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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4. 청록색의 눈동자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시간은 강물처럼 느리지만 쉬지 않고 흘러간다. 어느새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재호는 자신이 언제나 20년 전 그때에 멈춰있다고 느꼈다. 사람들과 주변은 빠르게 변해갔지만, 재호 자신은 계속해서 힘겹게 병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 아니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뒤로 재호는 상담을 받고 입원도 했고, 착실하게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학교는 그 해에 바로 자퇴해야만 했다. 희영은 시장에서 하던 과일가게를 그만두고, 건강원을 차렸다. 재호에게 좋다는 것은 뭐든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재호는 엄마인 희영을 도왔다. 그리고 재호의 강아지 샘은 10년 전까지 잘 살다가, 강아지별로 돌아갔다.


재호는 약기운에 항상 졸음이 쏟아지고 얼굴과 몸이 부었지만, 마음만은 오히려 더 맑아졌다. 병이 생기기 전의 재호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키 크고,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있는 남자였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 별다른 신경이 쓰이지 않았었다. 다들 재호에게 이유없이 잘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재호는 자신이 약자가 되고 나서야, 보이지 않던 약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우선 재호를 보는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미친놈, 정신병자, 장애인. 이제 그게 재호에게 붙는 수식어였다. 항상 사람들의 부러운 관심과 시선을 받는 게 당연했던 재호는, 이제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다니거나 집 안에만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인터넷도 커뮤니티에 덧글을 쓰는 정도의 활동만 했다.


그러다가 요즘은 병이 많이 호전되어서 약의 양을 좀 줄이고, 틈날 때마다 남한산성으로 등산을 가서 살이 좀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도서관에서 우주나 과학에 관한 책을 빌려 보는 것이 요즘 취미였다. 머리가 예전처럼 빠릿하지 않아서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좋아하던 과학 이야기를 보며 즐기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치료받느라 재호의 담당 의사가 몇 번 바뀌었지만, 재호는 언제나 웃으며 착실히 치료에 임했다. 많은 조현병 환자가 그렇듯 치료를 잘 받으면 환각도 환청도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재호는 자신이 하는 잘못하는 행동이 조현병 환자 전체가 받을 비난이라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더 웃으려 하고 항상 더 조심해서 살았다.








그날은 구름이 잔뜩 끼었고 바람이 조금 부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와서 그랬는지, 먼 곳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옆에 보이는 불곡산도, 바로 밑에 흘러가는 탄천도. 재호는 해가 없는 날이 좋았다. 해는 모든 것에 빛을 비추지만, 세상에 그림자를 선명하게 남긴다. 바로 그런 명과 암에 경계가 선명하게 보이는 분위기가 싫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흐린 날에는, 그림자의 경계가 거의 없고 모두 공평하게 고유의 색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분당서울대병원을 나서는 재호는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다.


재호는 병원 건물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참이었다. 병원 길과 길 사이에 있는 조그만 앞뜰에는 벤치가 몇 개 있었는데, 거기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옷이 굉장히 남루하고 머리는 길어 여자들이 하는 사과머리로 올려 묶고 있었다. 재호는 그 모습에 눈길이 가서, 커피를 손에 든 채로 천천히 그 앞을 지나갔다. 수염도 기르고 있어 노숙자처럼 보였지만 피부는 더럽지 않고 깨끗했으며, 벤치에 올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예술가 혹은 도인이었다. 오늘도 긴 면담을 하고 나온 재호는 조금 피곤해 그 옆에 앉았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재호는 그를 보고 오싹함을 느꼈다. 그 남자의 눈은 청록색의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재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목이 말라서 그런데…. 그 들고 있는 커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을까?”


그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울렸고, 청록색의 눈으로 재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재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다시 환각이 시작되나? 아침에 약을 먹고 나왔는데. 재호는 옆에서 주차 관리를 하던 직원을 보고 뛰어갔다. 항상 보던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기 앉은 저 사람 보이시나요?”


“네. 아까부터 앉아 있더라구요. 불편하시면 나가라고 할까요?”


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자 재호는 안심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재호는 다시 천천히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남자는 돌아보며 웃었다.


“괜찮네. 난 노숙자가 아니네. 나도 아파서 병원에 왔다가 가는 길이야.”


“아니…. 그래서는 아니고요….”


재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커피를 내밀었다. 사실 요새 한국에는 외국인들이 많으니, 초록색 눈을 본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아니라고 재호는 생각했다. 요새 유튜브를 보면,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도 엄청 많으니까.


“아직 안 마셨으니까, 그냥 다 드셔도 괜찮아요.”


“고맙네.”


남자가 커피를 받아 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뭔가 신기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게다가 이 남자는 묘하게 옛날 한국 영화에 나오는 말투를 쓰고 있어서 좀 재미있었다. 아마 이 남자는 외국인이고, 한국어는 사극을 보며 배운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재호를 보며 살짝 미소 짓고는, 재호의 가방을 가리켰다.


“자네, 학생인가? 어떤 공부를 하는 중이지?”


“하하, 학생이라뇨. 저는 사실 예전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나이도 벌써 마흔이에요! 가방 안에 든 건 그냥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고요.”


재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옅은 미소를 띠고 가늘게 뜬 눈으로 재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배운다는 건 중요한 거지. 학교에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도서관 가서 책을 보며 공부하다니 대단하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고 하더군.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우는 기쁨.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나. 혹시 자네, 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남자는 조심스럽게 재호에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본 재호는 이 남자가 따듯한 마음씨를 지녔다고 느꼈다. 외모는 50대 중년의 남자처럼 보였지만, 말투나 행동은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호는 반가웠다. 병이 생긴 이후에 엄마와 의사와 친구 한두 명 말고,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며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어릴 때부터 별 보는 걸 좋아했어요. 지구, 태양 달, 태양계…. 별들에 대해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별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이 거대한 것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평온해져요. 근데, 마침 천문대가 있는 대학교가 근처에 있었어요! 그래서 전 경희대 우주과학과로 갔고, 거기서 별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남자는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미소 지었다.


“우주과학과? 학교 이름에 우주라는 말이 들어있단 말이지? 우주를 배우는 곳인가?”


“음, 학교 이름은 아니고…. 학과 이름이에요.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배우는 분야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 그래, 자네가 배우던 학문 분야가 우주라니, 아주 기분이 좋네.”


“음? 무슨 뜻이에요?”


남자는 재호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청록색의 눈으로.


“자네는 어진 사람이야. 커피도 아주 맛있었네. 그러니 보답으로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겠네. 믿기 어렵겠지만, 그냥 재미있는 얘기라고 생각해 주게.”


남자는 미소를 띠고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 아주 오래전, 그 우주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 바로 날세. 유안이라는 이름을 쓸 때였지.”


유안…? 유안…. 어디서 들어봤는데? 맞다, 예전에 선배가 말했던 책에 나오는 그 사람!


“아저씨가 바로 <회남자>를 쓴 유안이라고요? 우와~ 아니, 하하핫!”


재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도인이 말을 걸어온 것도 지루한 일상에 벌어진 재미있는 사건인데, 시간여행을 한다고 주장하는 남자를 만나다니!


안 그래도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하고 말을 걸어오거나, 전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종교의 역사나 과학으로 팩트를 날리면서 상대해 주던 재호였다. 사실 재호는 대화할 친구가 거의 없으니, 그렇게 장난으로라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지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어디 맞장구를 쳐 보고 갈 데까지 가 볼까? 재호가 장난치며 대화할 생각을 하고 있자, 자신을 유안이라고 말한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호오, 그 책을 알고 있나? 요새 사람 중에는 아는 사람이 드물던데, 이거 반갑군. 맞아, 그렇지. 그 책의 원래 이름은 <홍렬>이지만, 나중에 <회남자>라고 바뀌었지. 공자, 맹자처럼 존칭을 ‘자(子)’로 붙여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회남자가 뭐야. 회남은 내 나라 이름일 뿐인데. 하려면 차라리 유자라고 하던가? 하핫, 말해놓고 보니 좀 이상하군. 그건 그런 책이 아니니까.”


“킥킥, 그렇군요. 제 이름은 재호예요. 양재호. 반갑습니다. 제가 그 책을 아는 건, 입학하던 날 선배가 우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 책을 말해줬거든요. 도서관에서 찾아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바로 아저씨가 그 유안이라고요! 캬하핫! 우와~ 세상에!”


키득거리며 이야기하는 재호를, 그 남자는 그저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가만히 지켜봤다. 재호는 웃다 말고 문득 생각했다.


‘이곳은 병원 안뜰이고, 분당서울대병원은 정신과가 유명하다. 이 사람도 망상장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사람에게 너무 타박하고 놀리거나 하면 증세가 더욱 악화될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꽤 재미있고, 역사와 맞는 것 같아 재미있으니, 좀 더 맞장구 쳐주자.’


재호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스스로를 유안이라 말하는 그 남자에게 몸을 돌려 앉았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네. 내가 <홍렬>…. 아니 <회남자>에서 ‘왕고래금위지주, 천지사방상하위지우’라는 말로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 이 세상을 ‘우주’라고 처음으로 정의했지. 당시에도 굉장히 파격적인 생각이었네. 당시에 난 천하의 모든 지식을 모으고 있었고…. 우주라는 말은 그 와중에 도가와 주역 등을 해석하며 깨달은 것이었다네. 하하, 내가 이 나라에 온 지는 몇 달이 되었지만, 내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건 처음일세. 다들 일하느라 내 말을 들어주려 하지도 않고, 나 역시도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을 하느라 시간도 없고 피곤했거든.”


“저는 재미있는데요? 더 얘기해 주세요!”


“그래,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유안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숨을 한번 고르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때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막 세워졌을 때였네. 나는 15살에 회남의 왕이 되었지. 예전 진시황은 법가를 제외한 모든 책을 다 불태우고, 다른 사상을 금지해 학자들을 땅에 묻어버렸네. 한나라는 그러한 진나라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 했지. 나는 나를 다시 왕위에 앉혀준 천자에게 보답하고 싶었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학자들을 불러 모아 천하의 모든 지식과 학문을 집대성하기 시작했어. 10년도 넘게 걸린 작업이었지. 당시 모인 빈객들은 각자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서로들 이야기하는 걸 즐겼네. ‘사상의 자유’를 얻은 것처럼 말이지. 난 그래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모아 책을 썼네. 뛰어난 업적이라는 뜻으로 <홍렬>이라 이름 지었지.


책으로는 쓰지 않고 뺀 이야기들도 있었는데, 자기 생각이 옳다 여기면서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혹세무민 하려는 자들도 있었거든. 그중에 내가 가장 싫어하던 건 진나라 시황제가 찾던 불로초를 안다는 사람들이었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으로써 그 가치가 있는 것인데, 시황제의 헛된 생각을 퍼트리려는 사람들이 싫었지. 그래도 내 궁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서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에 바빴네. 그때 나는 만나게 된 거야. 어떤 신비한 여인을.


자신을 마고라고 소개한 그 여인은 신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네. 바로 그 여인의 눈. 그 여인의 눈동자는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었지. 그래, 지금의 나처럼 말이야. 그 여인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지.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고, 나는 이전에 다시없을 연심을 느꼈네. 하지만 그 여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재호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진주가 떠올랐다. 비록 진주는, 청록색의 눈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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