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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환 Aug 27. 2020

책상 서랍 속 '주사기'

장소에 어색한 물건이 한두 개쯤 있다.

만년필 잉크가 또 굳었다.


김경태 작가님의 "갑자기 종이 노트에 글씨가 쓰고 싶어 졌다" 글을 보다가 생각났다.

만년필을 한참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주 사용할 때에는 문제가 없는데, 까먹고 한참 안 쓰게 되는 때면 여지없이 만년필 잉크가 마르고 굳는다.

수십만 원이 넘는 고급 만년필은 한참을 안 써도 잉크가 굳거나 하지 않겠지?

고급 만년필의 세계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만년필은 몇 개가 더 있기는 한데 라미 만년필 딱 2개만 사용하고 있다.

일반 펜촉에 검은 잉크를 넣은 만년필은 가지고 다니면서 밖이나 회사에서,
1.1mm 캘리그래피촉 만년필에는 파란색 잉크를 넣어서 주로 집에서 쓴다.


같은 종류의 만년필이지만, 펜촉의 두께와 색상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다르다.

쓰고 난 글씨뿐만 아니라 쓸 때의 느낌까지도.


캘리그래피촉 펜을 잡았을 때에는 결을 따라 글씨를 가지런히 쓰게 된다. 주로 생각이나 감상,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적듯 넋두리 같은 글들을 적게 된다.

재미있는 것이, 오래 안 쓰다가 쓰게 되면 펜촉 부분의 잉크가 진해져 있어서, 거의 검은색에 가깝게 써지다가 점차 원래의 파란색으로 돌아온다.


잘 보면 아래로 갈수록 파란색이 된다


일반 펜촉으로는 메모, 동영상 강의나 책을 읽고 기억할 내용들을 적는다.

그렇다고 결벽증이 있는 사람처럼 항상 구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만년필에 잉크를 넣기로 했다.

보통 잉크가 조금 말라 있을 때는 잉크만 충전해서 조금씩 굳은 촉을 녹여가며 원상태로 되돌리곤 했다.

이번엔 그렇게 안될 것 같아서 만년필 촉과 내부에 굳어 있는 잉크를 물로 녹였다.

화장실 세면대 물줄기가 촉에 닿자마자 새까만 색으로 변해 떨어진다. 적당히 헹구고 나서 티슈로 물과 남은 잉크를 함께 닦고 빼냈다.


회사 책상 서랍에는 '주사기'가 있다.

아마도 의료계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평소 주사기를 갖고 있는 어른은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당뇨병 환자나 마약중독자, 그리고 깔끔하게 만년필에 잉크 넣는 요령을 찾지 못한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보통은 잉크통에 만년필 촉을 담그거나 잉크 카드리지만 빼서 담가 넣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요령이 없는 건지 그렇게 할 때마다 손과 책상, 심할 때에는 옷에까지 잉크를 흘릴 때가 많아서 나름 생각한 방법이 주사기를 이용한 것이다.



문구점에서 몇백 원에 산 주사기만 잉크통에 담가 잉크를 빼내고는 카드리지 입구에 잘 꼽아 주입한다.

이마저도 가끔 실패할 때가 있어서 잉크를 흘리곤 하지만, 그래도 다른 여느 방법보다는 성공률이 높다.


잉크를 다 넣고 주사기를 물로 닦으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른 직원이랑 마주쳤다.

병원이 아닌 IT 기업에서 <주사기를 들고 다니는 직장 동료>가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겠지?




집에 있는 만년필도 아마 잉크가 굳어 있을 것이다. 노트를 쓴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노트에 글을 적는 횟수가 적어졌다.

그 만년필도 오랜만에 잉크를 넣어야겠다.(집에도 주사기가 하나 더 있다!) 

그리고 노트를 몇 장 정도 채워볼 생각이다.


<주사기를 들고 다니는 아빠(남편)> 버전을 찍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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