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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9. 외로운 섬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그렇게 다시 5년이 흘러, 2023년이 되었다. 재호가 치료감호소에서 퇴소한 지 2주일이 채 되기도 전, 그의 어머니 희영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재호가 그 사건을 일으켜 뉴스에 수없이 오르내리고, 자신의 아들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을 터였다. 재호는 조현병을 앓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노력해 왔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느꼈다. 자신의 뉴스 때문에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더욱 커졌고,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서도 욕을 먹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마지막으로 지지하고 지켜주던 어머니는 이제 없었다.


그저, 자신이 시간 여행자를 만났었다는 숨겨진 진실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한다고 한들 그딴 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것으로 누가 행복해지고 누가 불행해졌을까? 대체 시간 여행자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경계에 서 있는 자. 재호는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 땅과 바다의 경계에 서서, 발이 파도에 젖었다가 땅 위에 섰다가를 반복하고 있는 삶. 그럴수록, 재호의 발은 더욱 모래 속에 파묻혀 갈 뿐이었다.


희영의 발인이 끝나고 유골함을 집 근처 성남 야탑동에 있는 묘역에 안치한 후, 그는 언덕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아래의 수많은 무덤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약봉지를 꺼내었다. 희영의 마지막 말이었다.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 상황에서 재호가 처방받은 약을 끊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무표정한 재호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극단적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아니, 그 사건만은 예외였다. 예외라고 믿고 싶었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무덤들을 붉게 물들였다. 낮과 밤의 경계는 아름답게 불타고 있었다. 4월의 바람은 아직 찼고, 눈물은 어느새 말라서 볼에 비적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재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왔다. 약봉지를 보니 토할 것 같았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어둠 속에 삼켜질까 겁이 났다. 재호는 불을 켠 채로 눈을 깜빡이다, 스르르, 천천히, 지쳐 잠이 들었다.



또록.


메시지를 알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온몸이 뻐근했고 머리는 멍했으며 삐-하는 이명이 조금 들렸고 기침이 심하게 났다. 감호소에서 폐병을 얻은 평소의 몸 상태였다. 재호는 무거운 팔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았다. 메시지가 두 개 와 있었다. 처음 메시지는 희영의 발인을 도와준 현주의 메시지였다. 현주는 재호와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마지막 남은 친구였다.


「잘 들어갔냐? 별일 없지? 좀 쉬다가 내일쯤 치맥이나 하자. 네 얼굴 보니 말이 아니더라. 일단 푹 자」


‘그래, 고맙다’라고 짤막하게 보내고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처음 보는 번호였고 메시지는 꽤나 장문이었다.


「재호군, 자네 어머니의 장례에 조문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네. 연락이 오지 않아서…. 친구의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이제서야 알게 됐지. 고인의 명복을 빌겠네. 난 남우석이라고 하네…. 자네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네가 처음 조현병 진단받을 때 자네 엄마의 부탁으로 자넬 만나러 갔었지…. 기억이 날지 모르겠군. 내가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데, 한번 만나 주겠나?」


남우석 박사라…. 재호는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재호가 엄마에게 삼각대를 휘둘렀던 날, 옆에 있던 남자였다. 하지만 재호가 병원에 가게 된 이후로 그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재호의 아버지는 컴퓨터 공학박사였으나 폐렴으로 돌아가셨었다. 재호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재래시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호는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어머니 희영의 장례식 때문에 아버지의 지인에게 연락할 일도 없었다. 남우석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0년이 넘도록 연락 한 번 나눠본 적 없던 그가 갑자기 연락을 해 오다니.


재호는 일어나 보호관찰관에게 연락할까 망설였다. 혹시 며칠 약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조현병에 의한 망상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안의 일이 떠올라, 혹시나 자신이 또 어떤 나쁜 일에 이용당할까 겁이 났다. 재호는 급히 약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하고, 자고 일어났다. 문자를 보니 똑같은 내용이었다. 아까보단 컨디션도 조금 좋아졌고,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또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 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생각도 들고, 아버지의 친구라고 하니 문득 아버지의 과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재호는 조심스레 한 글자 한 글자 눌렀다.


「안녕하세요, 양재호입니다. 제 병 진단에 도움을 주신 박사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잘 보내드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말씀 감사합니다. 저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기도 해서 만나 뵙고 싶습니다.」


또록.


「그래, 잘 생각했어! 자네 아버지와 난 둘도 없는 친구였지…. 연구에서 자네 아버지의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고. 일단 언제라도 좋으니 내 연구실로 와 주겠나? 주소는 성남동에….」


재호는 주소를 들여다보았다. 모란역 바로 옆, 모란시장 근처였다. 걸어서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 언제 만날까 생각하다, 재호는 지금 당장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걷고, 사람을 만나면 슬픔에 젖은 채로 시간을 보내기보다 나을 것 같았다. 재호는 옷을 챙겨입고 마스크를 썼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으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곧 가겠습니다」








재호는 번화한 모란 사거리를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와, 주소대로 길을 찾아갔다. 주소의 건물을 찾았을 때, 재호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건물들은 보통 두세 개의 건물이 붙어있어서, 작은 하나의 블록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형 빌딩이 아닌 주택가의 작은 건물들은 그렇게 지어진다. 그런데 이 건물은 3층 건물이면서 주변에 다른 건물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마치 회전교차로 한가운데 있는 교통섬 같았다. 한 바퀴 돌며 살펴보니 건물의 둘레 모양도 흔한 사각형이 아니라 육각형이었다.


‘성남 구시가지에 워낙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이 많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1층은 평범한 카페처럼 보였고, 2층과 3층은 주거 공간 같았다. 재호는 남 박사가 말한 대로 북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페인트가 벗겨진 작은 남색 철문이 있었다. 재호는 조금 망설이다 벨을 눌렀다.


“예, 누구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박사님. 저 재호입니다. 문자 드렸던….”


“아아아, 재호군! 어서 들어와.”


덜컹.


철문의 잠금장치가 열렸고, 재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하로 이어진 시멘트 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조금 을씨년스러웠지만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코너를 세 번이나 돌았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꽤나 깊이까지 이어졌다. 지하 1층이 아닌 모양이다. 그 계단의 끝에 다시 철문이 나타났다. 일반적인 현관문이 아닌, 창고용 철문 같았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경계인 듯, 크고 두꺼워 보였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한 나이 든 남자가 나타났다. 검고 큰 돋보기안경을 쓰고 하얗게 센 머리를 옆으로 단정히 빗어 넘긴 모습에, 무언가 지저분해진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남 박사는 적어도 80은 다 넘어 보였다.


“재호군! 반갑네. 예전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아버지를 닮아 훤칠하니 잘~ 생겼네! 자, 이리로….”


남 박사는 유난히 커 보이는 입으로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는, 방에 마련된 테이블로 재호를 안내했다. 방은 지하라고 하기엔 의외로 밝고 넓었다. 각종 컴퓨터와 알 수 없는 기계들이 가득했다. 30년 전 학교에서나 보았던 거대한 레이저 프린터기처럼 보이는 물건도 있었고, 발전기처럼 보이는 것도 벽에 붙어있었다. 평소 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해, 재호는 의자에 앉아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CD가 쫙 꽂혀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세기말적이었다.


“재호군, 커피 좋아하나?”


재호는 사실 그 사건 이후 커피를 입에도 대지 않았었다. 재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싫어하진 않지만…. 괜찮으시다면 그냥 녹차로 주세요.”


“녹차, 음~ 좋아. 나도 녹차가 좋네. 여기 제자가 준 고급 녹차가 있거든.”


남 박사는 흥얼거리며 물을 끓였고, 다과를 준비했다. 재호가 앉은 테이블 위엔 각종 뇌 과학, 뉴럴링크, 뇌지도, 뇌 해부학 등의 최신 서적, 과학 논문 잡지인 네이처 지, 사이언스 지 등이 쌓여 있었다. 치료감호소에 있는 동안 최신 과학책을 보지 못했던 터라, 재호는 조금 호기심이 생겨 이것저것 뒤져보았다. 남 박사는 정갈하게 만들어진 화과자와 함께 녹차를 내왔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화과자인데, 먹어봐. 맛이 그만이야!”


허우적거리며 권하는 남 박사의 몸짓에, 재호는 살짝 미소를 짓고 화과자를 입에 물었다. 정말 달았다. 녹차 역시 쓴 맛은 없고 따듯하고 고소한 풍미가 있었다. 그 화과자의 단맛과 녹차의 따듯한 풍미가, 닫혀있던 재호의 마음이 조금 열어주는 것 같았다. 재호는 화과자를 한입 더 베어 물고, 눈이 동그래져 자신도 모르게 음~이라는 소리를 냈다.


“화과자는 처음 먹어보는데 아주 맛있네요.”


웃으며 말하는 재호를 보자 남 박사도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용인 동백에 아주 맛있게 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서 부인이 매주 사다 준다네. 나이가 드니까 이런 걸 먹어야 머리가 좀 돌아가거든. 이런 걸 먹으면 일본에서 유학하고 교수 생활하던 때가 생각나지.”


“일본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일본에 계셨었나요?”


“아니, 아니야. 나는 어릴 때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자네 아버지와 같은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갔지. 거기서 자네 아버지와 기숙사 방을 쓰며 친구가 된 거야. 자네 아버지는 키도 크고 미남이어서, 특히 미팅을 나가면 인기가 많았네. 생긴 거답지 않게 경상도 사투리가 걸걸한 게 또 매력이었거든. 성격은 완전 괴짜였어. 그렇게 쫓아다니는 여학생이 많았는데,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대생이랑 몇 번 만나더니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지 뭔가? 그게 제수씨, 즉 자네 어머니일세. 첫눈에 반했다나? 나 참, 나도 나중에서야 봤는데 둘 다 외모와 다르게 경상도 사투리가 걸걸한 게 천생연분이더만!”


재호는 아버지와 엄마의 연애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엄마는 맨날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은 말만 했었는데, 저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었다. 하긴, 뭐가 됐든 좋았으니까 결혼했겠지. 누구나 처음엔 좋으니까.


“자네 아버지는 나중에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되었고, 나는 뇌과학 쪽으로 분야를 바꿨지. 보증 사기를 당하기 전까지 자네 아버진 잘 나갔어. 그 충격과 빚으로 교수도 그만둔 후, 이일 저일 해보겠다며 학원 강사니, 회사 연구원이니 그제야 문을 두드렸지만 이미 나이가 들고…. 결국 담배를 그렇게 피워대다 폐렴에 걸린 거야. 그때 제수씨도 다니던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시장에서 일을 하게 된 거지. 그 이후는 뭐 자네도 알 것이고….


그날, 제수씨의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나도 놀랐네. 사실 내가 뇌를 연구하긴 하지만 정신과 의사는 아니라서, 조현병 진단을 할 수는 없었거든. 제수씨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쪽으로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거야. 자네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난 그 뒤에 일본 토호쿠대에서 교수를 하게 되었지. 제수씨와는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었고. 어머니 납골당 위치라도 알려주게. 나중에 한번 보러 가야지….”


처음 어수선해 보이던 인상과 달리, 차분하게 회상에 젖는 남 박사의 모습을 보니 재호는 안심이 되어 웃었다.


“와, 아버지 얘기는 잘 몰랐는데 재미있어요! 미팅도 하시고 그랬구나…. 납골당은 야탑에 아버지와 같이 모셨어요. 여기 명함에 적혀있으니 이걸 보시면…. 그나저나,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셨는데, 뭘 도와주신다는 거예요?”


남 박사는 활짝 웃으며 손을 벌려 주변 컴퓨터와 기계들을 소개하듯 가리켰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 한국으로 왔지만, 난 워낙에 호기심이 많아서 말이야.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거든. 지금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하도 우려먹어서 좀 철 지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직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분야. 바로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로 옮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일세. 그래서 이곳 지하에 그동안 모은 돈을 다 써서 연구실을 마련했네. 연구 데이터나 실험 도중 전기가 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불법이지만 모란 차량기지 쪽 숲 속에 태양전지 패널을 크게 설치해 두고 이곳까지 연결해 자가전력을 공급하고 있다네. 만일을 대비해 소형 발전기도 가지고 있지.


자네를 부른 건 동물 실험으론 한계가 있어서, 임상 연구가 필요하거든. 아, 아, 그렇다고 약물을 쓰거나 하는 위험한 건 아니고, 머리에 특별히 고안된 전극을 붙여 진행하는 거야. 이미 연구는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아무튼 참여해 준다면, 임상 연구비용을 주겠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자네는 지금 당장 일도 없을 테고. 내가 생활비에 좀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 얘기를 듣고 재호는 생각했다.


‘이분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친구였던 분이고, 유명한 대학에서 연구를 하셨던 박사다. 이상한 얘기나 하던 유안이라는 남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 내가 그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서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만, 듣자 하니 이 연구가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네 그럼 박사님, 한 가지만 여쭈어볼게요. 이런 실험이면 인맥으로 대학원생 데려다가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오래전 연락이 끊긴 저에게 연락을 주신 거죠? 그냥 생활비를 보태 주시려고요?”


남우석 박사는 컵에 남은 녹차의 마지막을 탈탈 털어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리고 큰 돋보기안경 너머로 재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은 나이에 맞지 않게 또렷했다.


“내 가설에 의하면, 지금의 A.I.와 뇌과학 연구는 실제 생물의 ‘자의식’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네. 자네, ‘마코프 블랭킷’이라고 들어봤는가?”


“아니요, 최근에는 과학 관련 책이나 영상을 거의 보지 않아서요.”


“음, 간단히 설명하자면, ‘마코프 블랭킷’은 경계에 대한 이론이네. 오래전 수학자 마코프가 ‘마코프 체인’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지. 하나의 사건에 대한 확률이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에 영향을 주는 것을 ‘체인’이라는 개념으로 묶은 것이지. 이 개념을 확장한 것이 ‘모든 것의 경계’에 대한 확률을 다루는 ‘마코프 블랭킷’이라는 것일세.”


경계에 대한 이론? 재호는 항상 자신을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단어가 머리에 꽂혔다. 남 박사는 말을 이어갔다.


“이 세상에는 완벽히 나누어진 경계가 없어. 심지어 세포도, 생물도, 계가 나눠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닫힌 계가 아니야. 서로 정보와 에너지를 주고받지. 그러나 모든 것을 주고받으면 또한 경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므로 그 임의의 계를 유지하면서 필요한 정보와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 그것이 바로 ‘마코프 블랑켓’이지. 개념을 확장하면, 이 세상은 모두 ‘마코프 블랑켓’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어. 우리는 모두 이 세상과 경계를 두고 둘로 나누어져 있지만, 확률적으로 이 세상과 하나라고도 볼 수 있는 거지.”


재호는 오래간만에 듣는 과학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흠…. 간단한 개념만 말씀해 주시니까 다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뭔가 흥미가 생기네요. ‘경계’라는 철학적, 사회적, 과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해 왔었거든요. 그런데, 그것과 A.I.와 무슨 연관이 있나요?”


남 박사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했다.


“아, 아,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샐 뻔했구만. 그 ‘마코프 블랭킷’과 ‘마코프 체인’은 뇌가 추론하는 방식에 대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 셈이지.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생성형 A.I.가 급격히 발전한 거야. 예를 들어 몇달 전 공개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A.I.인 chatGPT는, 정보에 대해서는 정확하진 않지만 말 하나는 정말 잘하지 않은가? 그게 인간 언어에 대해 ‘마코프 체인’을 도입해서,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는 순서와 확률을 계산해서 인간 언어를 것을 배운 거지. 사람들도 기존의 A.I.보다 말을 너무 잘하니까, 정말 A.I.의 시대가 왔구나라고 여기게 되고.


하지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가 볼 땐 생성형 A.I.는 결국 단순히 입출력 관계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일 뿐이고, 뉴럴링크니 뇌 지도니 하는 건 다 겉핥기일 뿐이야. 머리가 없이 입만 살았다고나 할까. 언어 논리를 파악해서 인간 뇌 작동방식의 모든 것을 안다? 글쎄, 난 좀 회의적이네. 뇌는 언어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거든. 언어가 없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렇게 밖에 생각 못하는 거지. 또, 지능과 자의식은 별개이기도 하고.


2000년 전 사람이 지금의 컴퓨터를 열어서 뜯어본다 한들, 반도체와 전자 기판의 흐름만 계산하고 확인한다고 해서 뭘 알 수 있겠나? 또 요새는 뇌파를 가지고 흐릿한 영상을 만들거나 컴퓨터를 조작하는 일도 하고 있지만, 굉장히 단편적인 일이지. 지금 도청과 해킹 기술로는, 컴퓨터에서 나오는 전자파로 컴퓨터에서 어떤 파일이 실행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지. 지금 뇌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방식은, 컴퓨터 전자파나 메인보드 기판을 들여다보며 윈도우가 작동하는 코드를 파악하고 만들려고 하는 것, 거기에 그걸 쓰는 사용자까지 만들려는 것과 비슷해. 무의미한 거야.


그렇다면 의식은 몸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인가? 아니. 자네는 자네 몸에서 전류가 어디로 흐르는지, 호르몬이 얼마나 분비되는지, 창자가 무슨 영양소를 얼마나 흡수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전혀 모르지. 자네의 의식은 몸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네 몸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알고리즘의 한 결과일 뿐이네. 인과가 거꾸로야. 자네가 생각해서 몸이 무언가를 한 게 아니라, 자네 몸이 무언가를 한 다음에 그 결과가 의식에 전송되면 ‘내가 그걸 했구나’라고 착각하는 거지.


즉 다시 말하면, 난 ‘의식’, 혹은 ‘자의식’이 수많은 세포가 가진 각각의 하위 의식 알고리즘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상위 차원의 ‘잉여 알고리즘’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있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자네 ‘플랫 랜드’라는 소설을 아나?”


“네. 초창기 SF소설로 유명하죠. 2차원 사각형이 다른 고차원으로 여행하고 돌아오는….”


“그래, 그런 것처럼 인간의 의식은 메타인지가 있어서, 즉 내 몸이나 의식을 더 위에서 전체를 파악해 객관화할 수 있어. 그래서 내 가설은,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3차원 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현재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은 4차원, 혹은 5차원의 알고리즘은 아닐까 하는 거지. 5차원까지 생각한 이유는, 우린 의식만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과거나 미래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네. 또한 우리가 ‘의식’을 발견하거나 분석하기 어려운 이유가, ‘의식’이 우리가 사는 세계보다 차원이 높은 알고리즘이라서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했어. 물론, 뭐 실험적 근거는 아직 없어. 이 얘긴 그냥 나의 가설이자 재미있는 상상이네. 그러니까 은퇴하고 취미로 연구하고 있는 거야.”


재호는 이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최신 과학이야기와 이 분야 전문가의 재미난 썰을 듣자니, 다시 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잉여 알고리즘’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위 의식을 가진 인간의 시냅스 세포들을, 분자 차원에서부터 분석해 정확히 인공 시냅스로 구현해 구성해야 해. 뇌세포 하나하나를 들여다봐야 하지. 그렇게 만들어진 알고리즘이 모인 인공 시냅스를, 정확한 뇌지도를 통해 연결하고 구현하면 ‘기억’과 ‘잉여 알고리즘’이 복제될 것이라고 생각해. 즉 뇌라는 물질에 ‘잉여 알고리즘’이 깃들어 있는 것이지. 일반적인 생각처럼 ‘정신’과 ‘육체’로 따로 떼어 놓아서는 본질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뜻이야. 뇌의 구조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OS라고 할 수 있겠지. 이 분야도 연구가 있기는 한데 나처럼 뇌를 이루는 분자 차원에서의 시도는 없었어. 게다가 그 ‘잉여 알고리즘’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뇌만 분석하면 구조화가 힘들지만, ‘의식이 무너져 있는 뇌’를 가지고 비교하면 조금 더 쉬워진다는 게 내 연구의 핵심이야.”


재호는 멈칫했다.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박사님. 혹시…. ‘의식이 무너져 있는 뇌’라는 것이….”


남 박사는 재호의 물음에 슬쩍 눈을 감았다가, 다시 재호를 안경 너머로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연구자로서 솔직히 말하겠네. 조현병에 걸린 자네의 뇌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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