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재호는 삐거덕거리는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재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이 움푹 들어가 초췌한 얼굴이었다. 얼굴 여기저기엔 상처가 나 있었다.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이 있었고, 주변엔 조용히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분당경찰서 취조실에서, 맞은편에 앉은 최윤경 경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재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양재호 씨.”
“…네, 형사님.”
“그 사람의 눈은 청록색이었다……. 외국인처럼 초록색 눈동자라는 거죠?”
“아닙니다. 정확히는-.”
재호는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재호는 잠시 몸을 흔들더니, 이윽고 두 손을 내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청록색이긴 했지만, 마치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어요.”
재호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안과 대화했던 믿지 못할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재호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유안은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이고, 재호가 유안의 말을 믿게 된 상황에 대해서 윤경과 지루한 문답이 이어졌다. 윤경은 재호를 보지도 않고, 받아 적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3시간쯤 흐른 뒤, 윤경은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밥 시켜줘’라고 입 모양을 했다.
“재호 씨, 우리 밥 먹고 합시다. 배고프잖아.”
손을 든 채로 이야기를 더 하려던 재호는 천천히 손을 내렸고, 윤경은 재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취조실 옆방에는 어떤 중년의 여성이 다급한 얼굴로 막 도착한 듯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윤경은 그 여성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예, 방금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양재호 씨 담당 의사 정희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최윤경 경사입니다.”
“제가 오전에 재호 씨 면담을 했었습니다. 면담을 마치고 나가서 바로 벌어진 일 같아요. 하지만 재호 씨는 당시 심리 상태가 상당히 안정적이었고, 최근 몇 년간은 환각이나 망상 등의 증세도 보이지 않았어요.”
“정 선생님, 제가 보기에도 지금은 딱히 이상해 보이진 않습니다. 재호 씨가 진술하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이상하긴 하지만…. 모르는 일이죠. 원래 정신병자라는 게 어디로 튈지 모르지 않습니까?”
윤경이 조금 비아냥거리자, 희옥은 윤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말씀 조심하세요. 전체 범죄자들 가운데 정신질환자들은 0.4%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경사님처럼 조현병에 대한 오해가 환자들을 더 기피하게 만들고, 환자들을 사회에서 고립시켜 치료를 더 어렵게 만든다고요. 조현병도 증세가 심해지기 전에 치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도 할 수 있고, 정상적인 직업도 가질 수 있습니다. 위협적인 행동을 하거나 위험한 환각을 보거나, 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환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있지만 재호 씨는 그렇지 않아요. 조현병 중에서도 다행히 초기에 해당해 치료를 받았고,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치료에도 적극적인 환자였어요.”
“그런데 왜 사람을 죽였다고 자수를 했을까요?”
“그건…….”
그때 복도 쪽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최 경사님, 국밥 왔습니다.”
“오 순경, 수고했어. 이리 줘. 내가 가지고 들어갈게.”
희옥은 방으로 들어가려는 윤경의 팔을 살짝 잡았다.
“경사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윤경은 잡힌 팔을 살짝 보고 눈썹을 치켜뜨며 희옥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경위서 작성 중이니까, 면담은 나중에 하시죠. 재호 씨 상태가 말씀하신 대로 괜찮아 보이는지 아닌지 밖에서 관찰만 해 주세요. 특별하게 달라졌다거나 하면 말씀해 주시고요. 제 생각엔 지금 한창 이상한 망상을 말하고 있는데, 그 말들이 사건과 연결될 수도 있으니까…. 뭐든 일단 다 들어 봐야죠. 앞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아까 오 순경한테 물어보시고요.”
윤경은 문을 열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재호 씨, 국밥 괜찮죠?”
재호는 밥을 먹고 나서, 유안과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안이 2천 년 전 어떻게 죽었는지, ‘청록의 시간’이라는 곳에 어떻게 들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유안이 자신에게 죽여달라고 한 이야기까지. 취조실 옆방에서 재호의 진술을 듣고 있던 오 순경이 희옥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저 정도면 혹시 망상이나 환각이 재발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할 순 없어요. 보통 조현병으로 망상이나 환각에 빠지면 말하는 내용 중에 심한 비약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지금은 이야기 속에 그런 곳이 없어요. 오히려 자신을 유안이라고 한 자가, 음…. 그러니까 그가 시간 여행을 정말로 한 것인지는 제쳐두고, 그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이 이야기도 중요해요. 만약 저 대화가 정말이라면, 그게 어떻게 재호 씨의 마음을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이상한 점은 없습니까?”
“굉장히 의기소침해져 있고 우울한 상태지만, 오히려 말하는 느낌이나 행동이 조현병 약을 복용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요. 저와 면담했을 때보다 더 또렷하고 상태가 좋아 보입니다. 몸짓에서 약간의 이상 반응이 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가지고 있던 약은 먹었나요?”
“네.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약을 가지고 있길래 벌써 먹게 했습니다. 뭐더라, 퀴타핀?”
“쿠에타핀입니다. 그걸 먹으면 저렇게 또렷한 상태가 아니라 좀 무기력해지고 졸음이 많이 올 텐데, 너무 또렷해서 조금 이상하네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조금 각성한 상태인 것 같은데…. 위험한 건 아니지만,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정밀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아까 밥 먹고 나서 마약 간이검사는 했습니다. 결과는….”
희옥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복도 쪽 문이 열리고 어떤 경찰이 흰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오 순경, 이거 최 경사한테 전달해 줘.”
오 순경은 봉투를 들고 취조실 문을 열고 윤경을 불렀다.
“최 경사님, 잠시만…….”
윤경은 봉투를 받아 열어 보았다. 내용물을 확인한 윤경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취조실에는 에어컨 소리만 들려왔다. 윤경과 재호는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윤경은 엄지손톱으로 검지를 툭툭 긁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윤경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죽여 달라고 해서 죽였단 말입니까? 그렇게 쉽게? 방금 전까지 사람 죽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 죽여 달라고 했다고요? 지금까지 이 이야기들이, ‘나는 사람을 죽였고 자수하러 왔지만, 나에겐 죄가 없다’고 말하려 한 것이었어요?”
“… 아닙니다, 형사님. 저는 처음에 증상이 생겼던 20년 전을 제외하고, 치료를 받은 뒤로는 가족이나 친구 누구도 위협한 적이 없었고 자해도 한 적이 없었어요. 당시 엄마와, 키우던 개를 다치게 했었는데…. 그게 내내 가슴에 남아 평생 죄인처럼 살아왔습니다. 조현병으로 삶이 우울해지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그럼 지금까지 이 이야기들은 뭐죠?”
재호는 다시 수갑을 찬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고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살짝 떠는 것 같더니 다시 손을 내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사람은 저에게 제안했어요. 만약 자신을 죽여준다면, 자신이 마고에게 배운 도술 중 하나를 써서 제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요.”
“하… 도술이라. 그 말을 믿었어요? 재호 씨 당신 공부도 잘했었고, 나름 과학 전공인 사람이잖아. 시간 여행도 그렇고, 이 이상한 이야기에 빠진다는 것도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형사님도 저처럼 평생 치료되지 않을 병에 걸려서, 평생 약을 먹고, 평생 멍한 상태로 살며, 평생 사회에서 낙인찍혀 사는 그 기분을 아신다면 제 심정을 아실 거예요. 엄마도 한약이나 굿이 쓸데없는 거라는 걸 알지만, 저에게 계속해서 먹이시는 게 그래서라구요. 저 역시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더라 하는 소문이 들려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가 됐든 해보고 싶어지는 거예요…….”
재호는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유안의 마지막 말과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마지막 말은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분명 유안은 미안하다고 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저는 다시 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아까 보신 대로 손이 피투성이였었고요.”
재호는 수갑에 채워진 두 손을 들었다.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뭔가 일이 일어났고, 저도 모르는 사이 그 남자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전 그 사람의 자살을 도운 거였어요!”
윤경은 말없이 재호가 떨면서 하는 말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수하러 온 거예요. 유안의 말대로라면 그 남자는 죽어서 시간여행을 했을 테고, 아마 시체가 없을 테니까요. 다시 그 자리에 가서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자수하지 않으면,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겠죠. 저는 저의 죗값을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전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설령 그 사람이 원했다고 해도 말이에요.”
윤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재호를 바라보았다. 노트북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해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재호 씨,”
윤경은 앞에 놓인 봉투를 톡톡 건드렸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이 말하는 시간 여행은 망상일 뿐이에요. 방금 강둑 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어요.”
윤경은 흰 봉투를 열어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뒤통수가 함몰된 채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유안의 시체였다. 유안은 도망치다 죽은 듯 풀밭에 쓰러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작은 조약돌이 쥐어져 있었다.
“CCTV와 블랙박스를 조사해 그의 동선을 역추적해보니, 수진동의 차이나타운에서 왔더군요. 최근 그쪽에 마약거래 정황이 있어서, 안 그래도 경찰들이 수사하던 중이었어요.”
재호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지고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네?”
윤경은 위압적인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 말한 눈 색깔. 부검감정서에 보면 그냥 조금 충혈된 거 말고는 검은 동공이라는데……. 게다가 그 남자의 손톱에서 혈흔이 발견되었고, 손과 팔에는 필사적인 저항흔이 남아있었어요. 당신 얼굴의 상처는 그 남자가 저항한 흔적일 테고. 증거들로 보면 당신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아까 간이 검사에서 마약 양성반응이 나왔어요. 재호씨 당신은 혹 병에 대한 괴로움으로 마약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요? 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신원미상의 남자는 마약공급원이고. 아마도 마약이 떨어져 다급할 때, 거래가 틀어져서 다툼이 나서 죽였다거나. 정신이 들고 보니 너무 대로변에서 살인을 해서 도망칠 수도 없어서 자수를 한 거고. 제가 볼 땐 마침 정신병도 있겠다, 심신 미약이든 어떻게든 감형을 받으려고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거라고 보여요.”
희옥은 화가 나서 취조실로 급히 들어가려 했으나 오 순경이 붙잡았다. 둘은 팔을 비틀며 몸싸움을 했다.
“… 이거 놔요! 저런 식으로 조현병 환자를 대해선 안 돼요!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게 당신들이 수사하는 방식입니까? 당장 그만둬요! 바로 변호사를 부르겠어요!”
“잠시만요, 선생님!”
취조실 밖이 한창 소란이었지만 취조실 안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재호가 멍하니 뜨고 있던 큰 눈에서 눈물이 두 방울 흘렸다. 그리고 그저 허탈한 듯 의자에 기대 축 늘어졌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서지는 걸지도 몰랐다. 재호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윤경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당신 소지품 검사할 때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이 쪽지도 뭔가 이상해. 거래할 때 쓰이는 암호 아니야?”
재호의 퀭한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건 유안…. 아니, 그 남자가 절 최면에 건 다음 주머니에 넣은 거예요….”
“이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어디 보자, 휴대폰 사진으로 찍으면 번역해 주잖아. 음… 이 앱은 왜 번역은 안 나오고 소리만 나와? 뭐라고 하는 거지….”
윤경은 소리를 키우고 핸드폰을 들어 번역 앱이 들려주는 대로 집중해 들었다.
"…Shāle …"
윤경은 잘 안 들리는지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Shāle wǒ."
핸드폰의 앱이 읽어주는 그 목소리는 취조실에 조그맣게 울렸다.
“이거 뜻이 뭔지 알…”
윤경이 말하며 고개를 들자, 수갑을 찬 손이 눈앞을 가렸다. 재호의 손이었다. 재호가 괴성을 지르며 윤경의 목을 졸라 쓰러트렸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윤경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윤경은 두 손으로 머리를 막았다. 그때 재호는 파지직 소리와 함께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재호의 몸은 뒤로 쓰러져 넘어갔다. 오 순경이 취조실로 뛰어 들어와 테이저건을 쏜 것이었다.
윤경은 붉어진 목을 감싸 안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재호는 바닥에 누워 눈에 초점이 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뒹굴고 있던 그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杀了我』
*Shāle wǒ: 나를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