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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r 17. 2018

환자에게서 위안을 얻다


이전 직장이었던 병원에서 저에게 진료를 받다가 제가 직장을 옮긴 이후에도 저에게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종합병원 의사의 이직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보통 어디로 가는지 환자들에게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개업을 하면 자신이 보던 환자를 모조리 끌고나가는 분들도 있지만 전 그런 경우도 아니었으니까요. 의사를 따라 병원을 옮기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치료받던 익숙한 환경을 떠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떠나오면서 환자들에게 인사를 할 때도, 가능하면 계속 저의 후임자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시도록 권해드렸었습니다. 그분이 정말 믿을만한 저의 후배이기도 했고요. 지금 직장은 안그래도 환자들이 너무 많은 병원이고, 수가도 3차종합병원이어서 2차병원이었던 전 직장에 비해 비용도 비싼데, 그렇다고 인프라나 환경 면에서 더 좋다고 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처음엔 한 분도 저를 따라 병원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지 말라고 했지만 막상 아무도 안오니 약간 서운하기도 했었습니다. 사람 마음이 우습지요.

그런데 이직 후 5-6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하나 둘씩 제 외래를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암환자들이 이전 치료에 내성이 생겼다는 나쁜 소식을 접하면 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병원을 알아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단계에 온 환자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저를 선호해서라기보다는 치료에 대안이 없을까 하여 더 큰 병원을 찾아온 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를 다시 찾아준 것이 고마웠고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치료를 다 받고 오신 분들이라, 제가 더 해드릴 것이 있지는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대개는 그런 경우는 신약 임상시험이 대안이기는 하나, 참여하실 수 있는 분은 매우 소수이고 그중에서도 약제의 효과를 보실 수 있는 경우는 더욱 소수입니다.

그 분들에게 제가 해드린 것은 크게 효과가 기대되지 않는 약제들을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몇 번 투여해보다가, 결국 치료가 도움이 안된다는 말기 통고를 하고 호스피스를 안내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몇 분은 돌아가셨고, 이제 또 몇 달 안 남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직장을 옮긴 지도 만 2년이 지났고, 제가 주로 보는 전이성 대장암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간은 평균 2-3년입니다. 올해는 아마 이 분들 중 대부분과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 들 중 한 분이 저에게 어제 이렇게 말씀해주었어요.

“선생님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게 저에게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어찌나 저에게 위안이 되던지 너무 감사했습니다.

최근 병원이라는 직장생활에서도 자존감이 떨어지고 힘든 일이 많아서 더 그랬는지, 속으로 왈칵 눈물이 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느낌은, 나의 쓸모를 발견하는 일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특별히 제가 이타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가치를 다른 이가 인정해주고 발견해주는 것은 사람에게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하물며 이렇게 몸과 마음이 힘든 이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쁘면서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내가 그만큼 이분에게 해드린 것이 있나 돌아보게 됩니다.

다음주에 마지막 남은 비보험 경구항암제 치료를 시작해보기로 했고, 전신상태가 썩 좋지 않아 도저히 임상시험을 권유하기는 어려운 분인데… 그 다음에 오게 될 절망과 두려움을 잘 견뎌내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전이암을 진단받고 4년을 사셨고 마음을 비운 것처럼 말씀하시다가도 “정말 좋아질 수도 있겠지요?”라며 간절히 물어보시면 참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환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존중이었기에 그분들은 저를 따라서 병원을 옮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그것을 저도 그분들에게서 받고 있으니 말이지요. 환자는 더욱 그렇지만 의사도 환자의 말에 일희일비하고,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것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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