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Oct 12. 2023

가만히 감각하기

도서관 앞 벤치에서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참 좋다. 이렇게 날 좋은 날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건드리는 수업을 만났다. 얼른 세상으로 나가서 나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는 기분이 내 안에서 휘몰아친다.


날씨가 좋아서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다. 강의실을 나와 몇 발짝 걸으면 이내 흩어지고 말 줄 알았던 생각은 걸음마다 커져서 나를 압도한다. 지금 이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떤 방식으로도 감히 그것에 대해 온전히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이 파래서, 구름이 하얘서 길을 가다 멈추어 사진을 몇 장 찍는다. 나를 압도하는 이 강렬한 희망과 절망에 대해서는 여전히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화면에 모든 말을 가둬넣는다. 내가 감각하고 있는 지금, 여기, 그리고 나의 세계가 정지된 풍경 안에 영원히 보존되도록 한다.


늘 가던 길 따라 도서관에 들어가려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싫어져서 문 앞에서 발을 돌린다. 천장이 막힌 도서관 안에서는 나를 자유롭게 풀어둘 수 없을 것 같아서.


도서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감각하는 연습을 한다. 이런 게 삶이라면 좋겠다. 등판이 태양에 서서히 익어가는 것을 느끼며, 내가 꿈꾸는 삶에 대해 자유로이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