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재호는 도인과 같은 행색을 한 그 남자의 말에 빠져들었다. 말투는 조금 독특했지만 예의가 있고 기품이 느껴지는 행동,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그 말투가 재호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재호는 그렇게 지식을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어른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그 남자, 유안은 자신과 마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어떻게 만났으며,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마고는 진주와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이미지가 좀 달랐다. 눈동자의 색도 달랐고, 무엇보다 성격이 달라 보였다. 진주는 좀 더 발랄하고 젊은 느낌이었다면 마고는 마치 나이 든 교수나 지식인, 혹은 신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 아저씨, 뭐 좀 드시겠어요?”
병원 앞뜰에서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재호는 유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진짜 과거에서 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행색으로 보아하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배가 고파졌다.
“여기 병원 안에 식당이 꽤 맛있거든요. 아마 입맛에 맞는 것도 있을 거예요.”
“… 고맙네.”
둘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엔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디 보자… 푸드코트엔 돈가스 같은 게 있는데, 안 좋아하실 거 같고. 그래도 왕이시니까 후한 대접은 못 해 드려도 갈비탕 정도는 괜찮죠? 아마 고향에서 드시던 음식과 조금 비슷할 거예요.”
유안은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난 저기 순두부찌개로 먹겠네. 고춧가루 안 들어간 지리 순두부로. 내가 그걸 좋아하거든.”
재호는 의아해하며 돌아봤지만, 유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재호는 익숙하게 한식당에 들어가 갈비탕과 순두부찌개를 시켰다. 둘은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안은 재호에게 물었다.
“자네는 내 이상한 이야기를 믿나?”
“음…. 글쎄요? 사실이라는 증거도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일단 이야기가 너무 잘 들어맞아서,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저도 사람과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요. 아저씨는 다른 건 몰라도 유튜브 같은 거 하시면 잘하시겠어요! 하하핫!”
재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하자 유안 역시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자네, 이 병원에 다니고 있으면…. 어디 병이 있는 건가?”
“네. 저는 조현병이 있어요. 옛날엔 정신분열증이라고 했었죠. 그것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유안은 재호의 말을 듣더니 생각에 잠겼다.
“정신분열증이라……. 이름을 들어보니 그건 일종의 광인이군. 자네는 지금 보기에 그냥 멀쩡해 보이는데. 그래서 물어봤네. 아픈 사람 같지가 않아서.”
재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지었다.
“요새는 약만 잘 먹고 치료를 잘 받으면, 일반인처럼 살 수 있어요. 한나라 때 보단 의술이 많이 발전했으니까요.”
“그래……. 이번엔 자네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겠나? 자네는 참 흥미로운 사람이야. 난 원래 다른 세상의 이야기, 색다른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재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음…. 제 이야기가 뭐 별게 있겠어요.”
둘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갈비탕과 순두부찌개가 나왔다. 재호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드세요, 전하.”
그러자 유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하? 내가 왕일 때는 전하라는 말이 없었네. 나는 그냥 대왕이라고 불렸지.”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음…. 맛있게 드시오소서, 대왕이시여.”
“하하핫, 알겠느니라.”
짓궂은 장난도 유쾌하게 넘기는 유안의 모습을 보니 재호도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유안은 순두부찌개를 음미하며 먹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여기 순두부찌개 맛있죠? 저도 자주 먹어요.”
“그래, 두부를 잘 만들었군. 아주 훌륭해.”
유안이 순두부를 고급 레스토랑 음식처럼 천천히 감탄하며 먹고 있자, 재호는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갈비를 하나 뜯으며, 재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천문관측 동아리에 들었는데, 때마침 지도교수님께서 새로운 변광성을 발견하셨어요. 아, 변광성이라는 건 밝기가 변하는 별을 말해요.”
“밝기가 변하는 별이라…. 우리는 그걸 객성(客星)이라고 불렀네.”
“아하, 맞다. 들어본 것도 같아요. 아무튼, 그 지도교수님이 변광성을 발견하셨고, 선배들은 자료 분석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어요. 자료가 맞는다면, 한국 최초의 발견이 되는 거예요. 결국 분석을 끝내고 교수님은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셨고, 그 별은 지금 대학교의 이름을 따 ‘경희성’으로 붙였어요.”
“호오, 한국 최초의 일이라…. 아주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 같군.”
“그럼요! 이 길을 잘 택했다는 느낌이 들고, 신문사,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오고 난리도 아니었죠. 밤하늘을 보면 우리가 사는 우주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잖아요. 천문대에서 관측한 자료를 보면 시공간이 휘는 모습도 볼 수 있고요. 전 그런 걸 직접 보면서 더 빠져들었어요.”
“시공간이 휜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우주가 휜다는 말인가?”
유안의 말을 들은 재호는 조금 당황했다.
“어…. 음…. 대왕님께서는 모르시겠구나. 어려운 이야기일 텐데, 설명해도 괜찮겠어요?”
유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허, 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아 <회남자>를 쓴 사람일세. 지식에 대한 욕구는 남부럽지 않지. 마고도 나에게 이해하지 못할 지식들을 말해주었지만, 그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네. 자, 어디 한번 말해보게.”
유안의 너스레에 재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지…. 한번 천천히 설명해 볼 테니 따라와 주세요. 현대 학자들은 우주를 연구한 끝에, 우주가 대폭발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아냈어요.”
“흠, 그건 주역에서도 말하는 무극에서 태극이 되고, 음양이 팔괘가 되어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고 한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군.”
재호는 한 번 더 당황했다. 과학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잘못 이해하거나 기존 종교와 섞이기 시작하면, 유사 과학으로 변질되기 쉽다. 재호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는 게 싫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볼 때마다 장문의 덧글을 달며 유사과학을 항상 바로 잡곤 했었다. 물론, 자신도 전문적으로 공부한 건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교양과학 수준이었지만.
“에……. 그거와 현대 과학은 실험적 증거를 통해 설명한다는 게 좀 다르긴 하지만, 뭐 대왕님께서 이해하기 쉽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는 이론도 있어요. 지금은 ‘우주가 가속 팽창한다’라는 쪽이 정설이지만…. 나중에 또 바뀔 수 있겠죠. 그게 과학이니까요. 아무튼, 이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해서 별들이 서로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은 밤하늘처럼 어두운 것이 기본인 거고 그게 우주의 진짜 모습이라고 현대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어요.”
“음…. 자네 말을 정리하자면, 밤하늘이 곧 우주이고, 우주의 기본이 검은 것이고, 그건 별들이 멀어지고 있어서라고? 별이 멀어지는데 왜 어두워지나? 그러고 보니 같은 등불이라도 바로 옆에 있으면 밝지만 멀리 있으면 어둡지…. 뭐 그런 이치인가?”
재호는 머리를 잡았다. 어떻게 해야 도플러 효과나 적색편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갑자기 얘기가 샛길로 새서 ‘초등학생도 알기 쉬운 과학 수업’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사람은 진짜 호기심이 많구나. 천문과학에서도 아주 오래된 논쟁을 역사까지 나열하며 다 얘기할 수는 없는데…. 대충 부분만 말해야겠다.
“네 대충요. 여러 가지 정확하게 이야기하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고, 그냥 멀리 있는 별은 빛이 가물가물~해진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흠……. 그럼 낮에는 왜 하늘, 우주가 파랗지? 음과 양의 조화로 밝은 낮과 밤이 있는 것 아닌가?”
“그건 지구의 대기가 태양 빛을 산란시켜서……. 아니다. 지금 이런 얘길 하는 것보단, 짧은 다큐 같은 걸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잠시만요, 여기 유튜브를 열어보면… 중국어로 된 것도 있을 거예요. 이거 말고, 음… 이거다! 이 BBC 다큐는 참 잘 만들었죠. 이 영상에 한자 자막이 달려있다고 나오니까, 이거 한번 보세요.”
재호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틀어주고, 유안이 어떻게 보는지 지켜보았다. 장난 삼아 영어로 나오는 영상에 중국어 자막이 달린 걸 보여주었는데,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하며 보고 있었다. 심지어 뭐라고 중국어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우주 속에 둥근 지구가 있는 모습이 나오자, 유안은 감탄하며 무릎을 쳤다. 이 사람, 진짜 시간 여행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국어를 잘 알거나 중국인인 것은 분명했다. 영상을 다 보고 나서 유안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시대에 이 움직이는 그림들은 아직도 볼 때마다 신기해. 그래, 그래서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건 무슨 뜻이라고? 여기엔 안 나오는데.”
재호는 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2000년 전 사람에게 설명하란 말인가!
“휴,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정말 정말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단 무게가 있는 물체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그걸 중력이라고 해요. 우리도 지구라는 별이 끌어당겨서 이렇게 붙어있는 거거든요. 지구도 달도 태양도 그런 거대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수준에서는 빛은 휘어지지 않고 직진하는 것 같지만, 우주적인 아주 큰 스케일에서 보면, 빛은 별이 끌어당기는 힘으로 휘어지게 돼요. 그래서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빛은 직선으로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에요. 별들이 휘어놓은 구불구불한 우주, 시공간을 따라서 구불구불 오는 셈이죠. 땅이 구불구불하면 구슬을 굴려도 구불구불 굴러오잖아요? 그런 거예요. 별을 보면 우주, 즉 시공간은 생각보다 거칠게, 구불구불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음…….”
유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부분부터는 내가 당장 들어서 이해하기는 힘든 부분이네. 내 지식의 한계 때문인지 논리적으로 안 맞는 것도 같고…. 그건 어느 한 사람의 주장인가? 어느 학파가 있는 건가?”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서양 학자가 100년 전에 말한 건데, 꾸준한 실험을 통해서 그 말이 맞았다고 증명되고 있어서 지금은 세상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 확실한 이론인 셈이죠.”
“그렇군. 하긴, 어떤 학문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학문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충분히 공부한 학자들이 충분히 검증했고 지금도 검증하고 있다면,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 같은 범인은 때로는 그저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해. 나 혼자 이 세상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니까. 물론 합당한 새로운 학문이 나온다면 거기에도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겠지만.”
재호는 순간 감동했다. <회남자>는 당시에 제자백가 사상을 모아 놓기만 했을 뿐, 스스로 개성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잡가’로 취급받고 폄하되었다고 머리말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저자가 이런 과학적이고 겸손한 학문적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책을 쓸 수 있던 거였다!
‘… 아니다. 나는 벌써 이 사람이 과거에서 왔다고 믿고 있구나.’
재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다시 청록색의 눈을 가진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도인 흉내를 내는 망상증 환자라고 해도, 그 과학적인 마음가짐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만약 이 사람이 젊고, 제대로 현대 과학을 공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맞아요. 저도 지금 현대에 있는 학문을 다 이해하고 알지는 못해요. 그런 식으로 공부하고 배우는 거죠. 그쪽에서는 또 그거를 검증하려는 학자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정치나 돈 문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또 칼 포퍼라는 학자는 사이비과학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 음…. 뭐 그건 됐어요.
아무튼 책으로만 보던 실험이나 결과를 직접 하게 되고 결과를 보고 나니, 저는 더욱 흥분했어요. 학교에 천문대가 있었지만, 마음대로 쓸 수는 없어서 제 망원경을 더 큰 걸로 사서 밤새도록 별을 보며 관측하려고 했어요. 나도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별을 보려고 산에 올라갔는데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여자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정신이 들었을 땐 학교도 가지 않고 산에서 별만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때쯤 엄마도 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요. 저는 저와 같이 별을 보던 친구가 환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결국 병원에 가 보니 조현병으로 진단받았어요. 일반적인 경우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저는 이제 다른 일은 할 수 없어서, 아마도 평생-. 그저 엄마 일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저런…….”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치료하니까 대왕님이랑 이야기도 잘하고 그러잖아요? 제가 뭐 이상해 보이고 그러진 않죠?”
“이상한 걸로 치면 내가 자네보다 더 이상해 보일 거야. 하하핫!”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근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어요? 마고가 여행을 같이하자고 제안했고, 마고는 시술하는 도중에 사라졌고. 혼자 남아 시술을 다 마쳤다는 부분까지 이야기하셨어요. 어떻게 청록의 시간으로 들어가신 거죠?”
“그래, 이제 그 이야기를 할 차례로군.”
유안은 순두부찌개를 어느새 다 먹고,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때, 천자의 군대가 회남성으로 쳐들어왔지. 나는 천자의 군대를 보고 도망치다가 말발굽에 깔려서 죽었네. 왕의 최후치고는 꼴사납게 죽은 셈이지. 하지만 죽고 나서 나는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네. 세상은 비처럼 내리는 청록색의 빛이 가득했고, 난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더군. 내 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래, 맞아. ‘청록의 시간’은 죽어야만 갈 수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