들판에서 홍가 패거리라는 산적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일을 당할 뻔하였으나,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진가 숙영이라는 분께서 하령이라는 종과 함께 산적들을 도륙 내고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이 검은 그 홍가라는 자가 지니고 있던 것으로, 하령이라는 분이 제 갈 길을 염려하여 건네주신 것입니다. 홍가가 말하길, 그 검은 시황제께서 하사하신 것이라 합니다. 그 검이라면 대왕께서도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라 여겨 지니고 왔사옵니다.”
유안은 깜짝 놀랐다. 진가 숙영이라? 유안은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대신을 쳐다보았다.
“진위 공, 숙영이라면 자네 아들이 아닌가?”
나이 든 대신은 어안이 벙벙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 맞사옵니다. 허나 저희 아들이 산적과 싸우다니…. 그… 그것이 그럴 아이가….”
“그래? 그 하령이라는 종은 누구인가?”
“하령은 강남 상인의 노비였는데, 수년 전 그 행실이 마음에 들어 돈을 지불하고 식솔을 모두 불러와 종으로 데리고 있사옵니다. 본디 남월의 장수였다 들었습니다.”
유안은 벌떡 일어났다.
“진위 공. 홍가 패거리는 흉포하기로 소문나 이 회남국에서도 꽤나 골칫거리였소. 그런 산적들을 도륙 낼 정도로 훌륭한 무공을 지닌 장수를, 어찌하여 고작 종으로 쓰고 있단 말이오? 혹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진위는 헐레벌떡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니옵니다! 그자는 이미 나이가 들어, 그저 저희 아들을 시종 들게 하고 호위하는 데에 쓰려고 데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녔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유안은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
“하하, 농이니라. 너무 걱정 말거라. 과인이 자네의 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다만 그 하령이라는 자는 집안에서만 쓰기 너무 아깝구나. 괜찮다면 궁으로 불러들여 상을 내리고 그의 공부를 보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뜨… 뜻대로 하시오소서, 대왕이시여!”
유안은 시녀에게 말했다.
“그 검을 가지고 오라!”
시녀는 빠른 걸음으로 검을 가지고 왔고, 유안은 검을 받아 빼어 보았다.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날이 시황제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했다. 검의 무게중심 또한 잘 잡혀 있었다. 의례용 검이 아니라 실전용 검이었다. 유안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마고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대는 홍가 패거리를 소탕하고, 시황제의 검을 바쳤으며 무엇보다 학문에 대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 줄 것 같구나. 이 궁에 머물며, 모두에게 그대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마고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큰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