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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8. 오래된 편지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정신이 들었을 때, 재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 이후 재호는 쪽지의 중국어에 반응해 살인을 하도록 강력한 최면에 걸린 것이 재판에서도 확인되어, 마약과 최면에 의한 심신미약이 인정되었다. 재호는 치료감호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렇게 장난으로 시작된 대화와 만남은 운명처럼 느껴지다가, 또다시 절망으로 끝나게 되었다.


재호가 입소하던 날, 희영은 재호를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하지만 재호는 울지 않았다. 재호의 머릿속은 온통 유안이라고 주장하던 남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감옥과도 다름없는 치료감호소에서, 재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 정말 그건 나의 망상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이었을까? 내가 정말로 사람을 죽인 걸까? 아니면 그의 소원대로 시간 여행을 시켜 준 걸까…. 시간 여행을 했다면 시체는 왜 있지? 혹시 정말 시간 여행을 했다면 잘 돌아갔을까? 아니야. 시간 여행을 했다고 해도, 시체가 있는 이상 내가 사람을 죽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재호는 밤마다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그동안 절대 한 적이 없었던 자해까지 시도했다. 약을 먹고 있었지만 오히려 조현병은 더 심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보내다가,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무사히 도착하면 글을 남기겠다’는 유안의 말이 생각났다. 무죄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정말로 의미 없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보낸 편지를 발견하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재호는 휴게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같은 입소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도 어딘가 좋지 않은 환자였다.


“여기 휴게실에 혹시 중국 고전 있나요?”


“어~ 중국 책? 무협지요-?”


“아니요. 논어 맹자 같은… 한자가 나오는 책이요.”


“그런 재미없는 건 여기 몇 개 없는데요-. 저쪽 구석에-. 교육 서적에-. 한번 찾아봐요-.”


그의 말 대로 구석에 가 보니, 아이들이 보는 교육용 책들이 있었다. 재호가 찬찬히 책을 훑어보았다. <삼국지>, <장자>…. 재호는 그중 몇 개를 골라서 테이블 위에 놓고 폈다. 읽어보니 <삼국지>는 어린이용인 데다 당연히 한글로만 적혀 있어서 소용없었다. 유안이 보낸 편지를 알아보려면 원문 한자로 적힌 책이어야 했다. <장자>는 한자와 주석이 같이 쓰여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읽어보았다. ‘호접지몽’ 부근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 한자와 해석을 살펴보았지만, 유안이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보였다.


이제 남은 책은 하나뿐이었다. <천자문>. 한국 사람이라도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 책. 재호도 당연히 <천자문>을 여러 번 읽어 보았고 앞부분은 외우기까지 했었기에, 별 기대하지 않고 <천자문>을 폈다. 하지만 재호는 그 책의 첫 여덟 글자를 본 순간, 심장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원후 500년경 중국 양나라. 어느 누더기를 입은 남자가 수보잔서修補殘暑라는 글을 써서 등에 메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책을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솜씨가 정말 귀신같아서 원본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는다는 소문이 성도에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양나라의 천자 양 무제의 귀에도 들어갔고, 결국 천자는 그 솜씨가 궁금하여 그를 불렀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소인은 사고를 당해 어릴 적 이름을 잊어버렸사옵니다. 허나 여러 나라를 떠돌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주흥周興이라고 칭하여 주십시오.”


“주흥이라…. 그래, 자네의 인생은 재미있었나?”


“소인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또한 모든 것을 얻었나이다. 과거와 가족을 잃었지만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고, 그 덕에 이렇게 천자 폐하를 알현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즐거운 인생이 어디 있겠나이까.”


“그대는 그 어떤 책이든 복원해 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미천하오나 여행을 하며 책을 조금 읽어, 그러한 재주 아닌 재주가 있나이다.”


천자는 남자의 말투에서 비범함을 느끼고, 그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과인은 명필 왕희지 초서의 서법이 마음에 들어, 왕희지가 쓴 비문의 탁본을 떠 조카들에게 가르치고 있네. 그런데 그 비문의 글들이 뜻도 이어지지 않는 말인 데다 쉬운 글자도 아니어서, 조카들에게 가르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군. 이 글자들을 모아서 4자씩 의미 있는 시로 엮어 줄 수 있겠는가?”


“소인, 기회를 주신다면 한번 해 보겠나이다.”


“과인은 자네의 신기 어린 재주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몇 장씩이나 찢긴 책도 반나절이면 복원해 준다지? 정말 대단한 재주로고! 이 정도 글자이면 하루면 충분할 거라 생각하네. 그 신기 어린 재주를 과인에게도 보여주게.”


그리고 천자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만약 하룻밤 사이에 하지 못한다면, 과인을 능멸한 죄를 엄히 물을 것이야.”


남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충분하옵니다. 소인의 재주를 한번 믿어 보시오소서.”


주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천자의 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으로 오는 동안 궁에서부터 병사 둘이 대동했다. 아마도 그가 도망칠까 감시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보며 가만히 미소 짓고는, 마당에서 조그만 조약돌을 집었다. 그리고 방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손에는 돌을 잡고 한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글자들을 살폈다.


“… 재호 군.”


남자는 작게 혼잣말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 만드는 이 책이라면 대대손손 전해져, 자네에게 닿을 것이라고 믿네.”


남자의 눈에 작게 눈물이 맺혔다.


“미안하네. 나는 자네를 이용했어. 광인을 치료한다는 것을 핑계로, 자네에게 사술, 최면을 걸고 마약을 사용했지. 어진 마음을 가진 자네가 나를 제대로 죽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만약 또다시 눈앞에 닥친 죽음이 무서워, 설령 도망치더라도 잡아서 죽일 수 있도록 그렇게 했지. 그리고 고맙네. 덕분에 난 고향으로 돌아왔다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하늘은 자네에게 잘 도착했다 편지를 쓰라고 기회를 준 것 같네.”


시로 만들어야 할 글자는 모두 일천 자였다. 주흥, 아니 유안은 붓을 들었다. 유안이 한 글자 한 글자 쓸 때마다 유안의 사슬은 이미 하나씩 끊어지고 있었다. 머리칼은 점점 하얗게 세어 가고, 손끝과 발끝은 먼지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유안은 다른 한쪽 손으로는 조약돌을 꼭 쥐었다. 그것은 처음 마고가 만들어 준 신비한 돌을 잡고, 시술을 견뎌냈던 때에 생긴 버릇이었다. 마음이 힘들어질 때, 비록 손바닥에서 떠오르지 않더라도 조그만 조약돌을 손에 쥐면 안심이 되었다. 유안은 한 글자, 한 글자를 먼지가 되어가는 손으로 정성스럽게 적어 갔다. 그 편지를 재호가 알아봐 주기를 빌며.








재호가 펼친 <천자문>의 첫 여덟 글자는 이렇게 시작했다.


『天地玄黃 천지현황 宇宙洪荒 우주홍황』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검을 현은 가물 현이라고도 한다. 하늘이 검다는 것은 가물거리도록 멀다는 뜻이다’라는 설명이 책에 쓰여 있었다.


재호는 유안에게 ‘하늘은 밤하늘처럼 어두운 것이 기본’이라고 한 말이 기억났다. 그리고 ‘우주가 검은 이유’에 대해 설명한 것이 생각났다. 특히 빛이 가물거리며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그래서 ‘우주는 검다’라고 했는데, 검을-가물 현을 써서 표현했다. 하늘을 ‘검다’고 표현하고, ‘검다’는 말을 ‘검을 흑’이나 ‘어두울 암’이 아니라 굳이 ‘가물 현’으로 쓰다니. 이게 우연이란 말인가?


다음 글자를 보았다. ‘우주홍황宇宙洪荒.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우주는 넓고 거칠다’라고만 해석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안이 설명한 우주라는 단어의 본뜻에 따르면 우宇는 공간이고, 주宙는 시간이다. 즉, 다시 해석하면, 공간은 넓고, 시간은 거칠다는 뜻이다. 재호는 유안에게 해 주었던 ‘시공간의 휨’ 이야기가 생각났다. 재호는 유안에게 분명 시공간이 거칠다는 표현을 썼었다! 유안이 아닌 누가 이렇게, 아주 먼 후대에나 밝혀질 우주의 본질을 꿰뚫고 있겠는가.


모든 게 연결되는 것 같았고 명확히 설명하는 것 같았다. 재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재호는 천자문의 저자를 확인했다. ‘주흥사’라는 이름이었다. 이름을 숨겼을 수는 있으나, 유안이라는 이름이 아닌 것을 보고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의 병을 되새겼다.


‘조현병은 의미 없는 사건들을 연결해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만들어내잖아. 증세가 심해질수록 더욱 논리가 없어진다. <천자문>은 원래부터 있었다. 나도 어릴 때 읽어봤고 외우기도 했었다. 아마 병이 심해져서,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다고 착각하는 걸지도 몰라.’


다음 글자들을 읽어보니, 역시 별다른 의미를 찾기는 힘들었다. 역사 이야기, 철학 이야기 등이었다. 재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마지막 장을 펼치기 직전이었다. 생각해 보니 재호 자신도 어릴 때 <천자문>을 이미 여러 번 읽어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천자문>을 마지막까지 다 읽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에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재호는 조금 두근거림을 느끼며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 쓰인 마지막 여덟 자를 보고, 숨을 멈추었다.


<천자문>에서 마지막 구절은 아무 뜻도 없는 어조사 4개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재호는 그 글을 한동안 가만히 보고 있다가, 결국 눈물을 쏟았다. 1500년 전 책의 저자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는, 지워진 역사와 시간을 거슬러 당도해야 할 사람에게 당도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 의미 없는 그 마지막 구절. 아니, 재호에게도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의미가 없었을 그 구절은, 이제 재호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구절이 되었다. <천자문>의 마지막 여덟 글자는 이렇게 적혀 있었고 책에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謂語助者 위어조자 焉哉乎也 언재호야』

‘어조사 또는 ‘말씀’을 돕는 자는, ‘언재호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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