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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9)

언젠가는 - 입술이 달빛(소규모아카시아밴드)

by 박경민


홍대 롤링홀.
공연장은 생각보다 작고 어두웠다. 그녀와 훈은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무대 바로 앞을 채운 이들의 뒤편에 나란히 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장에는 점점 사람들이 몰렸고, 둘 사이의 공간은 자연스레 좁아지며 어깨가 닿을 만큼 바짝 붙게 되었다.
훈은 그녀가 옆에 바짝 붙어있는 것이 좋았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되었고, 본 공연 전에 몇몇 게스트들의 무대가 먼저 선보여졌다.
그리고 그 게스트 중에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도 있었다. 그들이 나와서 인사를 할 때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동시에 웃었다.
그녀는 첫 번째 곡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곡 좋아. 진짜 좋아."
노래가 시작되고 얼마 안 가 둘의 손끝이 살짝 스쳤다. 훈은 그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전해주는 보드라운 감촉에 짧은 전율을 느꼈다. 사실 그는 둘이 나란히 섰을 때부터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을까.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맞잡았고, 이내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둘 사이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꼭 쥔 채, 나란히 어둠 속에 서서, 평소 이어폰으로 함께 듣던 음악을 라이브로 들으며,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훈은 무대가 계속되는 동안 가수의 목소리보다, 그녀의 부드러운 오른손이 전해주는 감촉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아밴의 무대가 끝날 때쯤에는 그녀의 머리가 슬며시 훈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었다.


10화. 입술이 달빛


10월의 대학교는 사방이 노란 은행잎과 붉은 단풍잎으로 뒤덮여 캠퍼스 특유의 젊음과 낭만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낮의 햇살은 짧아졌지만, 그만큼 더 투명해졌고 적당히 기분 좋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조금 쌀쌀해진 기온 덕분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여름과는 사뭇 다르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아마 훈의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난 오후, 둘은 정문 옆 은행나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각자의 가방을 멘 채, 아무 말 없이. 손끝은 닿지 않았지만, 발끝은 나란히 움직였다.

“오늘 하늘 되게 맑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높은 푸른 하늘이었다. 구름 하나 없었고, 햇살은 은행나무 잎 사이를 지나 그녀와 훈에게 작은 빗방울들을 선사하고 있었다.

“어. 그러네. 딱 걷기에 좋은 날씨인 거 같아.”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웃더니, 길가의 낙엽 더미를 툭툭 밟으며 걸었다.

그때 훈은,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아직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엔 이른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투나 웃음, 걸음 속도 같은 것들이 자꾸 마음속에 남았다.

‘그녀는 지금, 나와 함께 걷고 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녀가 곁에 자주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훈의 하루가 조금은 달라졌다. 식사 메뉴를 고르는 일, 강의실을 향해 걷는 길, 전철 안에서 음악을 듣는 시간까지도.


둘은 전철을 타고 학교를 오가는 길에 서로의 음악을 나눴다.

그녀는 훈에게 Kent, Coldplay, Lasse Lindh의 음악을 소개해주었고, 훈은 Blur, Fishmans,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곡들을 들려주었다.

훈은 송내역에서 그녀를 기다릴 때, 항상 kent의 '747'을 들었다. '747'의 긴 후렴이 고조될 무렵, 계단을 내려오며 조금씩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참 좋았다.

음악과 그녀가 겹치는 순간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주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잔잔한 곡들을 들었다. 그녀는 그들의 뽕짝 느낌의 박자감을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훈이 fishmans의 앨범, '남자들의 이별'을 선물하자, 다음 날 그녀는 웃으며 훈의 어깨를 쿡 찔렀다.

"음악 굉장하더라!"

그녀의 그 말 한마디가 훈의 하루를 오래도록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훈에게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훈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연애 경험이나 가족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날씨 이야기, 수업 이야기, 친구와 점심 메뉴, 최근 본 영화 같은 대화들이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평범한 대화 속에서 훈은 점점 그녀를 더 알고 싶어졌다.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아무 일 없는 순간들’이 조금 더 오래, 그리고 계속해서 반복되기를 바랐다.

11월의 어느 저녁. 훈은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문득 생각했다.

‘혹시 오늘, 그녀가 나와 함께 집에 가기 위해 일부러 기다렸던 걸까?’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늘 훈과 함께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수업을 마치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뿐이었는데도. 물론 훈이 기다릴 때도 있었다.

훈이 기다렸던 이유는 분명 그녀가 좋았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묻지 않았다. 확신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매일, 말하지 않은 감정들을 마음속에 하나씩 접어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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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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