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얼음판에서, 늙어서는 암과 싸우던 한 남자
평창올림픽에는 솔직히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국정농단사태로 비롯된 여러 어려움을 딛고 이만큼이나마 준비한 것이나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며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올림픽을 통해 해냈다는 것이 신기하고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평창올림픽 하면 생각나던 한 분. 2011년에 올림픽 유치를 성공하였을 때 블로그에 올려두었던 글을 다시 꺼내봅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환자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치료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우쭐해진다. 70세가 넘으셨지만 언제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기운이 넘친다. 대장암이 간에 전이된 4기로 진단받은 것은 4년전. 수술이 다행히 잘 되었지만 1년만에 간에 다시 재발, 항암화학치료를 하고 간 고주파 시술을 받은 후 다시 폐로 암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 이미 1년 반 전. 하지만 너무 작고 천천히 자라는 암종이고 증상도 전혀 없어서, 굳이 항암화학치료를 하며 일찍 몸을 괴롭히기보다는 경과를 지켜보다가 치료를시작하자고 말씀드렸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점점 커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서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한지 이제 4개월이넘었다.
신기하게도 더 이상 바꿀 약이 없어서 옛날에 썼던 약을 다시 쓰는데도 종양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다행이지만 환자가 약의 부작용을 잘 견디는 것이 더 다행이다. 이분은 예전부터 아파트 경비일을 하셨는데, 요즘도 주사를 맞고 한잠 잤다가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24시간 연속 근무를 하신다는 것이다. 24시간 근무 24시간 휴무...옛날 20대 때 응급실에서 그렇게 한달을 근무해봤는데 정말 한달 이상은 버텨내지 못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이었다. 물론 아파트 경비일은 시립병원 응급실 인턴의 근무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수면 주기가 자주 어그러진다는 것 자체가 젊은 사람도 쉽게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항암치료까지 받으면서 하신다니....안쓰러운데 환자분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요즘도 쉬는 날이면 자전거를 타시고 운동을 하시는데, 아무래도 본인이 치료에 잘 반응하고 잘 견디고 있는 것이 젊은 시절 체력을 잘 키워놓아서 그런 것 같다는 말씀에 동감이 간다. 학생시절 빙상 선수로 활약하셨다고 한다. 어제 외래에서는 "빙상선수라고 봄여름에는 운동 안하는게 아니야...사이클에 육상에 정말 하루도 쉴 날이 없었지.. 이규혁, 모태범 선수가 금메달 땄을때 정말 감격에 겨워 울고 말았어... " 외래 진료가 밀리는데도 왠지 이런 수다를 막고 싶지가 않아 그냥 듣고 있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평창에 올림픽 유치되었다니 정말 감회가 남다르셨겠어요."
"아 물론이죠. 정말 빙상계에 있던 나로서는 그 감격이 말도 못해요. 우리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에요!"
평창 동계올림픽...사실 난 원시림 및 환경 파괴, 지방정부재정적자와 파탄같은 여러 부작용들이 더 걱정되기는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얼음판에서 싸우고 나이들어서는 암과 싸우고 있는 씩씩한 노장을 위해 오늘 하루만은 평창 브라보를 외쳐보기로 한다.
이전 직장에 근무할 때 보았던 환자분인데, 항암치료 이후 반응이 좋아서 내친 김에 폐 전이 수술까지 진행하였고, 2016년 초에 전 직장을 떠났을 당시에는 재발 없이 경과관찰만 하던 상태였습니다. 거의 8년을 정기적으로 만나뵙다가 떠나왔네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빙판 위의 노장께서 지금도 무탈하시기를 마음으로 빌며.