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코나)
한참을 머뭇거리던 끝에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준비했던 한마디를 꺼냈다.
“오늘 밤… 같이 있고 싶어.”
E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훈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지금, 그 말하려고 얼마나 고민했어?”
훈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좀 많이…”
그녀는 훈의 손을 가만히 잡고, 눈을 맞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그런 마음이었어.”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을 더 꼭 쥐었다.
“오늘은 같이 있자.”
그들은 특별한 계획 없이 1호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전철에서부터 이어진 돌만의 순간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한 장면씩 또렷하게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종로에 내린 뒤, 둘은 오래 걷지 않았다.
그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따뜻한 점심을 먹었고, 카페에 들러 달콤한 커피를 마셨다.
별 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보다 더 오래 머물렀고, 작은 웃음에도 심장이 자꾸 쿵쾅거렸다.
카페를 나와, 덕수궁 돌담길 근처를 느릿느릿 걸었다.
말보다 발걸음이 많았고, 손보다 그림자가 더 자주 나란히 놓였다.
늦은 오후, 햇살이 조금씩 사그라지던 무렵 둘은 삼청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돌담 사이로 퍼지는 겨울의 공기, 사람이 거의 없는 고요한 골목.
그녀가 ‘언젠가 밤에 한 번 같이 걸어보고 싶다’고 말했던 길,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오래된 건물 외벽에 따뜻한 조명이 켜져 있는 작은 호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크지 않았고, 유리문 너머로는 환하게 빛나는 조용한 로비가 보였다.
건물은 아담했지만 깨끗했고, 마치 이 시간, 이 장소가 두 사람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
11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첫 키스 이후, 날씨는 점점 차가워졌지만 둘 사이의 시간은 그와 정반대였다.
처음 느끼는 일들, 처음 해보는 일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붐비는 전철 안에서는 늘 손을 깍지 낀 채 꼭 붙어 있었고, 겨울바람에 손이 시릴 때면 훈은 장갑을 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어 주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다 책상 아래로 발끝이 닿으면 괜히 웃음이 터졌고, 강의실 뒤편에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입을 맞췄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가 서로의 온도에 익숙해져 갔다.
두 사람은 '무언가 멋진 일'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때 E가 내년 4월에 전주에서 열리는 영화제 이야기를 꺼냈다.
둘은 약 일주일간 그곳에서 머물기로 약속했고, 경비를 직접 마련하기로 했다.
훈은 집에서 멀지 않은 물류센터에서 택배 하역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 5시부터 모든 택배 물품이 하역될 때까지였다.
이른 새벽, 홀로 자유공원 홍예문 밑을 지날 때면 칼바람에 얼굴이 아리고, 온몸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졌지만, 첫 번째 택배 트럭이 도착하고 나면 그런 추위 따위는 금세 잊혔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로, 트럭에 빼곡히 채워진 짐들을 하나씩 꺼내 옮기다 보면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들어서 옮긴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그건 물건을 들고, 온 힘을 실어 컨베이어 벨트 위로 던지는 일이었다.
그곳에선 그 일을 '까대기'라고 불렀다.
사무실에서 가끔 문제가 생길 때만 나오는 매니저 말고는, 그렇게 던지는 걸 두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이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할 일주일을 떠올리면, 훈은 그 모든 고됨이 견딜 만해졌다.
E는 오후 2시부터 오후 9시까지 압구정역 팬시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화, 목, 토요일 오전엔 영어 학원까지 다녔으니, 둘이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월요일 오전이나 일요일 뿐이었다.
훈은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도착할 때마다 문자를 보냈고, 그녀는 늘 빠르게 답장을 해왔다. 그때 몇 시간씩 주고받던 짧은 문장들이 훈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훈이 만약 거울을 봤다면, 그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마다 둘은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를 봤다.
그중 어느 날, 조명이 꺼질 때까지 극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웃긴 장면에서 시선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그 순간부터 손끝이 얼굴을 스치고, 목덜미를 지나 서서히 그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두운 극장 안, 스크린 빛이 깜박일 때마다 서로의 거친 숨결과 뜨거운 눈빛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극장은 조용했고, 영화는 어느새 엔딩 크레딧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떤 장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입술과 몸, 그리고 따뜻한 체온만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스킨십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깊어져 갔다.
손끝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이마를 맞대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입맞춤 뒤 이어지는 고요 속에는 서로의 몸을 향한 조심스러운 손길이, 새로운 떨림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보다 더 큰 기대가 자라나고 있었다.
훈은 그 기대를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며칠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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