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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8)

언젠가는 - 비밀의 화원(이상은)

by 박경민


그리고, 전철의 문이 닫히려는 찰나—훈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문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특별한 이유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결국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 아슬아슬하게 몸은 빠져나왔지만 가방이 문에 끼어 버렸다.

“출입문이 닫힐 때는 손이나 몸이 끼이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요란하게 울리며, 훈이 타고 있던 전철의 출입문이 다시 열렸다.
당황한 채로 서있던 훈은 재빨리 가방을 잡아당겼고, 전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 플랫폼에서 급행열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를 향했다.
그녀 역시 몸을 돌려 조용히 눈길을 건넸다.
가방을 빼낸 훈은 먼지를 툴툴 털며 고개를 들었고, 이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그녀 뒤로 급행열차가 플랫폼을 따라 미끄러지듯 들어왔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슬며시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는 그녀와 훈 사이의 공간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둘 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너?"
그가 기억 속에서 수없이 그렸던 목소리가, 눈앞에서 미소와 함께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훈의 심장 한쪽이 '툭' 하고 기울며,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훈의 등 뒤에서는 조금 전까지 그가 타고 있던 전철이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고, 그녀 뒤편의 급행열차는 이내 조용히 멈춰 섰다.


9화. 비밀의 화원


2006년 3월.

훈이 입학한 대학은 공대가 유명했고, 그가 선택한 전공 또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학과였으므로, 남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캠퍼스 생활의 시작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전공을 선택한 삼백 명의 신입생 중 여자인 동기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공대건물의 복도며 휴게실, 강의실과 자판기 앞의 짧은 줄까지 어디를 봐도 남학생들로 가득한 풍경은 ‘남대’ 혹은 ‘군대’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공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 풍경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직 소년의 느낌이 남아있는 철부지 남학생들이 우글거렸고, 그 속에서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여자 동기들은 오히려 눈에 더 잘 띄었다.

하지만 그중 훈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 이는 없었다.

E를 빼고는.


E는, 처음 본 순간부터 어딘가 달랐다.

진한 화장을 하는 것도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언제 말을 멈추고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느릿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작은 동작 하나에도, 시선을 붙잡는 리듬이 있었고, 말을 고르기 전 잠시 머뭇거리는 숨결 속에도 자기만의 침착한 템포가 배어 있었다.

말하자면— 먹구름 가득한 공대 건물보다는,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은 인문대 벤치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여학생이었다.

당연하게도 개강하자마자 여러 동기들과 선배들이 그녀 곁에 몰려들었다.

그녀가 학교에 있는 동안, 그 주변엔 늘 사람들이 감싸고 있었다.

반면 훈은 평범한 공대생이었다.
아침 수업에 맞춰 겨우 눈을 뜨고,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으로 홀로 아침을 때우며, 셔츠와 청바지는 일주일쯤 계속 입는... 그런 전형적인, 아니… 전형적인 공대생보다 조금 더 아웃사이더 느낌이 나는 남학생.

그는 그때까지 경양식집에서 나이프와 포크로 돈가스를 썰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학기가 시작된 뒤, 훈은 자연스레 그녀의 세상 바깥에 서있었다.

가끔 쉬는 시간에 멀찍이서 바라보거나, 복도에서 스치듯 지나치기도 했지만, E와 말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같은 학과였지만, 그저 수업시간에 한두 번 ‘안녕’ 하고 인사나 나누었던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학기 내내 그녀의 주변엔 늘 사람들이 넘쳤고, 훈은 강의실 뒤편에 조용히 앉아, 가끔 그녀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나고 2학기가 되었다.

훈도 드디어 그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수요일 오전 11시, 교양 수업이 있는 날.

그 수업만큼은 이상하게도 E의 주변에 과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없었다.

하지만 훈은 그녀 옆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자리 오른쪽, 두 칸 뒤. 뒷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가끔, 정말 가끔, 그녀의 옆얼굴이 보이면 아무 일도 없는 척 책장을 넘기며 시선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눈에 담은 그녀의 빛나는 얼굴을 가슴에 담고서.

그러던 어느 날,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둔 수요일 아침.

훈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에 늘 타던 용산행 급행 대신 일반 전철을 타기로 했다. 그날따라 느린 리듬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느린 속도로 스쳐 지나는 역들과 철로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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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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